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88화
“그…… 그 서극림이라는 애한테 사과는 했고?”
“그, 그건 걔가 잘못했어요!”
“무슨 잘못?”
단목준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제가 옷도 주고, 먹을 것도 주고, 엄청 잘해 줬는데 저보다 더 잘했으니까…….”
‘돌겠네.’
“네가 잘해 주면? 너보다 못해야 되냐?”
“그게 아니라, 걔는 저보다 더, 더 방계인데…….”
“너보다 더 방계면 너보다 못해야 되고? 너보다 잘하면 독이라도 먹여서 죽여 버리고?”
“하…… 하지만…… 할아버지가…….”
단목준이 어깨를 움츠리고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기어코 백의명이 폭발하고 말았다.
“그 미친 노친네가 애를 버려 놨어!”
“네?”
단목준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늘 같은 조부를 향해 ‘미친 노친네’라고 말하는 건 한 번도 들어 본 적도, 상상을 해 본 적도 없었다.
백의명은 다른 이유로 놀란 단목준을 눈치채지 못한 채 말했다.
“넌 잘못했어. 알겠어? 너…… 너보다 잘하는 애들, 너보다 태생 나쁜 애들 다 죽이면서 살면 안 된다고! 넌 뭣도 아니니까!”
‘어휴, 돌아 버리겠네. 내가 어린애 가르치고 있을 팔자인가?’
“네, 네…….”
“남이 너보다 잘하면 그냥 잘하나 보다 해. 아 쟤는 잘하네, 하고 그냥 넘겨.”
그와 동시에, 단목준은 왜인지 자신이 세가에서 마지막으로 들었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 넌 서극림보다 못해서, 이번 일을 들켜서, 그래서 쫓겨나는 게 아니야.
자신보다 조금 작은 키의 어린 소녀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차가운 목소리에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소녀는 한참이나 복잡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크게 심호흡하곤 알듯 모를 듯 한 말을 남겼다.
— 언젠가 네 안의 칼을 부러뜨려야만 해. 남을 찔러서도, 널 찔러도 안 된다.
‘지금의 네게는 아무 의미도 도움도 되지 않겠지만.’이라고 덧붙였던 그 말이 왜 지금 생각났을까?
“넵!”
백의명은 씩씩하게 대답하는 단목준을 보곤 오히려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잘난 듯 외쳤던 그이지만, 그도 그걸 못해서 여기까지 오지 않았던가. 괜한 수치심에 목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에이 씨!’
“나중에 서…… 뭐라고? 걔 보면…… 잘못했다고 사과도 하고…….”
“네!”
“그래서 걔는 붙어서 세가에 남았고?”
“네…….”
“하아, 그나마 진짜 다행이다.”
“다행…… 이요?”
단목준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백의명이 단목준을 쏘아보았다.
“네가 한 짓으로 걔가 떨어졌으면? 네가 걔 인생을 망쳐 놨으면 그걸 어떻게 갚을 거야!”
“아…….”
“그나마 붙었으니 다행이지.”
“네…… 그런데 극림이 절…… 용서해 줄까요?”
“그건 걔 맘이니까 네가 어쩔 순 없는 거고.”
백의명의 다소 냉랭한 말에 단목준은 기가 죽은 듯 고개를 푹 떨어뜨렸지만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백의명은 그 순간 직감했다. 이 멍청한 꼬마를 버릴 수 없을 거라고.
‘하아아, 어르신한테 뭐라고 설명하지? 애 하나 거둬 키울 돈은 또 어디서 구하고……. 진짜 이래도 되긴 하는 건가?’
눈앞이 막막하기만 했다. 단목준의 어머니가 남겨 놓고 간 돈주머니가 무거운 추처럼 느껴졌다.
* * *
거무죽죽하던 잉어의 몸이 점점 하얘진다 싶더니, 요즘에는 붉은 무늬도 아름답고 선명하게 돌아왔다.
‘밥도 안 주는데 진짜 큰일이 생기진 않겠지? 흑월은 내가 직접 모이를 줬었던 거니까.’
괜한 걱정이 들어서 가까이 가지 않으려고 하면 련의 기척을 느낀 잉어가 어찌나 열렬하게 꼬리 짓을 하는지, 또 모른 척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까이 가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활력을 되찾은 잉어가 열심히 연못 안을 활개 치면서 련에게 물방울을 튕기기도 하며 반가워하는 것이었다.
련이 맑은 연못물에 부채질을 한번 해 주곤 몸을 일으킬 때 저 멀리서 단목현우가 옷자락을 휘날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련아야! 련아 왔느냐?”
“숙부.”
“아이고, 이 숙부가 늦었다.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저도 방금 왔어요.”
“잉어 보고 있었니?”
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목현우는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연못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지만, 잉어는 자신의 오랜 주인이었던 단목현우의 눈길에는 다소 시큰둥하게 흐느적 헤엄을 칠 뿐이었다.
“네가 이 아이를 그리 아껴 주니 이름을 지어 주면 어떻겠니?”
“이… … 이름이요?”
다시 흑월 생각이 나 사양하고 싶었는데 잉어가 또 꼬리를 힘차게 튕겼다.
“이것 봐라! 이 녀석도 좋다는구나.”
그거야 당연히 우연이라고, 진짜 알아듣고서 좋다고 하는 거라면 그거야말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한 단목현우의 눈동자를 마주하자 그런 생각도 물에 씻은 듯이 사라졌다.
잉어 이름 한번 지어 주고 숙부가 기뻐할 수 있다면야.
“그런데 저 이름은 잘 못 지어서요. 오골계는 까망이라고 했다가 흑월로 바뀌었고 키우는 하얀 고양이도 하양이라고 했다가…….”
“아…….”
그 고양이는 결국 백련이 되었다.
“얘도…… 무늬가 빨간색이니까 빨강이……?”
“그, 그럼 홍린(紅鱗)! 홍린 어떠냐? 붉은 무늬가 있으니까 결국 련이 네가 지은 이름과 똑같구나!”
단목현우가 다급하게 말했다. 애절할 지경이었으므로 련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홍린! 홍린 좋아요. 마음에 들어요. 잉어도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다.”
련이 ‘마음에 들어요.’라고 말할 때까지는 흐느적거리던 잉어가 얼른 발랄하고 잽싸게 헤엄쳤다.
“하하, 저 녀석도 마음에 드는가 보구나!”
련은 홍린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배시시 웃음을 그렸다.
‘그래도 이름에 괜히 청(靑)이나 창(蒼)자가 들어가지 않으니까 안심이 된다.’
둘 다 푸르다는 뜻을 가진 글자다.
비록 흑월은 붉다는 이름 한 글자 없었으면서도 봉황인지 주작인지 알 수 없는 신령한 것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괜히 잉어에게 이름까지 그런 걸 붙여서 괜한 걸 부추기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백련이 이름도 바꾸자고 할까? 백련 말고, 녹련이나 수련이나?’
그러나 그 생각은 금방 허물어졌다. 아마 화륜이 ‘애 이름을 그렇게 바꾸면 헷갈리고 서운해한다.’며 반발할 게 뻔했다.
“좋아, 좋아! 그럼 오늘은 홍린에게도 음률을 들려주자꾸나.”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온 단목현우가 얼른 련의 맞은편에 앉아서 비파를 손에 쥐었다.
련의 건강이 많이 호전되고, 폐활량이 좋아지면서부터는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피리 실력이 붙었다.
아직 소리가 여리고 가냘프긴 했지만, 요즘은 수업이 반이고 나머지 반은 단목현우와 함께 연주를 즐겼다.
“요즘 아이들이 아주 의욕이 좋아.”
비파의 현을 튕겨 음을 조정하며 단목현우가 말을 꺼냈다.
“처음엔 좀 당황하기도 했는데…….”
단목현우가 가르쳐 본 아이는 여태껏 단목련뿐이었다.
무공이 아니라 글자를 가르쳤던 것이긴 하지만, 한 번 보여 주면 전부 이해하고 소화해서 또 다른 경지의 답까지 보여 주는 아이를 가르치다가 처음으로 다른 아이들을 가르치게 된 것이다.
처음에 단목현우는 자신이 뭔가 대단히 잘못하는 것인 줄 알고 밤새 안절부절못했다.
한 번 말해서는 아이들이 이해를 하지 못했고 두 번도 안 되고 세 번은 말해야 하는데, 이게 원래 이런 건지 아니면 자신이 정말 엉망으로 가르쳐서 그런 건지.
단목현우의 걱정을 덜어 준 건 단목한소였다. 단목한소는 단목현우가 수업하는 모습을 살펴봐 주곤 나중에 박장대소를 했다.
— 아이고, 잘하고 계십니다!
— 정말인가요……? 그런데 애들은 왜 설명을 들어도 모를까요…….
‘련아는 그냥 알던데.’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음을 두 사람 모두 알았다.
— 련 아기씨는 좀 다르시지요. 도련님 어렸을 적을 생각해 보십시오. 큰형님 하시던 말이 단번에 이해가 되시더이까?
그때서야 단목현우는 냉정을 되찾았다. 형은 이따금 기꺼운 마음으로 아우를 가르쳐 주려고 했지만 사실 그 과정이 온화하지는 않았다.
단목현성은 대체 왜 단목현우가 이해하지 못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고 단목현우는 형이 왜 사람 말을 하지 않는지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해서 둘의 수업은 항상 파국이었다. 그렇게 한바탕 싸우고 나면 단목현성은 단목현우에게 맛이라고는 없어서 시고 떫은 빙당호로를 만들어 주곤 했다.
어렸을 때 단목현우는 그것도 형이 괴롭히는 거라고 생각해서 집어던지고 울음을 터뜨렸던 적도 있었다.
— 그렇게 생각하니 이해가 됩니다.
단목현우의 말에 단목한소가 그제야 껄껄 웃었다.
“아이들 가르치는 일이 많이 재미있어요?”
단목현우가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도 변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매일매일 쑥쑥 자라는 것 같기도 하고. 어찌나 기특한지.”
단목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오늘 새로 구해 온 악보를 펼쳤다.
“요즘 저잣거리에서 유행하는 곡이라고 하더구나. 아주 세련된 곡조라 찾는 사람이 많다 해서 한번 구해 보았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