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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87)화 (87/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87화

“대신 남들이 재밌는 얘기를 한다고 다 듣고 와서 모두가 있는 데서 얘기하진 마.”

“응, 응. 나 말 잘 들어. 정말이야.”

“신기한 이야기를 들어도 나나 신유한테 먼저 얘기하고…… 우리 둘 다 괜찮다고 하면 그때 애들한테 얘기해. 무슨 말인지 알겠지?”

“시, 신유한테도?”

조금 전에도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면박을 주고 떠나간 매신유 아닌가. 단목규가 조금 망설였지만 서극림은 엄격하게 말했다.

“응, 신유한테도.”

“알았어…… 그럼 진짜 알려 주는 거지, 심법?”

“내가 말해 줄 수는 있지만 네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진 모르겠다. 약당주님이 알려 주신 거랑 크게 다르진 않아서.”

“응, 응! 괜찮아, 괜찮아.”

“그리고 아기씨가 첫날 써 주셨던 서신도 있잖아. 거기에 쓰여 있던 얘기 없었어?”

“어? 기억이 안 나는데…….”

“그것부터 읽어 봐. 도움되는 얘기만 적어 주셨으니까.”

“무슨 비급 같은 거야? 그런 느낌의 내용이긴 했는데.”

서극림은 뺨을 긁적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공의 묘리와 성취에 관해 적혀 있는 글이니까.

특이한 점이라면 일대일 맞춤이라는 것?

“음, 그래. 비급 같은 거야. 아기씨가 써 주신 비급.”

“그렇구나. 그럼 다시 봐야겠네.”

‘낭랑비급(娘娘祕笈)’의 탄생이었다.

* * *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

백의명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의 옆에 따라붙은 단목준을 보고 마른침만 꿀떡꿀떡 삼켰다.

“미치겠네…….”

“저, 저! 시키는 건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집으로 돌아갈래?

이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갔다. 저 간절한 표정을 보자니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백의명은 어깨를 크게 움츠리고는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까지는 열의에 차서 은신술을 연습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온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피력하고 싶었다. 자신의 슬픔을.

‘왜 이렇게 된 거지?’

이 소년의 뒤를 따라가 보라는 어르신의—백의명은 그 반로환동한 노고수를 속으로 어르신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명을 따라 여기까지 온 건 좋았다.

솔직히 중간중간 마음이 꺾일 만한 부분이 많았다. 항주를 벗어날 때부터였다.

이렇게 멀리 가야 하는 거라고는 얘기 안 하셨잖아요!

가지고 있는 거라고는 길거리에서 탁주 한잔 걸칠 돈밖에 챙겨 오지 않았는데. 그래도 꾸역꾸역 따라갔더랬다.

언제 돌아온다 말도 없이 환벽루의 방을 비운 게 신경 쓰여 비싼 전서구도 날렸다.

그렇게 저 애를 따라왔는데…….

— 너는 떨어지고 서씨 아들내미만 붙었다고? 이게 무슨 소리야?

— 내가 잘해야 한다고 누누이 말하지 않았더냐!

— 고작 그거 하나도 붙지 못해서 대체 뭘 하겠다고!

— 심지어 본가에서 내쳐졌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네게 그딴 짓을 하라고 했더냐!

짝!

그땐 백의명도 정말 놀랐다.

조부로 보이는 자가 먼 길 갔다 돌아온 아이를 내실에 들이지도 않고, 가을 찬 바람 부는 밖에 세워 둔 채 뺨을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매를 가져오라고 하인을 채근했다. 그렇게 시커먼 나무 방망이 하나를 쥐고 있는 힘껏 내리치는 게 아닌가?

애가 비명도 못 지르게 때리는데 그걸 어떻게 보고만 있겠나.

— 우와아악! 그만! 그만!

몰래 지켜보고 있던 백의명은 그대로 뛰어들었다. 내리치는 나무 방망이는 몸으로 막아야 했는데 어르신(?)의 추궁과혈 이후로 몸이 날아갈 듯해서 그런지 아프지도 않았다.

그런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굴종이 익숙한 피투성이 어린 남자애의 눈동자란.

‘미친 노친네가 기력도 좋아.’

갑자기 끼어든 백의명을 보고서도 그 집안 조부는 노발대발하기만 했다.

‘어디서 온 잡놈이냐’부터 시작해서 저 필요 없는 놈들 전부 썩 내보내라고 난장판이 벌어졌는데 거기서 이 소년이.

— 저…… 저도 이딴 집구석 필요 없어요!

그러곤 지금이었다.

“미치겠네…….”

‘어르신이 이러라고 날 보낸 건 아닐 텐데.’

뺨을 얼마나 세게 맞았는지 입술에 피까지 비친 소년이 눈에 독기를 품고 제 조부를 쏘아보는데 노인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런 노인 뒤에 왠지 기가 죽은 듯이 어깨를 움츠린, 비쩍 마르고 조그만 여자애가 보였다.

백의명은 눈치로 모든 상황을 알아챘다. 이 집안은 첫째에게 기대를 걸었다가 실망하고 나자 둘째로 눈길을 돌린 모양이었다.

그 난장판이 어찌저찌 마무리되었을 때, 소년은 상처와 증오와 혼란이 얼룩진 눈으로 그에게 간절하게 매달려왔다.

백의명은 아연실색했다.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그동안 이 집안에서, 아무도 이 아이를 위해 먼저 나서 주지 않았다는 걸.

‘대체 부모는 뭐 하는 사람들이야?’

그래서 이 애는,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 그저 자길 딱 한 번 지켜 줬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간절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다.

— 시키는 건 정말 뭐든지 할게요. 어딜 가든 상관없어요, 제발 저 좀 데려가 주세요……!

제발 데려가 달라는데 아무리 만류하고 꾸중하고 호통쳐도 들어먹질 않았다.

이 애의 부모와 조부도 찾으러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둘째가 뛰쳐나와 백의명과 단목준에게로 왔는데, 그러자 부모가 이 추운 날 겉옷 한 장만 입고서 막내를 찾으러 왔었다.

그들에게 애를 그렇게 때리면 어떡하냐고 백의명이 한마디 해 봤지만 ‘남의 집안일에 참견하지 마쇼’ 소리만 들었을 뿐이었다.

부모는 울면서 오빠랑 있겠다는 여동생을 기어코 데리고 돌아갔지만, 단목준은 덩그러니 남겨 놓았다.

다만 그 어머니가 백의명에게 몰래 주머니 하나를 쥐여 주고는 재빨리 딸을 데리고 남편과 함께 떠났다.

단목준은 어깨를 떨면서 그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시험에 떨어졌다고 나무 몽둥이로 애를 잡으려고 드는 집에 되돌려보내는 것도 솔직히 사람이 할 일이 아니지 않냐고…….’

그렇게 어영부영 거절하지 못한 채 지금까지 온 것이다.

“너 그러다 후회한다. 아무리 조…… 쓰레기 같아도 가족이 있는 거랑 없는 거랑은 달라.”

“아저씨는요? 아저씨도 가족 있어요?”

“……아니, 나도 없긴 한데……. 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너는.”

“부모랑 가족 없어도 아저씨처럼 될 수 있어요?”

“이 자식아. 말을 좀 들어 봐!”

“그럼 저도 아저씨처럼 될래요.”

그 순간 백의명은 정색하고 단목준을 노려보았다.

“이 모자란 놈아! 나처럼 되는 게 뭔지 알긴 해? 부모가 없어서 제대로 된 도관에 못 갔고, 그래서 이상한 데서 배우다가 기혈이 뒤틀려 외공만 가지고 이날 이때까지 빌빌대며 살아왔다고!”

남들 앞에 당당한 척, 부족함 없는 척, 이것만으로 충분한 척해 왔으나 진실로 그러했다면 그런 척까지 해 가며 ‘나 괜찮소!’ 하고 외치고 다녔을 리가 없다.

사실은 괜찮지 않았으니까, 부족함이 사무치고 가진 자들이 질투 나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기씨의 주머니나 훔치고 다니는 주제에 그들을 속여 넘긴 자신이 더 우월하다고 혼자서 낄낄거리면서…….

그때 백의명의 말을 들은 단목준은 눈물이 고여 빨개진 눈으로 백의명을 노려보면서 주먹을 꽉 움켜쥐곤 자기의 배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잇, 이익! 윽!”

“아, 아니! 야! 이 꼬맹이가, 너 미쳤어?!”

“아저씨가 없으면 나도, 나도 단전 필요 없어요!”

“돌아 버리겠네. 필요 없을 리가 있겠냐?! 나 생겼어! 얼마 전에 생겼다고!”

“……?”

먼 길을 돌아와서, 조부에게는 구타당하고 애써 쫓아온 어른에게도 내쳐지기 일보 직전의 순간에 단목준은 멍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백의명은 연거푸 마른세수를 하곤 말했다.

“잘 들어. 난 널 지켜 주려고 여기까지 온 사람이 아니야.”

“…….”

“오히려 네가 이상한 짓을 하진 않을지 감시하러 왔던 거라고.”

“제가…… 이상한 짓이요?”

“그래. 너 뭐 시험 칠 때 무슨 짓이라도 했냐?”

이 꼬마가 얽혔던 일이 단목세가의 이번 방계 모집이었다는 건 진작 눈치챘다. 거기서 사고를 쳤다는 것도.

그의 어르신도 단목세가와 연관되어 있을 터였다. 백의명의 추궁에 단목준은 꾸물거리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고기…… 먹였어요.”

“무슨 고기를 누구한테?”

“상한 닭고기…… 요. 서극림이라고, 일 등 할 것 같은 애한테…….”

“뭐야?!”

“하, 하지만 제가 일 등으로 합격 안 하면 할아버지가 화내시니까…….”

“아니, 그렇다고 어떻게 그…….”

자신도 살면서 죽이고 싶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독약 같은 걸 다 먹여서 죽여 버릴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실행한 적은 없었다.

나중에 실력을 키워 두들겨 패기만 했을 뿐이지.

‘어르신이 주시하라고 할 만하잖아!’

하지만 마음 한구석으로는 단목준의 절박함이 이해되기도 했다.

일 등으로 합격하지 못했을 때 그런 몽둥이로 얻어맞을 걸 빤히 알았다면. 그렇다고 진짜 상한 고기를 먹인 게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백의명이 숨만 쉬고 있자 단목준이 얼른 눈을 내리깔고 웅얼거렸다.

“잘못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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