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86화
“단목련의 자세는 거의 교본과도 같으니 항상 눈여겨 봐두도록 해라.”
창피해서 목까지 빨개질 것 같다. 하지만 단목현우는 맞는 얘길 했는데 무슨 문제가 있냐는 표정이었다.
‘숙부가 해도 되면서!’
단목현우도 단목현성의 빛에 가려진 감이 있어서 그렇지 재능과 실력으로는 모자람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빼어난 조카의 실력을 보여 주고 그것으로 아이들의 실력 향상을 꾀하겠다는데.
‘그래, 애들이 괜히 이상한 자세를 보고 배우느니.’
자신의 자세가 정확하긴 했다. 심안으로 익히고 조화로 펼치는 초식보다 더 정확할 수는 없을 테니까.
련은 크게 숨을 들이켜 호흡을 가다듬고는, 손에 쥔 목검을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자리의 모두 낙성십이검의 기본은 알고 있었지만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 단목천기의 직계가 보여 주는 건 좀 다르지 않을까!
그리고 련의 시연이 끝났을 때 왠지 어색하고 침울한 침묵이 장내에 내려앉았다.
“후우……! 끝…… 입니다. 어?”
모두가 조금 기가 죽은 듯한 얼굴로 련을 쳐다보고 있었다. 환호성까지는 아니어도 상기된 얼굴과 마주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저렇게 주눅이 팍 든 얼굴을 보자 경각심이 일었다.
‘너무 진지하게 했나? 아냐, 그래도 강하게 커야지!’
단목현우가 헛기침하고는 지도봉의 끝으로 련의 발치를 가리켰다.
거기엔 발자국 하나 없이 매끈한 맨땅만 드러난 채였다.
“보이느냐? 강한 검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법이다. 보법과 초식의 묘리를 함께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
“차근차근 수련을 하다 보면 너희도 금방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느니라.”
“정말…… 그럴 수 있을, 있을까요……?”
단목완이 소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심성이 여려 질문 같은 것도 거의 하지 않는데, 련이 펼친 검법이 마음을 깊이 건드리고 지나갔다.
“당연하지. 너희들은 우리 세가 최고의 인재들 아니냐!”
단목현우가 쾌활하게 말했다. 드디어 단목완을 비롯한 아이들의 얼굴 위로 기대감 어린 홍조가 들었다.
다만 그중에서 다소 험악한 인상의 소년, 매신유만은 미간을 한껏 찌푸린 채 련의 손과 발을 번갈아 보기만 할 뿐이었다.
* * *
“그런데 흑곡단 말이야…… 우리가 진짜 먹어도 되는 거야?”
또래들 가운데 제법 체격이 좋은 소년, 단목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단목규는 가정형편이 썩 나쁘지 않은 집에서 태어나, 재능에 부족함이 없어서 나름 열심히 검술을 익히다가 이번 기회에 본가로 올라온 소년이었다.
“음, 먹어도 되는 게…… 아니면……?”
단목완이 소심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저녁 식사 이후 다 같이 숙소 앞의 마당에 옹기종기 모여서 잡담을 나누던 자리에서 단목규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곤 몸을 한껏 숙이고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옛날에 들었는데, 어떤 무림 세가는 방계 아이들을 키워다가 충성하게 만들고 조종하려고…… 무슨 독 같은 걸 영약이라고 속이고 몰래 먹이기도 한대.”
“헉…… 진짜?”
“응. 그래서 명령을 안 들으면…… 꽥! 하게 하는 거지.”
“독은 먹으면 그냥 죽는 거지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해……?”
“어…….”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는지 단목규가 말끝을 흐리다가 잽싸게 덧붙였다.
“어, 그러니까 죽게 하진 않고 아프게 하는 정도로? 그러다가 해독제를 안 먹으면 죽는 거야. 그럼 난 살기 위해서 세가 직계가 시키는 걸 할 수밖에 없는 거고……!”
이야기의 앞뒤를 맞춘 단목규가 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다른 아이의 말에 다시 침울해졌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너한테 시켜야 할 게 있을까?”
매신유의 냉소적인 말에 단목규가 멍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어?”
“그렇게 시키는 건 네가 다 해낼 수 있긴 하고?”
단목현우는 유쾌하고 좋은 교두였지만, 그렇다고 엄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아이들은 자신이 걸음마 단계라는 걸 잘 알았다.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너한테 비싼 독까지 먹여 가면서 뭘 시키려고 하시겠어?”
“독이 비싸?”
“너 불로초 같은 건 금괴로도 못 산다는 거 들어 봤어?”
“어어.”
“독도 그 정도는 해. 사람 살리는 것만큼 사람 죽이는 것도 겁나게 비싸. 우리한테 그런 짓 할 돈이 있으면 자기들끼리 내단 사먹기도 바쁠걸.”
“아…… 그런가? 하지만 우리가 커서 어, 천하제일인 같은 게 되면 말이야.”
“널 보니까 우릴 뽑아 놓은 게 이미 적자인 게 눈에 훤하다. 천하제일인도 똑똑해야 되는 거다.”
“너, 너 벌써 직계한테 회유된 거야?!”
매신유가 한심하다는 눈빛을 숨기지 않고 단목규를 쳐다보았다.
“넌 그럼 뭐 하러 여기 왔는데?”
“어…… 무공을 배워서…… 천하제일인이 되려고.”
“아, 그래? 그러면 단목세가에서는 뭐 좋으라고 너한테 돈도 안 받고 무공을 알려 주는데?”
“아니, 그런 게 아니지. 내가 유성십팔숙의 일인이 되어 단목세가의 검수로 세가를 빛내면 세가에도 좋은 일이니까…….”
“유성십팔숙은 누구 명령을 듣는데?”
“어, 가주님……?”
“가주님은 직계가 아니고 뭐 선계냐?”
“어, 어라…… 그러네?”
단목규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매신유는 혀를 차며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목규는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나, 나는 그냥 재밌는 이야깃거리라고 생각해서 한 말이었는데…….”
“누가 너보고 독을 먹일지도 모르는 인간이란 얘기를 하고 다니면 그게 넌 재미있겠냐?”
“아니…….”
“그럼 그 독을 먹일 수도 있는 직계가 그 얘길 듣고 기분이 상하면 넌 어떻게 되겠냐? 여기까지 왔으면 생각이란 걸 좀 해라.”
마지막 말을 끝으로 매신유는 자리를 홱 떠났다. 아이들 사이로 싸늘한 공기가 흘렀다.
“어…… 나, 나도 가 볼게…… 오늘 배운 거 복습하러…….”
“나도…….”
그리고 모두가 떠나고 서극림과 단목규만 남았다. 단목규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서극림을 쳐다보았다.
“내, 내가 많이 잘못한 거야?”
서극림은 무뚝뚝한 얼굴로 단목규를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기씨가 매주 챙겨 주시는 그건 네 생각 같은 그런 게 아니야.”
“……?”
단목규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가 심법을 조금이라도 깨쳤다면 그런 얘긴 안 했겠지.”
“시, 심법은 엊그제 구결만 배웠잖아…….”
“신유는 그날 저녁에 바로 심법의 묘리를 조금이나마 알아챘거든. 그래서 우리가 먹은 흑곡단이 뭔지 안 거야.”
서극림은 매신유가 다른 의미로 걱정했던 걸 떠올렸다.
— 청련수로 정말 돈을 많이 벌었다는 건 들었지만 이런 걸 매주 우리한테 먹일 정도나 된다고?
서극림이 보기에 심법을 깨친 건 열 중에 세 명이었다. 자신과 단목완, 그리고 매신유.
세 사람 다 아주 작게나마 심법의 묘리를 알아채자마자 자신이 매주 먹어 온 게 뭔지도 눈치챘다.
단전 근처를 조용히 맴도는 기운이 무엇인지. 크지는 않았지만, 아주 부드럽고 작고 유순한, 그들이 소화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진기가 있었다.
매신유 역시 특유의 기민한 눈치로 그걸 알아채곤 서극림에게 먼저 말을 걸어왔던 것이다.
— 직계 아기씨는 우리랑 같은 무복 아니면 계속 낡은 무명옷만 입고 돌아다니는데, 우리는 매주 작은 영단 하나씩 먹는단 말이야?
서극림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단목련의 옷차림을 떠올릴 수 있었다.
평소에는 얼굴만 보거나 아니면 도무지 눈을 마주칠 수 없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탓에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 우리한테 이렇게 투자했다가 회수 못하면, 그땐 어쩌려고?
투자, 그 단어에 서극림은 정신을 차렸다.
그랬다. 지금 본가는 방계 아이들을 데려다가 투자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매우 거액을.
매신유는 심법을 조금이나마 깨우쳤던 엊그제부터 무척 초조해했다. 원치 않은 빚을 산더미처럼 진 사람처럼.
반면 단목완은 사람이 약간 달라졌다. 소심하기는 여전했는데, 눈빛에 흉흉할 정도로 빛나는 광채가 돈다고나 할까? 연무장에 단목련이 나타나면 제일 먼저 달려가는 게 단목완이었다.
‘어쩌면 우리 중에 제일 행복한 건 완이 아닐까?’
서극림은 단목완이 자랑하던 작은 금목서 가지를 떠올렸다. 아기씨가 꺾어다 준 거라던가. 그건 아직도 시들지 않고 꽃향기가 생생했다.
“아니, 나는 진짜 그냥…… 그런 얘기가 있다니까 신기하고 재밌어서. 우리 세가가 꼭 그렇다는 건 아니었어, 정말이야.”
“그럼 그런 얘긴 다들 재미없다고 하니까, 이제 하지 마.”
“아, 알겠어. 안 할게, 정말이야!”
“그래. 그럼 잘 자라.”
“아니, 극림! 잠시만, 잠시만. 너도 심법 좀 알아챘어? 나한테도 좀 알려 주면 안 돼?”
“내가 말해 줘도 잘 모를걸.”
“그래도, 응? 제발~!”
“알았어…….”
‘투자’라는 단어가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 투자가 실패하면 단목련이 얼마나 실망할지 생각만 했을 뿐인데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해져서, 서극림은 매달리는 단목규를 뿌리치지 못하고 데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