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99화
“그래. 계속 계속 누이 말 잘 듣는 거야. 다 커서도 잘 듣기다. 알았지? 약속.”
알았다며 대답하려던 화륜이 말을 멈추곤 머뭇거렸다.
“약속 안 지키면요?”
“약속 안 지키면?”
이게 벌써 말을 안 들으려고. 련은 그렇게 생각하면 웃음이 나왔지만 꾹 참았다.
“흥. 이제 너랑 말 안 해.”
련이 새침하게 팔짱을 끼고 말했다.
“저하곤 영원히 말도 안 한다고요?”
“영원히는 아니고. 백 밤 잘 동안 말 안 해.”
“무슨 백 밤이나 말을 안 해요? 한 열흘만 안 하면 안 돼요?”
“열흘 가지고 무슨 대업을 이루겠어?”
“이게 대업씩이나 되는 일이에요?”
“당연히 대업이지. 아기 우화륜을 키우는 건데.”
“애를 키우는 거면 백 밤이나 말을 안 하면 안 되잖아요.”
그 말도 맞다 싶어서 련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민하다가 돌연 화륜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너는 약속을 안 지킬 생각부터 하냐? 약속을 지키면 매일매일 얘기할 수 있잖아.”
그러나 이마를 감싸 쥔 화륜은 반박할 틈을 갖지 못했다.
마침내 선상 위의 누군가가, 어마어마한 용기를 끌어낸 것이었다.
“무, 무, 무, 무…… 무월검 어르신…….”
조금 전에 금귤 바구니를 엎었던 바로 그 무림인이었다. 잔뜩 긴장했는지 그의 온몸이 타는 듯이 붉었다.
그가 단목천기에게 말을 걸자 선상 위의 모두가 질시와 경탄, 부러움이 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둑돌을 손에 쥐고 있던 단목천기가 고개를 드는 그 순간 선상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하여 물살 스치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음? 나를 아는가?”
애당초 그가 접근하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기에 놀라지는 않았지만, 모르는 이가 굳이 말을 걸어온 것이 의아해 단목천기는 남자와 제 아들딸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혹시 너희가 아는 사람이냐는 눈길에 두 사람이 고개를 흔들었다.
남자는 침을 꿀꺽 삼키곤 입을 열었다.
“저, 저는 진…… 진천락이라고 합니다.”
거기까지 말한 남자는 얼굴이 거의 터질 것 같아 보였다. 남자는 자신의 손바닥을 흘끗 내려다보곤 빠르게 말했다. 반쯤 먹이 번졌지만 깨알 같은 글씨로 무슨 말을 할지 써 놓은 듯했다.
“혈라곡이 닥쳤을 때 어르, 어르신께서 저희를 구해 주신 적이, 구해 주셨는데, 그래서 저는 작은 도장에 들어가서 검을…… 검을 배웠습니다. 동생은 금귤 농사를 하는데 이번에 어르신께서 경항운련에 참석하시려고 이쪽에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혹시 감사 인사라도 드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금귤을 가지고……금귤이…… 이것이…….”
말을 쉼 없이 잇다 보니 마지막에 가서는 숨이 차서 얼굴이 더욱 붉게 물들었다.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말에 눈을 끔벅거리던 단목천기는 ‘금귤’이라는 말에 눈을 가늘게 뜨고는 과거를 찬찬히 떠올렸다.
“그래, 기억이 나는구나. 광동성에 들렀을 때였는데……. 어느 부부가 아이들을 위해 금귤 나무를 심었었지. 그때 대접받은 금귤이 시지 않고 아주 달았다.”
“……!”
진천락이 몸을 뻣뻣하게 굳히고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단목천기를 쳐다보았다.
“기억…… 기억하십니까?”
“막내까지 삼형제가 있지 않았더냐? 동생 둘이서 금귤 농사를 짓고 있는 건가?”
“아, 막내는…… 막내는 글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거기까지 얘기한 진천락은 손등으로 황급히 눈을 훔쳤다.
그러고는 자기 얘기를 풀어 놓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게 아니라는 걸 다시 상기하곤 물건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그보다 단목천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한데 광동성에서 예까지 온 것이더냐? 가까운 길이 아니었을 텐데.”
“아, 아닙니다! 저도 동생도…… 지금은 절강성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원래 금귤이 윗지방에서는 나질 않는데, 동생이 종을 개량하여서, 그게…… 절강성에서도…… 재배가 가능해졌고…….”
진천락은 스스로의 머리를 쥐어박고 싶었다.
단목천기가 금귤 나무 개량 따위에 관심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게…… 그래서…… 여기까지 온 것은…… 그때 구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부모님께서도 돌아가시는 날까지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 그리고 동생들하고 저희 마을 사람들 편지도 같이 가져왔는데!”
진천락이 황급히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보통 무림인들이 마주 서서 이렇게 움직였다가는 누가 먼저 검을 뽑고도 남았겠으나—저 품에서 뭐가 나올 줄 알고!— 단목천기 앞이라 그런지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잔뜩 긴장한 진천락은 자신의 행동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깜빡한 채, 오랫동안 만지작거려서 종이가 운 편지 뭉치와 금귤을 담은 상자를 불쑥 내밀었다.
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다, 다, 다시 만나 뵙게 되어…… 영광…… 영광이었습니다. 그때, 그때 구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 그간에는 그, 몸이 안 좋으시다고, 손님을 안 만나신다는 소문이 있어서 그래서 차마, 못 갔다가 이번에는…… 용기를…… 그러느라 이제야 찾아뵈었습니다. 용서를, 용서를…….”
그렇게 말하는 진천락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편지에 눈물 자국이 생겼다. 놀란 그가 눈물 자국을 섣불리 닦아 내려고 하다가 손바닥에 남아 있는 먹이 번져 더욱 당황했다.
단목천기는 잠시 멍한 듯이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잔잔하게 미소를 그리곤 그의 손에서 상자와 편지를 받아들었다.
“무림인이라는 자가 어찌 이리 눈물이 많나.”
“소, 소, 송구합니다, 그것이…… 진즉 찾아뵐 걸 그랬다고 계속 후회가 되었는데, 그래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뵈었지만…….”
“고맙다고 인사를 하러 와 주는 것이 어찌 민폐가 될 거라 생각했던 게야.”
“저, 저 같은 사람이 이 중원 무림에 수천 수만 명이 있을 것인데요……. 그 사람들이 모두 찾아뵙자고 하면, 곤란하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게 넘길 수가 없었다. 진천락은 왈칵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연신 손등으로 훔쳤다.
불현듯 ‘괜한 민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 감사 인사를 전하지 않는 게 도리에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계속 안절부절못하면서, 그러나 감히 단목세가의 높은 문턱을 넘을 용기를 내지 못하여 여기까지 온 것이다.
곁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단목현요와 단목현우의 눈매도 붉게 물들어 갔다.
진천락을 시작으로 선상에 오른 사람들이 모두 단목천기에게 다가와서 자신이 챙겨 온 작은 선물과 감사 인사를 전했다.
단목천기는 그들이 단지 자신에게 말을 붙여 볼 기회를 잡기 위해 양주로 가는 이 배에 올랐다는 사실을 알고 조금 당황하다가 웃음을 흘렸다.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한 줄은 끝없이 이어졌다.
* * *
“내가…… 생각보다 부지런했나 보다.”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냐고요.”
화륜이 련의 근처에 귤껍질을 까서 놓아주며 투덜거렸다. 련은 뱃멀미 핑계를 대며 선실 안에 누운 채였다.
조부에게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 배에 오른 사람들, 그 긴 줄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벅차게 하는 데가 있었다.
거기서 련과 단목천기는 동시에 정말 좋은 생각을 해냈다.
단목천기에게 감사 인사 한마디 할 기회를 얻으려고 무작정 배에 오른 사람들은 대부분 무림인이었다.
즉 천하제일인의 조언을 천금보다 귀하게 여기는 자들이란 말이다.
이것도 인연이니 조언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야 논검을 통해 서로 교류를 해 보면 어떻겠느냐는 단목천기의 말에 모두 열렬하게 찬성했다.
련은 그 옆에서 지필묵을 펼쳐 놓고, 단목천기가 그들에게 해 주는 조언에 심안을 통해 본 것들을 살짝 덧붙여 정리해서 한 장씩 넘겨주었다.
처음에는 좋았다.
그 전까지 련은 뱃멀미하는 척 금귤을 손에서 굴리며 일렁이는 운하의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새빨갛게 뜬 경고 문구를 읽으며.
*현재 영기 : 75 / 120 *
*경고! 영기를 60 이하로 유지하십시오.*
*남은 수명 : 3주 5시진 *
이렇게 많은 사람을 심안으로 살펴보며 영기를 쓰고, 배움을 얻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운 수치도 올려 줄 것이고, 이 사람들이 강해지면 장기적으로 봤을 때 혈라곡과의 싸움에서도 도움이 되지 않겠나!
‘이래서 교육을 백년대계라고 하는 거겠지. 나는 일단 십년대계부터.’
그렇게 생각하며 좋다고 히히거리며 열심히 했는데……. 도중에 너무 몰두하고 말았던 것이다.
너무 넘쳐서 곤란했던 영기가 정신을 차려 보니 딱 10을 남겨두고 있었다.
마지막 사람에게 줄 것을 마지막으로 정리하던 련의 손이 아주 잠깐 멈칫했을 때, 그 기색을 제일 먼저 알아챈 건 바로 련의 곁에 딱 붙어 있던 화륜과 단목천기였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서 정색하려는 화륜을 붙잡아 뱃멀미 핑계를 댔다.
어린애가 할아버지와 어른들 사이에서 한나절 내내 글을 써 주었으니 지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 단목현우가 요란을 떨어, 련은 화륜과 함께 선실로 내려온 차였다.
그동안 세가 식솔들이 모두 한 번씩 들러 한껏 걱정을 하고 갔다. 단목비도 울먹이며 옆에 딱 붙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