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95화
“그래서 아버지가 넘어가셨어요?”
“그럼. 드디어 이겼다고, 이대로 항주로 못 가는 줄 알았다면서 기뻐하시곤…….”
“뭐라고 하셨어요? 하실 이야기가 뭐였대요?”
“같이 살자고 하셨지. 오손도손, 같이 살아가자고.”
위지청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딸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딸은 단목현성보다는 자신의 얼굴을 많이 닮았지만, 귓불의 형태나 웃을 때 휘어지는 눈썹은 그를 연상케 했다.
“그래서 어머니하고 결혼하게 되신 거예요?”
“그래. 그렇게 항주로 와서는 우리 련아도 낳고, 비아도 낳고…….”
위지청은 못다 한 얘기를 꺼내지 않은 채 가만히 웃기만 했다.
처음에 그녀는 단목현성의 청혼을 거절했다.
살날이 얼마 남지도 않은 자신이,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어서 화산파의 제자가 된 의붓오라비의 신세나 지고 있는 자신이 누구의 신부가 되겠는가.
하물며 상대가 명문 세가의 장남이라면야 더욱 안 될 일이었다.
— 얼마 안 남기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청년은 비틀린 표정으로 미소 지으며, 그러나 정중하게 말했다. 위지청도 어림짐작했던 사실이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만이 가지는 체념의 눈빛은 숨긴다고 감출 수 없는 것이라.
— 그러니 괜히 멀쩡한 사람을 집안에 들여다 과부 만들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렇다고 나 곧 죽으니 사주단자 그만 보내라고 동네방네 외칠 수도 없고.
— 그래서 곧 죽을 사람들끼리 오손도손 살아 보자고요?
— 괜찮은 계책이라고 여겼는데요. 그대의 오라비도 한시름 놓을 것 아닙니까.
그렇다.
병약한 누이가 오늘내일하고 있으니 화산파의 도사가 되었다 한들 그 번잡한 마음이 정리가 될 쏘냐.
그렇게 생각하자 단목현성의 계책에 서서히 마음이 갔다.
— 하지만 귀 세가의 후사는 어찌하시려고요. 저는 아마 아이를 가질 수 없을 터인데.
— 제게 누이도 있고 남동생도 있는데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산 사람들끼리 알아서 할 테지요.
위지청의 마음이 이끌린 것을 알아본 단목현성은 그제야 개운한 표정으로 환히 웃음 지었다.
— 휴, 오늘도 지는 줄 알고 마음 졸였습니다. 그대는 밥 먹고 바둑만 두었습니까?
— 비슷하긴 하지요.
그러나 누가 알았을까. 운명의 장난이 그녀만 이곳에 남겨 놓을 줄은.
위지청은 련의 뺨을 쓸어내리며 빙긋 미소 지었다.
“그때, 내가 져 주어서 다행이었다고 계속 생각했단다.”
* * *
경항운련으로 떠날 채비가 차근차근 이루어지는 사이, 위지청이 챙긴 단목련의 짐을 본 단목현요는 거의 쓰러질 것처럼 창백한 얼굴로 이마를 짚는 중이었다.
“내당주님! 지금 이게…… 이건……!”
좋게 말하면 수수하고 청렴한, 나쁘게는 말하고 싶지도 않은 하얗고 빳빳한 련의 옷들을 보며 단목현요는 탄식을 흘렸다.
“검소한…… 내당주님 뜻은 알겠지만 그래도 경항운련은 어린 별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인데 이렇게…… 허름…… 단정하게만 입고 가면 사람들이 단목세가가 가난해서 애들한테 좋은 옷도 못 입힌다고 하지 않겠어요?”
위지청이 곤란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단목현요는 자신 앞에 펼쳐진 희기만 한 옷을 내려다보다 얼굴을 쓸어내렸다.
“련아가 청련수로 돈도 엄청 벌었잖아요. 그걸로 좋은 옷부터…….”
“련아가 번 돈인데 제가 함부로 쓸 수 있나요.”
“이건 련아를 위한 거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련아는 그 돈으로 아이들을 키우는 데 쓰고 싶다고 해서요. 그리고 표국을 키우는 일에도 관심이 있다고 하니까…….”
그 이야기라면 단목현요도 들었다. 단목련은 세가를 키우는 일에 대해서 딱히 숨기지 않았으므로.
“아니, 거기에 련아 돈만 전부 쓸 수는 없지요! 당연히 저희도 보탤 거예요. 그런데도 이 희기만 한 옷을 입고 간다고요?”
“흰옷은 단목세가의 상징 같은 거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단목세가 사람들이 백의를 즐겨 입기는 했다. 하지만 그 백의가 이렇게 ‘더할 색이 없어서 희기만 한 옷’은 아니었다.
새하얀 비단에 은사로 수를 놓아 반짝반짝 빛나는 설원처럼 만든 것이 그들의 상징인 ‘흰옷’이지!
“당연히 안 괜찮아요! 그리고…….”
단목현요가 이마를 꾹 눌렀다.
그녀가 하남성에서 어떻게든 세가의 영향력을 뻗치려 애쓸 때도 곱지 않게 보는 눈들이 있었다.
죽은 오빠의 첫째와 둘째 아이가 번듯하게 살아 있는데 그 자리를 꿰차려 드는 천하의 악녀 보듯이 하는 사람들.
그런데 그 죽은 오빠의 첫째 딸은 허름하게 입히고, 자신의 딸만 호화롭게 입은 꼴을 보면 다들 뭐라 하겠느냔 말이다!
“지난번에 아이들끼리 외출할 때도, 금가장에 갈 때도 제가 옷을 잘 챙겨 입혀야 한다고 했었잖아요.”
비교되는 게 싫다고 두 아이 다 이렇게 허름한 옷을 입히는 건 죽어도 싫다.
단목성의 어린 시절은 겨우 십 년 남았는데, 그간에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건 다 해 주고 싶은 게 단목현요의 마음이었다.
단목현요는 미간을 꾹 누르곤 큰마음 먹고서 말했다.
“련아 옷은 제가 챙길게요.”
“그렇게까지…….”
“제 시댁이 부유하니까 괜찮아요. 내당주의 시댁은 지금 몸을 추스르는 상황이기도 하니, 그동안엔 제가 어떻게 해 보죠.”
보름 뒤에는 출발해야 하는데 그 전까지 련의 옷을 몇 벌이나 지을 수 있을까?
게다가 련의 옷만 문제인 게 아니다. 단목현우는 또 뭘 입혀야 한단 말인가?
“음, 그게…… 그런 게 정말 중요할까요?”
위지청이 조심스레 물었다. 단목현요는 그 말을 듣자마자 칼에 찔린 것처럼 펄쩍 뛰었다.
“우리가 경항운련이 아니라 소림사에 간다고 해도 옷차림은 중요해요! 새언니는 제가 속물이라서, 그래서 과시하려고 화려하게 입고 장신구를 사들인다고 생각하시겠죠. 하지만 과시하지 않으면 밟고 지나가는 게 사람들이라고요.”
간소한 옷을 입으면 옷조차 제대로 못 입을 형편으로 여겨 비웃고, 장신구로 가산을 재어 보고, 돈이 없으니 배움이 얕으리라 생각하고!
“허름한 옷을 입고도 기품을 갖춘다는 옛 성현들의 말씀도 좋죠. 그런데 그게 왜 옛 성현들 말씀이겠어요?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까 그런 거라고요!”
외치고 보니까 이렇게까지 발끈할 일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단목현요는 얼굴을 빨갛게 붉히고는 주춤했다.
‘하지만 나만 항상.’
집안에서도 겉모습을 신경 쓰는 건 단목현요 자신뿐이었다.
존경하던 오라비와 결혼한 가난뱅이 병약한 고아는 작은 수선화 하나만 귀에 꽂으면 그걸로 만족하며 보드라운 미소를 띠곤 했는데, 그 미소가 항상 단목현요를 아프게 찔렀었다.
자신이 몸에 두른 장신구 같은 것보다 내면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만 같아서.
자신의 허름하고 날카로운 내면은 그 어떤 비단으로도 감출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그게 자격지심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괜찮아지는 건 아니었다.
“아…… 아니에요, 그런 얘기가 아니었어요. 전 그런 걸 잘 알지 못했거든요.”
이번에야말로 단목현요는 정말 칼에 찔린 것처럼 숨을 참았다.
위지청의 형편이 어땠는지 가장 잘 아는 건 단목현성도 아닌 단목현요 자신일 것이다.
위지청의 혼례에 필요한 것들을 정리하고 챙겨 준 게 자신이었으니까.
단목세가로 시집올 때 위지청은 정말로 가진 게 없었다.
하나 있다는 그녀의 의붓오라비마저 화산에서 도사의 길을 걷게 되었으니 더욱 그랬다.
“그러니까 그런 게 정말 중요한 거라면, 역시 련아 옷은 제가 직접 마련하는 게 옳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지난번에 금가장에 갈 때도 외당주의 신세를 졌으니까.”
“아…….”
“옷을 잘 만드는 장인을 소개시켜 주실 수 있을까요?”
“……당연하죠. 그럼 내가 소개시켜 줄 생각도 없는데 뭐라고 했을까 봐요?”
괜히 울컥한 단목현요는 고개를 새침하게 돌린 채 끄덕였다.
* * *
습하고 어둑한 공간이었다.
고기가 썩는 듯한 냄새와 피비린내, 그리고 수십 개의 향을 한 번에 태우는 듯한 냄새가 한데 뒤섞여 나오는 공간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남자의 손에서 비쩍 말라붙은 덩어리 하나가 툭 떨어져 나갔다.
“…….”
남자의 입술은 붉고 생생했지만, 얼굴은 도무지 나이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불빛에 흔들리는 그림자에 비추어 보면 서른쯤 되었을까 싶은데 노회한 눈길을 보면 쉰은 된 듯도 했고, 또 드러난 손끝을 보면 일이라고는 해 본 적 없이 앳되고 고와 스무 살 도련님의 손처럼 보였다.
남자는 몸을 일으키고는 발치에 걸리적거리는 덩어리를 발로 차 치웠다. 그 나동그라지는 소리에 방 밖에 있던 인기척들이 한껏 숨을 죽이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방문을 열어젖히자 복도에 있던 사람들이 얼른 납작 몸을 엎드렸다. 복도에도 시체들 특유의 역한 냄새와 피비린내, 그리고 이 냄새를 억누르기 위해 태우는 향냄새가 물결쳤다.
“곡주님, 기침하셨습니까?”
“곡주님, 기침하셨습니까?”
엎드린 사람들은 비쩍 마른 채 광기로 눈알이 번들거리는 와중에도 남자를 향해 선망과 동경의 눈빛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