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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93)화 (93/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93화

“제, 제가 련아를 붙잡고…… 괴롭게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숙부가 어린 조카를 붙잡고 펑펑 울었으니 조카가 얼마나 놀랐겠는가?

“아이가 뛰노는 걸 보고 기뻐서 우셨다면서요. 그게 어찌 괴롭게 한 일입니까. 그런 말씀 마세요.”

“내당주님…….”

단목현우가 말끝을 흐렸다. 그런 단목현우를 보며 위지청은 몇 번이나 해 왔던 얘기를 다시 꺼냈다.

“그간 련아가 아팠던 건 절대 약당주 탓이 아니에요.”

“아닙니다. 제가 그날 제대로 지키기만 했다면…….”

단목현우가 황급히 말을 이으려 했지만 위지청은 고개를 내저었다.

“련아가 그랬던 건 아마 제 탓일 거예요. 제가 계속 아팠지 않습니까, 련아를 낳기 전까지.”

“아니에요! 아닙니다! 형수님 잘못이라니요, 당치도 않으신…….”

“그럼 우리 둘 다 잘못은 아닌 걸로 할까요?”

그리고 그제야, 단목현우는 그동안 자신이 마음껏 자책할 배려를 받아 왔다는 걸 깨달았다.

눈앞의 이 사람은 자책을 하고 싶어도 할 틈조차 없었는데.

병약했던 사람이 아이를 낳고서 씻은 듯이 건강해졌는데, 도리어 아이가 아프다면 누구나 자신의 병마를 아이가 가져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번쯤은 했을 터였다.

한 번뿐이었을까.

하루, 이틀, 닷새, 열흘…… 그리고 7년간 내내 그랬지 않았을까.

그러나 위지청은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위로할 여유도 가지지 못했으니까.

“련아가 울었어요. 그동안 숙부한테 걱정만 끼쳐서 미안하다고요.”

“예? 어, 어찌…….”

단목현우가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고 하다가, 위지청의 만류에 겨우 다시 앉았다.

위지청은 빙긋이 웃었다.

“이제 약당주께서도 아무 걱정도 염려도 없이, 마음껏 하고 싶은 일을 하셨으면 합니다. 련아는 그만 걱정하시고요.”

아픈 조카를 놔두고 혼자서만 원하는 성취를 이루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그 아이가 잃은 시간을 자신 역시 마찬가지로 공평하게 잃어야만 한다는 그런 생각은 이제 그만해도 된다는 이야기였다.

단목현우가 목까지 벌게진 채 손을 흔들었다.

“저, 저는 원래도 하고 싶은 것만 했습니다. 폐관 수련도 하고 싶어서 한 거였지요.”

“네, 네. 감기가 낫거든 저하고 바둑도 둬 주시고요.”

“예에…… 석 점만 깔아 주시면.”

“알겠어요. 대신 얼른 나으셔야 합니다. 이제 남궁세가 갈 준비도 하셔야지요.”

단목현우가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단목세가는 새해를 맞이했다.

* * *

조손은 나란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겨울 햇빛을 받으며 눈을 감고 있었다.

청명하면서도 온화한 공기가 월영재를 부유했다. 햇빛에 비쳐 먼지 조각이 떠도는 것이 반짝반짝 빛났다.

“네 숙부가 드디어 심마를 떨쳐 냈더구나.”

양쪽 무릎 위에 손을 올려놓고 유성환결을 운용하며 명상을 하던 단목천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곁에 있던 련이 반짝 눈을 떴다.

“네! 감기도 다 나으셨대요. 드디어…….”

‘드디어’라는 말에 단목천기도 눈을 떴다.

“너도 네 숙부가 그런 걸 알고 있었느냐? 아니, 모를 리가 없지. 애당초 교두 노릇을 시킨 것도 그래서였지?”

련은 빙긋 웃기만 했다. 단목천기는 고개를 내저으며 유성환결의 운용을 끝마쳤다.

“그보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도 같이 경항운련 가시는 거죠?”

“왜? 늙은이가 끼어들까 봐 걱정되느냐?”

“에이! 꼭 같이 가요. 네?”

단목천기의 심술에 련이 조르듯 말하자, 그의 얼굴 위로 설핏 미소가 어렸다.

“흠. 네가 가자고 한 게다?”

“네, 네! 소손이 졸랐습니다.”

련은 그렇게 말하며 이번 경항운련이 열리는 남궁세가까지 가는 길을 되짚었다.

‘경항운련…… 이건 없었던 일이야.’

지난 생에는 자신도 제대로 쾌차하지 못했고, 단목천기도 낫질 못하여 경항운련도 다시 모일 틈이 없었다.

경항운련이 아닌 다른 모임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단목세가가 초청받는 일은 없었다.

운하 근처의 무림 세가들이 으레 하던 회동 한번 하는데 별일이야 있겠느냐마는, 그래도 행여나 무슨 일이 벌어졌을 때 단목천기가 있으면 얼마나 든든할 것인가?

그리고 그걸 떠나서 단목천기와 남궁세가의 대가주 남궁환은 오랜 벗이요, 함께 혈라곡을 상대한 전우이기도 했다. 지금껏 단목천기가 칩거하느라 만나지 못했지만.

지난 생에 남궁환이 단목천기를 다시 본 건 단목천기의 장례식에서였다.

련은 그 노인의 뜨거운 눈물을 기억했다. 그는 단목천기의 죽음을 받아들이며 마치 몸이 한 뼘은 줄어든 것처럼 보였다.

“가면 네 또래 아이들이 많을 것이다. 걸음마를 떼는 것보다 목검을 먼저 잡은 녀석들 말이다.”

“혹시라도 붙어서 제가 질까 봐 걱정되세요?”

“그 나이에 이기고 지는 것은 일상인 것을. 아니, 일평생 무인으로 살면서 한 번도 지지 않을 수야 있겠느냐?”

“할아버지도 진 적이 있어요?”

단목천기가 웃음을 터뜨렸다. 련의 질문이 천진난만하게 들린 탓이었다.

“당연하지. 많이 졌느니.”

“그럼 뭐가 걱정되세요?”

승리와 패배가 반복되는 것이 당연하다 하더라도 승리는 달콤하고 패배는 씁쓸한 법이다.

손녀에게 쓴 것은 아이가 먹는 탕약만이길 바라는 게 조부의 마음 아니겠는가. 하물며 그 탕약도 그만 마시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데.

벌모세수를 받고 깨어난 련은 많이 건강해져 수련도 무리 없이 따라붙을 정도가 되었지만 이따금 아무 까닭 없이 휘청거릴 때가 있었다.

그럴 때도 련은 영기의 양이 뒤죽박죽이라 잠깐 그랬던 것뿐이라며, 이젠 괜찮아졌다고 곧 환한 웃음을 비추곤 했다.

하지만 그런 날이면 단목천기는 의미 없는 줄 알면서도 탕약을 달여 먹였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러게 말이다. 네 말을 듣고 있으면 세상에 힘든 일이 하나도 없는 것 같구나.”

“할아버지가 함께 가면 안 질 거예요.”

“져도 괜찮느니라.”

단목천기는 자신이 말하고도 스스로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서 조금 놀랐다.

무가에서 이기고 지는 것이야 일상이라 하더라도 자식들이 안일한 생각을 하게 내버려 둔 적은 없었다.

승리 앞에서는 엄격했고 패배 앞에서는 혹독했다. 절강성의 패주란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다.

“제가 다른 애들 울리고 와도 괜찮나요?”

“그건 더욱 좋구나. 하지만 너무 심하게 하지는 말고.”

“네!”

련은 단목천기의 말을 듣고 웃었다.

자신의 목표는 무탈하게 만수무강하는 것이고, 그 목표의 여러 가지 작은 가지들 중에는 ‘혈라곡을 완전히 퇴치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그 혈라곡 퇴치는 련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한때 단목천기가 꺾어 놓았던 혈라곡이 다시 들불처럼 번지기까지 남은 시간은 약 십 년인 걸 생각했을 때.

‘앞으로 있을 경항운련마다 만나서 이쪽의 실력을 좀 더 끌어올리면?’

지금 열 살이라면 십 년 뒤는 스물이다. 지금의 아이들이 장래에는 세가의 주축이 된다는 얘기였다.

이 긴 운하에 위치한 세가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혈라곡을 제대로 막아 주기만 해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련의 표정을 본 단목천기가 이젠 웃는 것이 아니라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살살 하거라.”

“살살 한다니까요. 하지만 배움은 깊을수록 좋은 법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 * *

“내가 지켜보라고 했지 데려와서 키우라곤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소년의 말에 백의명은 쩍 하고 굳었다.

예의 그 뒷담에서 어렵게 화륜을 불러내 말을 해 보려고 하기도 전이었다.

어떻게 보자마자 그간의 사정을 다 안단 말인가?

“거기다 환벽루에서 다른 데로 옮겼어?”

“예? 예, 그 좀 떨어진 곳에 있는 교룡객잔으로…….”

‘어, 어떻게 안 거야?’

아무래도 주루에서 열몇 살 된 애를 데리고 있는 건 아니다 싶어서, 어렵게 얘길 해 거처를 옮긴 차였다.

주루에 비하면 평범한 객잔은 부수입이랄 게 없긴 했으나 단목준이 점소이 일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했다.

소년은 팔짱을 낀 채 그를 빤히 올려다보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대체 뭐 어쩌려고 그러는데? 아들로 삼기라도 하려고? 네 앞가림도 못하면서.”

“아들까진 아니고요……. 아니, 어르신. 그게요. 들어 보세요. 제가 갔을 때 그 집에서 애를 몽둥이로 잡으려고 하잖아요.”

“왜 그랬대?”

“여기 합격 못 했다고요.”

“왜 합격 못 했는지는 들었어?”

“아, 아니, 네, 알죠. 들었죠…….”

경쟁자에게 썩은 고기를 먹였다는 얘길 직접 듣긴 했다.

“그럼 너도 걔 손에 산공독 같은 거 먹고 가진 돈 다 털릴 수도 있다는 걸 알겠네.”

“……!”

산공독(散功毒)은 내공을 흩어지게 만드는 독이다. 무림인에게는 당연히 악몽과도 같다.

하물며 이제 겨우 내공을 모을 수 있게 된 백의명 입장에서는 그런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입맛이 뚝 떨어졌다.

갑자기 등골이 선득해지며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아, 아닐 거야……. 설마 그러려고.’

“걔도 절박해서…… 그런 거니까요…….”

“절박하면 다 남 찌르면서 자기만 살겠다고 그러나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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