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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96)화 (96/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96화

남자는 그들의 시선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다 깊은 곳으로, 거침없이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 지하 깊은 곳.

그만이 알고 있는 복잡한 잠금장치를 풀고 안으로 들어가자 거기엔 오래된, 곳곳에 불에 탄 듯한 그을음이 남아 있는 장(欌)이 하나 덩그러니 서 있었다.

여태 거침없었던 남자가 그 장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다 이윽고 부술 듯 거칠게 장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 장의 선반 위에는 딱 두 가지가 놓여 있었다. 가늘고 긴 금속 갑 하나와, 글자가 빼곡하게 새겨진 원형 판 하나.

남자는 원형 판은 밀어 두고 금속 갑을 열었다. 손이 조금 떨렸다.

“이게 여기에 다시…….”

그 갑 안에는 향을 태우고 그대로 둔 듯한 가느다란 원기둥 형태의 재만 담겨 있었다. 남자가 손끝으로 그 재를 누르자 뿌연 입자가 되어 흩어졌다.

“하하하…….”

남자가 웃음소리를 흘렸다. 지하에 그의 웃음이 웅웅 울려 퍼졌다.

남자는 자신의 손끝에 묻은 재를 아주 오랫동안 들여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고개를 젖히고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돌아왔다, 돌아왔어! 내가 돌아왔느니라!”

큰 소리가 내실을 크게 울렸다. 금속 갑 안의 재가 부스스 흔들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남자는 금속 갑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쨍그랑!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재는 가루가 되어 부서지고 금속 갑은 바닥을 나뒹굴었다. 남자는 그 갑을 내리밟았다. 그와 동시에 바닥에 금이 가고 갑이 찌그러졌다.

“하하, 하, 하하하! 어리석은 천화륜! 천하가 다 네 것인 줄 알았겠지! 네가 나를 이긴 줄 알았겠지!”

남자의 광소에 공간이 뒤흔들렸다.

“으하하하! 네 덕에 내가 돌아왔구나! 네가 나를 없애려 불태웠겠으나 반혼향(反魂香)을 함께 살랐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남자의 목소리는 메아리치고 울려, 이 공간을 벗어났을 때는 그저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진동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 기세에 곡주의 거취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자들은 그 자리에 남자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엎드렸다.

몇몇 피 웅덩이에서 철벅철벅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참을 웃어젖혔던 남자는 금속 갑 옆에 놓여 있던 원반으로 눈을 돌렸다.

“지신침(指神針)이, 정말 본문(本門)의 보물이었군…….”

그 순간이었다. 원반 가운데의 바늘이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하더니 동쪽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원반을 내려다보던 남자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남자는 원반을 품에 챙겨 들고 지하 공간을 나섰다. 들어올 때와는 다르게 문을 잠그지도 않고 열어 둔 채였다.

밖으로 나와 햇볕 아래 자신의 팔뚝을 내려다보았다.

썩어 문드러졌던 부분이 조금 나아지긴 했으나 여전히 상처와 엉켜 불쾌한 냄새가 났다.

“향을 더 피워라! 그리고…….”

그의 주위에 우르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남자가 말했다.

“동쪽으로 사람을 보내야겠구나. 찾아와야 할 것이 있느니라. 아주 귀한 것이다.”

중원의 한가운데, 동정호의 물비린내가 멀리서부터 섞여들었다. 남자는 한참을 더 웃기만 했다.

* * *

“제가 내당주이니, 제가 남아서 세가를 돌보고 있겠습니다.”

위지청이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단목현요는 다소 불편한 표정이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가 안에서 누가 이번 경항무련에 참석할지, 그리고 누가 남아서 세가를 돌볼지를 정하는 자리였다.

한동안 거의 칩거하다시피 했던 단목천기가 아주 오랜만에 벗을 만나기 위해 남궁세가로 향하기로 했고, 아이들과 외당주가 가는 건 정해졌다.

“어린아이들도 많이 있으니까 외당주와 약당주가 동행해서 돌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 말에 움찔한 단목현우의 안색이 조금 창백해졌다.

“으음, 그, 그런 거면 내당주께서 가시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련아도 가니까요. 제가 남아서 비아를 돌보고 있겠습니다.”

단목비는 누이를 따라갈 거라고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으나, 나이가 어려서 세가에 남기로 했다.

위지청은 빙긋 웃었다.

“경항운련의 목적은 세가들이 힘을 더해 후진들의 교류를 돕고 무예를 증진하는 것 아닙니까? 약당주께서는 아주 어렸을 때나 가 보았으니 이번에는 참석하셔야 합니다.”

단목현성과 단목현우의 나이 차가 제법 크게 나다 보니, 나란히 두고 보면 단목현우는 위지청의 큰아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단목현요는 위지청의 말에 매가리 없이 수긍하는 남동생을 쏘아보며 내심 한숨을 삼켰다.

그러다 무어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위지청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석 부당주와 유성도 단목한소 대협께서도 남아 주실 테니 걱정할 것 없지 않습니까?”

이번에 단목현요의 남편 석반안이 외당의 부당주가 되어서 방계 제자 모집을 도왔는데, 의외로 즐겁게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자들 중에 셋은 간다지만 남은 일곱이 있으니 그 아이들도 챙겨야 하고요. 유성도께서는 물론 좋은 스승이 되어 주시겠으나…….”

유성도 단목한소가 아이를 세심히 보살피는 데 재주가 있는 사람은 아니다.

모두가 납득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남직례성으로 갈 구성원이 정해졌다.

출발하는 날 새벽. 세가 사람들은 모두 모여 항주의 천비궁(天妃宮)으로 향했다.

보통은 먼 뱃길을 떠나기 전에 평안을 기원하는 곳이지만, 어쨌거나 병석에서 털고 일어난 장손과 태상가주가 함께하는 여행길이라 떠나기에 앞서 들른 것이다.

“마차에 있을래?”

련은 다소 굳은 얼굴의 화륜을 마차에 앉혀 놓고 이리저리 살펴보며 말했다.

경항운련에 참석하기 위해 출발할 때부터 계속 표정이 굳었던 화륜이었다.

남궁세가로 가기 싫어서 그러나 싶어 원하면 세가에 남아 있으라 했더니 그것도 싫다 해서 데려오긴 했지만, 여전히 표정이 무거웠다.

“륜아야, 멀미하는 건 아니지?”

“아니……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럼 마차 안에서 쉬고 있어. 나만 갔다 오면 되니까…….”

“아니, 아니에요. 누이랑 같이 갈래요.”

“혼자 있으려니까 무서워?”

화륜이 어처구니없어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직 완연한 봄은 아닌지라 열린 문틈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자 화륜은 이번에 새로 만든 피풍의를 챙겨 들었다.

근사한 옷을 짓기 어려울 뻔했는데, 다행히 유모의 동생이 솜씨가 빼어나 그쪽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화륜이 먼저 마차에서 풀썩 뛰어내리곤 련에게 손을 내밀었다. 련은 혼자서도 내릴 수 있었지만, 화륜이 내미는 손을 거절하지 않고 잡았다.

“난 진짜 하나도 안 추우니까 륜아가 걸칠래? 겨울도 다 지나갔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초봄이래도 겨울인데.”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얼른 련에게 피풍의를 걸치라고 종용하는 입술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화륜이 그 피풍의 끝자락을 살짝 붙잡고 련의 곁에 바짝 붙어 섰다.

련은 아무리 어른스러운 체하는 화륜이라고 하더라도 낯선 곳에 처음 왔으니 무서울 만하다고 생각하곤 속으로 웃음을 꾹 삼켰다.

련은 천비궁의 입구 앞에서 약간 얼떨떨한 얼굴로 옆에 선 조부를 흘끗 올려다보았다.

‘그나저나 할아버지가 이런 미신을 믿으실 줄이야.’

고대의 여신 마조가 해운의 안녕을 빌어 준다는 사원은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북적북적했는데, 단목천기의 얼굴을 본 사람들은 모두 단숨에 숨을 죽였다.

그의 얼굴을 가로지르는 험악한 흉터에 입을 다문 것이 반, 그가 단목세가의 태상가주임을 알아본 것이 반이었다.

“왜 그런 표정을 하고 있느냐?”

“사실 이런 데 올 줄은 몰라서요.”

“왜? 이 할아비가 미신도 믿는가 싶어 신기하더냐?”

“……!”

선경은 자신이 아니라 단목천기에게도 있는 것 아닌가 싶었다.

“내 나이가 되어 보면 너도 할아비 심정을 알 것이다.”

단목천기가 소곤거리는 사이, 세가 사람들이 천비궁 안으로 들어서자 사원을 관리하는 도사와 도교자들이 헐레벌떡 달려 나와 맞이해 주었다.

“이건 우리 가문의 장손이 직접 만든 ‘청련수’이고, 요건 이번에 새로이 만든 ‘백약청’이네. 그리고 알곡 몇 섬과 밤을 밝힐 초를 좀 가져왔네.”

단목현요가 나서서 헌납할 물건들을 설명하자 도교자들은 기쁨이 역력한 얼굴로 늘어선 단지들을 바라보았다.

청련수라면 향시 장원 급제의 전설이 붙어 있는 물건으로, 최근 부르는 게 값이라는 유약이지 않은가!

그나마 이 사원을 관리하는 도사 한 사람만이 지나치게 들뜨지 않은 채 사람들을 환대했다.

“아이고, 무얼 이런 걸 다…… 우선은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마조의 조각상이 있는 사당 안쪽은 바깥에 비해 훨씬 조용했다.

도교자 중 한 사람이 그들에게 향을 건네자, 단목천기는 별다른 도구 없이 향 끝을 태워 가솔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헉!”

“삼매진화……!”

그들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이 숨 들이키며 경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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