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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89)화 (89/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89화

단목현우는 몇 번 듣기도 했고 연습도 했기에 어렵지 않게 비파를 튕겨 음률을 연주했다.

그리고 자신의 연주를 감상하며 흥얼거리던 련이 눈을 한번 반짝이더니 향린적을 입에 물고 그대로 피리로 불어 보였을 때, 그 보드라운 선율에 가슴 한구석에서부터 깊은 울림이 퍼져 나갈 때, 단목현우는 그저 부드러운 미소만 지으며 생각했다.

‘우리 련아만 다른 거였다!’

다른 아이들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가르침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그냥 련아만 다른 것이다.

그사이 련은 음을 불어넣는 자신의 숨에 조심스럽게 영기를 실어 보았다.

피리에 능숙해지면 도전해 보려고 벼르던 것이었다. 소리가 닿는 곳곳으로 자신의 영기가 스르르, 엷게 퍼져나갔다.

주변의 공기가 마치 맑고 깊은 산속의 그것처럼 청량해지기 시작했다. 공기를 정화만 할 때와는 다른 감각. 깨끗해지는 게 아니라 투명하고 차가운 것으로 가득 차는 기분.

조금 먼 곳에 떨어져 있는 연못의 잉어가 한번 꼬리 짓 하며 물방울을 튕겼다. 그 꼬리의 비늘 하나가 푸르스름하게 반짝였으나 누구도 잠깐 반짝인 잉어 꼬리에까지 시선을 주지 않았다.

‘뭔가 특별한 효과는 없는 걸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음공(音攻)의 고수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인생이 그렇게 쉽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한참 음률을 즐기다가 마무리 지을 때쯤 단목현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이들에 관해서 내가 생각을 좀 해 봤는데 말이다, 련아야.”

부드러운 천으로 피리를 닦던 단목현우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련은 고개를 갸웃했다.

“네?”

“우리가 내년 봄에 경항운련에 가지 않느냐?”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으니 봄이라고 해도 얼마 남지 않은 셈이다. 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아이들을 좀 데려가면 어떻겠느냐? 아무래도 어리다 보니 전부 다 데려가는 것은 무리겠고, 성취가 높은 아이들만이라도 말이야. 우리는 다른 세가들보다 직계의 숫자가 적으니 방계 아이 몇 명을 더 데려간다고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듯하구나.”

“와! 그거 좋은 생각이에요!”

련은 반색하며 찬성했다. 어릴 때의 다양한 경험만큼 중요한 게 또 있던가!

“그런데 성취가 높은 아이들은 어떻게 가르려고요?”

“시험 같은 걸 쳐서 일 등에서 삼 등까지 가를까 했는데.”

“음, 그것보다는 뭔가를 해내는 사람은 다 데려가겠다고 하면 어떨까요? 최근에 성취가 더딘 애가 있으면 괜히 의욕이 꺾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다가 다 해내면 어쩌지?”

“어려운 시험이었는데도 다 통과했으면, 어떻게든 힘내서 다 데려가야죠. 제가 방금 시험에 관한 게 떠올랐는데요.”

련은 그렇게 말하며 소곤거렸다. 단목현우가 그거 좋은 생각이라며 손뼉을 치면서 찬성했다.

* * *

공기부터 서리가 앉기 시작하고, 여럿이 모이면 입김이 일기 시작했지만 아이들의 수련은 쉬는 날이 없었다.

“경항운련에 대해 아는 사람?”

단목현우가 묻는 말에 연무장에 모인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모두 조용하게 있자 매신유가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경항대운하 근처 문파들 모이는 거요.”

“오! 아는구나. 최근에는 뜸했다가, 내년 봄에 남직례성에 있는 남궁세가에서 다시 모이기로 했단다.”

여기까지 이야기가 이어졌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의아한 표정이었다.

“여러 세가 사람들을 만나 볼 수 있는 좋은 자리라, 너희들 중에서도 열심히 하는 아이들을 데려가 볼까 한다. 관심이 좀 생기느냐?”

“우와아아!”

“와아아아아!”

“경항운련에…… 저…… 저희까지요……?”

몇몇 아이들이 신나서 외치는 사이에 단목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단목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한 달 뒤에 있을 시험을 통과하는 아이들만 갈 수 있다.”

“아…….”

아슬아슬한 성적으로 세가에 남은 아이들의 표정이 금방 어두워졌다.

그사이 단목현우가 빙긋 웃으며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 금을 그었다. 어른 대여섯 명이 누우면 이어질 법한 거리였다.

“여기 끝에서 끝까지, 발자국을 단 세 개만 남기고 도착한 사람만 이번 경항운련에 갈 수 있다.”

그와 동시에 모두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매신유가 손을 들었다.

“도구를 써도 됩니까?”

단목현우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물론. 단, 한 손에 쥘 수 있는 것까지다. 시험은 한 달 뒤에 치를 것이니, 그때까지 수련에 정진하도록!”

“네!”

“네!”

“네!”

아이들은 씩씩하게 대답했지만, 눈길은 단목현우가 금을 그어 둔 쪽을 향해 있었다.

* * *

“진짜 우리도 데려갈까?”

“그냥 하는 말이겠지. 불가능한 시험을 걸어 놨잖아.”

“그래도 갈 수 있으면 좋겠다. 남궁세가는 어떨까? 거기도 우리 같은 애들 있겠지?”

아이들 사이에서 기대와 불신이 어우러졌다.

그사이에 매신유는 연무장의 그늘에 걸터앉아, 인상을 찡그린 채 단목현우가 그어 둔 금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단목규가 슬쩍 다가와 물었다. 매신유는 한층 더 인상을 쓰곤 단목규를 쳐다보았다.

지난번에 그렇게 면박을 주듯 말했는데도, 단목규는 이렇게 종종 다가와 말을 걸고 엉뚱한 걸 물어보기도 했다. 가령 심법을 깨우쳤냐는 질문 같은 것 말이다.

“발자국 세 개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고 있었어.”

“세 걸음 만에 가라는 얘기 아니야?”

“너 같으면 그게 가능하겠냐?”

“허, 허공답보(虛空踏步) 같은 거 있잖아…….”

허공을 걸어 다니려면 우선 몸을 가볍게 만들 수 있는 경공(輕功)의 공부가 아주 빼어나야 하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몸을 가눌 수 있는 신법(身法) 공부도 받쳐 줘야 해서 그들에겐 아직 꿈같은 이야기였다.

“그게 지금 우리가 가능한 거냐고. 태상가주님이나 하실 수 있을 텐데.”

“안 되겠지?”

단목규가 해맑게 웃으며 대꾸하는 걸 보고 매신유가 외쳤다.

“서극림! 와서 얘 데려가!”

“아, 아니, 나 얘기 잘하고 있었잖아. 이상한 소리도 안 했는데!”

단목규가 억울해하는 사이에 서극림과 단목완이 다가왔다.

“무슨 일인데?”

“단목규가 허공답보로 건너가라고 하잖아.”

“신유야, 내가 그러라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하다 보니까 허공답보가 생각났다는 얘기였어. 정말이야.”

단목규가 쩔쩔매는 걸 보고 서극림이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매신유는 이미 먼 곳으로 눈을 돌린 뒤였다.

‘세 걸음이라고 하지 않고 발자국 세 개라고 한 이유가 있을 텐데.’

단목현우는 왜 세 걸음 안에 건너라고 하지 않고 발자국 세 개라고 했을까?

세 걸음이 아니어도, 그 이상이어도 상관없다는 뜻은 아닐까?

“세 걸음 그 이상 걸어도 된다고 해 봤자…….”

답이 안 보이기는 매한가지였다. 매신유의 중얼거림에 단목완이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때 단목규가 손뼉을 짝 하고 치며, 뭔가 깨달았다는 듯 외쳤다.

“아! 힘을 합쳐서 가라는 것 아닐까?”

“힘을 합쳐서?”

의외의 말이었기에 연무장에서 수군거리던 모두의 눈길이 단목규에게로 쏠렸다.

단목규가 으스대며 말을 이었다.

“가령 다섯 명이서 손발을 이어 차륜 같은 모양으로 굴러가면 사람 한 명당 발자국 서너 개쯤 되지 않을까? 그럼 중간엔 한 발로 서서…….”

“서극림! 데려가라니까!”

“내가 규 보모도 아닌데 대체 왜 나한테 그래.”

“네가 장원으로 들어왔잖아. 장원이 이런 거 책임지는 거 아니냐? 빨리 데려가.”

“하…….”

서극림이 어깨를 축 늘어뜨릴 때, 구석에 있던 다른 아이들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 * *

‘얘가 진짜…… 천재는 천재다.’

방계 아이들의 수련이 본격적인 궤에 오르면서, 련은 그동안 미루어졌던 화륜과의 검술 수련에 돌입했다.

단목비가 천자문을 다 떼면서 단목천기에게 검술을 배우는 동안에는 화륜도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내가 심안으로 익히고 조화로 행하는 것처럼 되는 건 아니지만, 훨씬 더 본능적으로 잡아내는 것 같은데.’

자신이 그대로 본떠 몸에 적용하는 거라면, 화륜은 검법의 묘리를 그 순간순간 깨쳐 나가는 것 같았다. 초식을 진행해 나가는 그 순간순간에, 바로.

마치 눈에 보이는 걸 일단은 따라 해 보고, 따라 하는 순간에 ‘아, 이렇구나!’라고 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렇게, 여기까지…… 이거 맞아요?”

열두 개의 초식을 다 밟아 간 화륜이 이마의 머리카락을 어깨로 훑어내며 련을 돌아보았다.

“어, 그렇게!”

우화륜의 배움 3

행운 수치 : 40 / 120 (3▲)

‘아니, 정말로? 이렇게?’

단숨에 행운 수치가 ‘3’씩이나 뛰었다는 사실에 련은 입을 딱 벌렸다. 마천교 소교주씩이나 될 인재에게 도움을 주어서 이만큼이나 오른 건가? 그게 아니면 행운 지수를 ‘3’이나 올릴 만큼 그가 성취를 이룬 것인가?

너 정말 천재인가 봐, 이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사람의 생에 어떻게 굴곡과 좌절이 없으랴? 그도 어느 땐가 성취가 더뎌질 날이 올 텐데, 괜히 어려서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다가 거기에 발목 잡히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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