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97화
‘정말 다 나으셨구나.’
삼매진화는 입신지경(入神之境)에 이르러야 쓸 수 있는, 맨손으로 불꽃을 일으키는 경지다.
내공이나 단전이 불안정한 상태로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다.
괜히 마음이 흐뭇하고 따사로워진 련이 향을 태우며 양손을 맞잡는 순간이었다.
* 오래된 사원에 처음으로 당도하였습니다. *
* 조언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
띠롱띠롱 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기에 놀라서 눈을 번쩍 떴더니 향의 희뿌연 연기가 마치 흰 종이인 양 넓게 펼쳐지더니 그 위로 글자가 우르르 떠오른 게 아닌가?
‘오래된 사원에 오면 조언을 들을 수 있다고?’
련의 머릿속으로 고사찰들의 목록이 주르륵 떠올랐다.
‘그럼 혹시 무당파나 화산파 본산에 오르면……?’
전부 한 번씩 가 보면 무슨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 기대로 들뜬 사이에, 다시 희미한 연기 사이로 글자가 스르르 떠올랐다.
* 천비궁에서 얻은 조언 : 피의 그림자는 피할 수 없습니다. 비가 내리는 날이 길합니다. *
뭔가 대단한 말이 더 나올 줄 알고서 손을 꼭 쥐고 기다리는데 여전히 조용했다.
눈을 감아도 떠도 보이는 글자만 한층 더 선명해질 뿐이었다.
‘이게…… 끝?’
글자가 황급히 흩어지더니 다시 떠올랐다.
* 천비궁에서 얻은 조언 : 항상 시간이 만들어 낸 빛을 지참하세요. *
‘정말 이게…… 끝?’
글자가 애절하게 파스스 흩어졌다.
천비궁에서 향을 사르고 항주를 벗어날 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운하에 닿기 전에 잠시 쉬기 위해 마차를 멈춰 세웠을 때였다.
앞선 마차에서 내린 단목천기와 단목현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뒤쪽 짐마차로 향하는 게 아닌가?
‘뭐지? 뒤에 뭐가 있나?’
의아한 마음에 련이 마차의 창밖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마차 안에 있던 화륜이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비아는 세가에 잘 놔두고 왔었죠?”
“비아?”
갑자기 남동생 얘기가 나오자 련은 미간을 모았다. 당장 주변 상태를 확인하고 싶은데, 기척을 인지하는 능력은 내공의 영역이라 그녀에게는 무리였다.
‘아! 바로 기감을 확대하는 건 무리지만 혹시 이렇게 하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잠깐의 고민 끝에 련은 주위로 영기를 천천히 퍼뜨려 보았다. 아주 옅게, 멀리까지.
사람의 들숨과 날숨에 스며들어 흩어지는 자신의 영기를 헤아리던 련은 그중에서도 유난히 익숙한 기색을 알아챘다.
“다…… 단목비!”
그리고 자신이 내공 없이 기척을 감지해 냈다는 걸 인지하기도 전에, 련은 저도 모르게 비명처럼 동생의 이름을 외치곤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때, 짐마차까지 저벅저벅 걸어간 단목천기가 실린 짐 동이 중에 하나를 홱 집어 들었다.
“우와, 우와아악!”
그 속에서 비명과 함께 창백한 얼굴의 어린아이, 단목비가 굴러 나왔다.
모두가 뜨악한 얼굴로 단목비와 단목천기를 번갈아 쳐다보는 가운데, 단목비가 얼른 자리를 바로잡으려고 했다가 쥐가 났는지 비틀거렸다.
“비아야!”
“세상에!”
어린애가 몇 시진이나 짐 동이 안에 웅크리고 있었으니 쥐가 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주위 사람들이 놀라서 달려와 자리를 펴고 단목비를 눕혔다.
팔다리를 주무르고 물을 떠먹이는 동안 련도 곁으로 다가와 연신 동생의 이마를 쓸어 넘겨 주었다.
“바보야! 몰래 따라오면 어떡해!”
“히잉…… 누이…….”
“어디 아픈 데는 없어?”
단목비가 고개를 도리질했다.
영기를 최대한 옅게 만들어 숨에 섞어 넣자 단목비의 얼굴에 천천히 생기가 돌아왔다.
주위 사람들의 표정도 겨우 풀렸을 무렵, 그 소동을 지켜보고 있던 단목천기가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견디나 두고 보려 했더니. 이대로 짐 동이에 실려 남직례성까지 가려 했더냐?”
기가 막힌 것도 같고 화가 난 것도 같고, 어찌 보면 기특해하는 것도 같은 묘한 목소리였다.
단목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련의 옷자락을 꼭 잡고 외쳤다.
“저, 저도 누이랑 같이 경항운련 가고 싶습니다!”
“어른 말씀을 수긍할 수 없었으면 그 자리에서 설득을 해야지, 명을 어기고 무턱대고 따라와?”
‘아이고.’
련은 일단 단목비의 어깨를 감쌌다. 단목비는 할아버지의 천둥처럼 울리는 목소리에도 어깨를 움츠리긴 했지만 기는 죽지 않았다.
“소…… 소손은 아직 아기니까요! 말로는 잘 못해요!”
순간 련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련이 곧잘 쓰곤 했던 핑계를 단목비가 냅다 외칠 줄이야.
‘이래서 어린애 앞에서는 찬물도 못 마신다고 하는 건가 봐…….’
련이 속으로 눈물을 줄줄 흘리는 동안 단목천기가 기가 막혀 코웃음을 쳤다.
“그래, 네가 아직 아기니 안 데리고 간다 한 것이다.”
“몸은 아기지만 마음은…… 마음은 다 컸어요!”
옆에서 큽, 커흡, 하는 소리들이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웃음 참는 것에 실패한 소리였다.
사람이 많은 자리에서 손자를 꾸짖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단목천기는 엄한 얼굴을 한 채 단목비를 데리고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뒤에 나왔다.
그 잠깐 사이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단목비는 그새 울었다 그친 듯 눈이 빨갰으나 애써 의젓하게 마차에서 내렸다.
물론 그것도 잠시, 련과 눈을 마주하자마자 코를 훌쩍거리면서 와락 안겼다.
“할아버지한테 많이 혼났어?”
련의 품에 얼굴을 파묻은 단목비가 고개만 끄덕끄덕하며 훌쩍거렸다가 애써 울음을 그쳤다.
“앞으론 꼭 허락부터 맡아야 한다고…….”
“그래! 남들 몰래 오면 어떡해. 어머니도 걱정하시겠다. 어머니도 울면서 잠 못 주무실지도 몰라.”
순간 단목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련은 단목비의 뺨을 비벼 주곤 챙겨 온 지필묵을 꺼냈다.
“어머니한테도 빨리 편지를 써서 보내자. 몰래 와서 잘못했다고, 조심히 잘 갔다 오겠다고.”
“네, 네!”
하지만 한나절 동안 구석진 곳에 웅크리고 있었던지라, 단목비의 손끝이 떨려 결국 련이 대신 글을 써 주었다.
그리고 그사이에 단목현요는 얼굴을 쓸어내리는 중이었다.
“저 옷을…… 저걸 어쩌라고…….”
세가에서부터 몰래 숨어 따라온 단목비의 단정하기만 한 무복은 이리저리 구겨져 엉망인 데다가 제대로 된 외투도 없어, 련이 자신의 옷으로 감싸 주었지만 품이 남아 끈으로 돌돌 묶어야 했다.
* * *
비계와 껍질과 살코기가 두툼하게 붙은 돼지고기를 한 번 튀긴 다음, 생강과 향신료, 진한 노두유, 간장과 맑은 술을 섞어 넣고 오래도록 푹 쪄낸다.
맑은 맛을 내는 데친 채소와 백주(白酒) 한 잔을 곁들이면 이 세상에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다.
오래 익혀 윤기가 자르르한데, 오래 익혀 진한 양념 사이로 껍질은 쫄깃쫄깃하고 비계는 입 안에서 녹아내리면서 살코기는 부드럽게 씹히는 것이 천하진미였다.
“숙수! 숙수!”
음식을 먹던 머리가 새하얀 노인, 백담이 주방을 향해 소리를 높이자 안에서 흰 두건을 머리에 쓴 사람이 달려 나왔다.
“왜, 왜 그러십니까요? 뭔가 문제라도…….”
“자네! 당장 북경으로 가지 않고 뭐 하나!”
“네?”
“내 평생 먹어 본 동파육 중에 이보다 더 훌륭한 것이 없거늘 어찌 이런 한적한 시골에 박혀 있는 게야!”
“네…… 네?”
“자네 당장 짐을 싸! 짐을 싸서 북경으로……!”
“아이고, 손님, 손님. 우리 항주 제일의 숙수를 여기서 쫓아내시면 저희는 뭐 먹고 삽니까.”
교룡객잔의 주인이 얼른 달려 나왔다.
소동은 소동이되 숙수의 재주를 찬탄하는 내용이었던지라 주변에서 동파육 주문이 늘었지만, 아쉽게도 준비해 둔 재료가 동이 나서 더는 주문받을 수 없었다.
다음번에 또 올 테니 준비를 해 달라는 이야기를 듣는 객잔 주인의 얼굴에 큼지막한 미소가 맺혔다.
두 노인은 고기와 술을 풍족하게 먹고는 값을 치렀다.
그러곤 숙수를 한 번 더 불러내 ‘북경에 관심이 없다면 천산은 어떠냐?’라고 몰아세우다가, 숙수가 상찬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다른 안줏거리를 더 내오겠다며 주방으로 도망치고 나서야 물러섰다.
“햐……. 아주 요리가 맛이 좋군. 여차하면 그냥 데려갈까?”
흑담이 입 안에 남은 육향을 음미하며 중얼거리자 백담이 힐난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 시기에 사람을 멋대로 데려갔다가 교주님께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그러나? 아직 소교주 후보는 찾지도 못했는데.”
“하…….”
동파육 먹을 때까지만 해도 행복했는데, 일 얘기로 돌아오자 두 노인의 안색이 나란히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것도 곧 심술궂게 일그러졌다. 바깥에서 사람들이 함성 지르는 소리가 들려온 탓이었다.
“아니, 대체 뭔데 바깥이 저리 시끄러워?”
“여기 세가에서 남궁세가로 놀러가나 본데.”
“여기 세가? 단목세가인가? 팔자도 좋구만. 누구는 어린애 하나 못 찾아 똥줄이 타 죽겠구먼…….”
흑담이 축 늘어져선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저 가문이 이 동네의 무슨 단목교(敎)라도 되는 거냐? 행차 한번에 뭘 저렇게 난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