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98화
“이번 겨울에 만두를 나눠 줬는데 그게 그렇게 맛이 기가 막혔다지 않았냐. 그러니 저러겠지.”
“우리가 방금 먹은 동파육만큼이나?”
“그러니까 저기서 저렇게들 환호성을 내비치고 있겠지. 포슬포슬하면서 쫄깃한 만두피에 갖은 채소와 고기를 다져 넣어서 소를 만들었는데, 갓 쪄서 나누어 줬더니 뜨끈한 김이 올라오며 입 안에서 육즙과 채즙이 황홀하게 어울렸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렇다면 저럴 만도 하지. 그 만두는 언제 또 나눠 준다고 하나?”
“내년 이맘때?”
“뭐어! 대체 왜!”
“단목세가의 어린아이들 생일에 만두를 길에 나눠 줬다고 하는군.”
“생일은 전부 다 지났고?”
“지났지.”
흑담이 몹시 낙담한 표정으로 어깨를 수그렸다.
백담이 창가 밖으로 길어지는 행렬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 얘기가 정말이었나 보군.”
“무슨 얘기?”
“항주로 올 때 들은, 무월검(無月劍)이 경지를 회복했다는 소문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간 칩거했던 그가 갑자기 경항운련 같은 것에 행차할 리가 있나.”
“무월검이 현경에 들었다 해도 알 바 아니다. 지금 중요한 건 우리 성좌보잔이 아무런!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는 거지!”
흑담이 좌절한 목소리로 내동댕이치듯 품 안의 보잔을 꺼냈다.
“쓰읍…….”
백담 역시 어느 정도 마음이 고꾸라진 차였다.
“그래도 중간중간에 아예 반응이 없진 않았는데…….”
“정말 명줄이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후보 탐색을 나가서는 후보가 죽을 때까지 찾아내지 못했다는 얘길 했다간 교주가 무슨 반응을 보일지 가늠되지 않았다.
백담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기보다는…….”
“그렇다기보다는?”
“이 꼬마가 제 기운을 갈무리할 줄 안다면?”
“무슨 헛소리냐, 백담! 그 꼬마는 이제 끽해야 일곱…… 여덟 살일 텐데.”
작년에 출발할 때는 대여섯 살일 거라고 추측했으니 그사이 해가 지나 이젠 일고여덟 살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흑담,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성좌보잔이 띄엄띄엄 반응을 보일 리가 없지 않으냐?”
“그렇다고 이제 갓 태어난 어린애가 제 기세를 갈무리했을 거라고?”
“일고여덟쯤 되었으면 갓 태어난 것은 아니지. 손발은 다 났을 때 아니냐. 호랑이 새끼도 어릴 때는 귀여워 보이게 저를 감추는 법이다.”
“그럼…… 그 말이 맞는다고 하면.”
흑담이 흔들리는 눈으로 백담을 쳐다보았다.
어린애가 자신의 흉성(凶星)을 갈무리하고 있다면?
그래서 성좌보잔에 제대로 잡히지 않는 거라면?
“그럼 이제 정말 어찌 찾을 테냐?”
“아.”
두 노인이 몹시 침울한 얼굴로 성좌보잔을 내려다보았지만, 잔은 답을 주지 않았다.
* * *
커다란 돛을 단 배가 운하의 물살을 가르며 남직례성으로 향했다.
그리고 평소보다 유난히 사람이 많이 올라탄 배 위에는 기묘한 긴장감이 감도는 중이었다.
단목천기는 팔짱을 끼고 앉아서 딸인 단목현요와 바둑을 두고, 단목현우는 그 옆에 앉아서 누이와 아버지의 바둑에 훈수를 두는 가운데.
“…….”
“…….”
“…….”
서로에 대해 전혀 모르는 승객들은 이 상황에 아무런 상관이 없는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은근히 눈을 굴려 상대를 살폈다.
그리고 그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맴도는 선상에서, 장난치고 노는 것처럼 부채를 가지고 살랑거리던 련은 부채 위에 떠오른 선경을 빠르게 읽어내리곤 저도 모르게 웃음 짓고 말았다.
‘이게 다 뭔가 했더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운하의 강물을 내려다보며 슬그머니 웃으려니 어디선가 조그만 금귤을 가져온 화륜이 말을 붙였다.
“누이, 멀미는 좀 괜찮아요?”
“괜찮아, 괜찮아. 그냥 내가 자연과 벗 삼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그래.”
련이 갑자기 안색이 창백해지거나 현기증이 일어난 듯이 어지러워해서, 배를 타기 직전까지 가족들은 연신 걱정에 여념이 없었다.
단목성은 잠까지 줄여 가면서 련의 상태를 살피려고 하다가 지금은 잠든 차였다.
“보통은 자연과 벗 삼는 걸 좋아한다고 하지 않아요? 그리고 벗 삼는 게 싫다고 치면, 지금은 배에 사람도 많은 게 완전히 시장통인데.”
“아직 부족해. 훨씬 많아야 해.”
련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세가를 떠나면서 청련수와 백약청 생산을 멈췄더니 그때부터 영기의 차는 속도와 쓰는 속도가 맞지 않아서 간만에 다시 시한부 경고가 뜨고 있는 차였다.
처음에는 운하의 강물을 정화하는 데 영기를 다 쓰면 되지 않을까 했으나, 배를 따라 헤엄치는 물고기들이 순식간에 늘어나고 그 움직임이 생기발랄해지는 걸 보고 그만두었다.
세가 한복판도 아니고 운하 한복판에서 영물이 나오는 꼴을 볼 수야 없지.
더군다나 뱃전에 달라붙어 있는, 아마도 선원이 다 떼지 못한 게 분명한 따개비 같은 것들이 련의 마음을 더욱 심란하게 했다.
‘저게 다 천년자패(千年紫貝)가 되면 어쩌냔 말이야.’
천년자패의 진주는 가지고 있기만 해도 마(魔)를 쫓고 독을 막아 주는 효과가 있는 영물이었다.
보통 천년쯤 묵어 영기가 서린 진주조개를 천년자패라고 부르긴 하지만, 멀쩡한 오골계가 주작이 되어 날아간 모습을 보고 나니 따개비라고 천년자패 되지 말란 법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금귤은 뭐야? 어디서 났어?”
“뱃멀미할 때 새콤한 걸 대고 있으면 좀 낫다던데요.”
사실 뱃멀미가 아니라서 금귤 향기를 맡는다고 낫는 건 아니었지만, 련은 조그만 금빛 열매를 코 가까이 대고 향기를 맡았다.
입에 저절로 침이 고일 것 같은, 너무 셔서 쓴맛이 절로 느껴지는 향이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었다.
“금귤은 어디서 났어?”
“누이가 멀미하는 것 같다니까 사람들이 줬어요.”
그리고 그 말에 련은 금귤을 그대로 떨어뜨릴 뻔했다.
“사람들? 누구?”
“몰라요. 그래도 이상한 건 안 들어가 있으니까 괜찮아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느냐, 혹시 정말 모르는 사람이 준 이상한 걸 먹은 건 아니냐, 낯선 사람하고는 말도 하지 말고 누이 옆에 딱 붙어 있어라, 하는 이야기가 목 끝까지 올라왔던 련이었으나 곧 그만두었다.
화륜의 어깨 너머로 금귤이 가득 든 소쿠리를 든, 체격 건장한 무림인이 환히 웃으며 그녀를 보고 있었다.
련이 눈인사를 하자 무림인이 마주 인사를 하다가 금귤을 그대로 다 쏟아서 소란이 일었다.
“그래, 이상한 건 안 들어가 있을 것 같긴 해……. 다 할아버지 보고 싶어서 저러는 사람들인데.”
“아, 그런 거였어요?”
삼삼오오 모여 있는 사람들, 혼자 외떨어진 사람들, 죽립을 쓰고 눈을 가린 이들…….
제각기 허리춤에 무기 하나씩은 차고 있으면서 묘하게 서로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이 수많은 무림인.
련은 주위가 왜인지 수상쩍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열심히 부채를 팔락였다. 그와 동시에 선경에 배에 탄 많은 이들의 이름이, 그들이 익힌 무공과 자질과 특성이 수없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달라지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그들의 고민이었다.
<어떻게 하면 무월검 단목천기와 인사 한마디라도 해 볼 수 있을까?>
오랫동안 칩거했던 단목천기가 길을 나섰단 소문이 돌자 그를 보려 사람들이 지금 이 배에 모두 집결한 것이었다.
“넌 그런 것도 모르고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걸 받아 왔어? 낯선 어른이 뭘 준다고 하거나, 아니면 도와 달라고 해도 따라가거나 네가 뭘 해 주려고 하면 안 돼. 알았지?”
“…….”
“우화륜, 대답해야 착한 아이지.”
“그거 다 누이가 하는 거잖아요.”
“뭐?”
“지나가는 어른들이나 달려드는 애들이나 다 도와주고 구해 주고 난리도 아니면서.”
“아니…… 내가 언제! 언제 그랬어!”
화륜이 불신 가득한 눈으로 련을 쳐다보았다.
“‘내가 언제 그랬어’ 이거 죄지은 사람이 현령 앞에서 제일 많이 하는 말 아니에요?”
“넌 현령 나리가 무섭니? 현령은 멀고 나는 가깝다.”
“아, 네…… 누이가 더 무서워요. 네, 네.”
“그리고 이 누이가 그러는 건 다 우리 가족들한테 그러는 거잖아. 가족들은 나를…….”
련은 말끝을 흐렸다. 자신의 벌모세수에 쓴 것들을 다른 데 썼더라면 어땠을까?
그 영약과 비방에 든 돈을 세가를 일으키는 데 썼더라면? 차라리 사치라도 했더라면, 즐겁기라도 하지 않았을까.
단목한소와 청윤진인이 내공을 유실하지 않고 더 높은 경지를 봤더라면…….
왜인지 련이 가라앉은 것을 기민하게 눈치챈 화륜이 서둘러 말을 뱉었다.
“누이는 방계 사람들한테도 다 가르쳐 주려고 하잖아요.”
련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화륜의 콧등을 손끝으로 살짝 때렸다.
“당연히 그 애들도 가족이잖아. 그리고 그 애들이 강해지면 득 보는 건 난데? ‘우리 세가 애들이 이렇게 강합니다!’라는 뜻이니까.”
세가 소속 무인의 강력함은 곧 그 세가의 강함이고 그는 세력으로 이어진다. 련이 그들의 수련에 힘쓰는 것도 당연했다.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라, 모르는 사람하고 얘기하면 안 된다는 거야. 어른이 도와 달란다고 따라가도 안 돼. 제대로 된 어른들은 아기한테 도와 달라고 안 해. 모르는 사람이 주는 것도 함부로 먹지 말고. 알았지?”
“…….”
“대답해야지, 우화륜.”
“네, 네.”
“내가 뭐라고 했지?”
“누이 말 잘 들으라고요.”
련은 이마를 짚었지만 더는 화륜을 책망하지 못했다. 저 장난스런 표정을 보아하니 알고도 일부러 저런 대답을 하는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