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01화
‘의원까지 눈치를 못 채는 건 뭐야?’
련의 가족들은 그저 련이 뱃멀미하는 걸 안타까워할 뿐이었고, 찾아온 의원은 연신 고개를 갸웃하기만 하다가 아기씨가 낯선 곳에 오셔서 놀란 게 아닐까 한다며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고 멀미에 효과가 좋다는 침만 놓아주고 갔다.
“이래서는…….”
단목련의 곁에 붙어 있으면 자신에 대한 주위의 인식이 둔해진다는 건 눈치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천하의 단목천기 눈을 피해 여태까지 조용히 있을 수 있겠는가.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신비와 그의 앎 너머에 있는 이치가 있다는 걸 겪은 화륜이기에, 그는 그 신묘한 현상의 원인을 파헤치기보다는 그 현상을 련의 곁에 남는 데 이용한 차였다.
‘그런데도 단목천기는 뭔가 아는 것 같았지만.’
그만은 련의 상태를 보고는 눈치를 챈 바가 있는 듯했다.
무언가를 대비하지 못함을 자책하고 쓰라려 하면서 탄식을 흘리다, 련이 곧 괜찮아질 거라고 축객령을 내리고 나서야 선실을 나섰다.
‘대체 뭐지? 왜 이러는 거지? 아니, 그보다 아프면 말한다고 했으면서 또 또 또!’
화륜은 얼굴을 쓸어내리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능숙하게 핏물을 삼키고, 창백해진 얼굴을 교묘하게 가리고서 다른 사람들이 걱정하지 않게 하려고 애쓰고…….
련이 왜 그러는지도 알겠다.
어차피 의원은 봐도 모르고,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나을 거라는 확신과 경험이 있으니 주위에 쓸데없이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래서야 ……려고 해도…….”
화륜은 단목련의 손을 이불 안으로 넣어 주며 한참을 툴툴거렸다.
아직 어리고 앳된 소년의 얼굴 위로 못마땅한 표정이 흐릿하게 서렸다가 사라졌다.
* * *
배가 양주에 도착하자 사람들은 눈물 바람으로 단목세가 사람들을 배웅해 주었다.
빠르게 움직이지 않았다면 나루터에 한참이나 붙잡혀 있을 뻔했다.
초봄의 남직례성 양주는 항주보다 더 추웠지만, 련은 배에 타고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생기 넘치고 건강한 얼굴이었다.
찬바람을 맞은 코끝과 뺨에만 붉은 기가 돌 뿐 하얀 얼굴 위로 웃음이 번져서 발랄해 보였다.
동생 단목비의 피풍의를 단단히 여며 주는 련의 모습은 초봄의 찬바람에도 추위를 전혀 느끼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륜아도 추워? 이리 와.”
“전 안 추워요.”
화륜은 그렇게 말하면서 련의 손길을 피하려는 듯 그녀의 뒤에 바짝 붙었다.
“그런데 이제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그러면서 작게 속삭이며 묻는 목소리는 아이답지 않게 굳어 있었다. 련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정말 괜찮지!”
“보석을 주렁주렁 달아서요?”
“응!”
련은 운하에서 내리자마자 인근의 장신구 가게를 휩쓸었다.
단목천기와 단목현요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단목비의 장신구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 것까지 한꺼번에 샀다.
데리고 온 단목완, 서극림, 그리고 매신유에게도 노리개를 하나씩 사 주었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방계 아이들과 가족들에게 줄 것도 구했다.
갑자기 찾아 들어간 조그만 가게에서 좋은 물건을 고르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었지만 련에게는 간단했다.
련이 집어 들었을 때 영기를 많이 담을 수 있으면 그게 바로 좋은 물건이니까!
구매한 보석마다 영기를 조금씩 나눠 담고, 양주같이 번화한 곳에서 거리 곳곳을 천천히 정화하며 돌아다녔더니 들쭉날쭉하던 영기가 천천히 안정되었다.
“옥이 그렇게 좋아요?”
화륜이 왜인지 조금 신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련도 진지하게 대답했다.
“보석은 다 좋아. 진짜 좋아.”
‘이게 내 영기를 책임져 주니까.’
“흠.”
“나중에 우리 륜아가 출세하면 이 누이 장신구도 사 주려나~?”
련이 짓궂게 웃으면서 말했다. 화륜은 그런 련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중에 누이가 받아 준다고 하면요.”
“당연히 받아 주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글쎄요. 그보다 누이, 부채에 뭐라고 적혀 있기라도 한 거예요?”
옆에서 화륜이 불쑥 화제를 전환했다. 아직 찬기가 남아 있는 날씨인데도 련이 굳이 부채를 손에 쥐고 있으니 묻는 말이었다.
“아니, 그냥…….”
“정말 괜찮은 거 맞긴 하죠? 열나서 덥다고 그러는 거 아니죠?”
“정말 그런 거 아니야. 넌 괜찮아? 이렇게 멀리 와 본 건 처음이잖아. 여기서 잃어버리면 찾기도 어렵겠다. 누이 손 꼭 잡고 가야 해.”
“……에휴.”
련이 일부러 손을 꼭 쥐며 장난스레 웃었지만 화륜은 평소처럼 손을 뿌리치고서 도망가지 않고, 좀 더 깊은 눈으로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륜아야? 내가 이래 봬도 단목세가 장손인데. 운하의 배를 타는 걸로 정말 골골댈 리가 없잖아!”
화륜은 할 말이 많은 듯이 입술을 달싹이다가 그만두곤, 평소처럼 도망쳐서는 단목비에게로 조르르 다가갔다.
곧 남궁세가의 거대한 장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래되어 역사가 깊고 커다란 장원은 잘못 보면 마치 궁궐처럼도 보였다.
그리고 그 호화로운 장원 앞에 도열하여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남궁세가의 대가주인 남궁환과 그의 아들 남궁경해, 그리고 그의 가솔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 사이의 길을 도무지 정체성을 확정 지을 수 없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에워싸듯 도열해 있었다.
이들을 처음 보았다면 단목세가 쪽에서도 많이 당황했을 것이지만, 낯선 사람들은 놀랍게도 모두 익숙한 표정이었다.
얼마 전 선상에서 만난 이들이 단목천기를 보던 바로 그 얼굴, 그 눈빛.
오래도록 품어 온 마음, 감사와 은혜, 쓰러진 줄 알았던 거목이 다시 일어선 장면을 마주한 감동, 회환과 후회와 죄책감이 한데 엉켜 환하게 빛나는 얼굴들.
수십 년 전 있었던 동정혈사를, 중원을 뒤덮었던 피의 그림자를 누가 걷어 냈는지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따그닥, 하고 단목천기가 탄 말이 한 걸음 내디딘 순간.
길을 에워싼 무리 중 한 사내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일동- 기립!”
모두 자세를 바로잡는 소리가 요란하게 웅웅 울려 퍼졌다. 발이 땅을 제대로 디디고 자세를 잡는 소리가 처음에는 번잡하고 산만했다가, 나중에는 완전히 조용해졌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해졌을 때, 모두가 양손을 모으고 포권했다.
척!
척척척!
포권지례를 하는 소리가 파도처럼 웅웅대며 울려 퍼졌고, 그 끝에 남궁세가 사람들까지 나란히 포권을 마친 순간 사내가 재차 외쳤다.
“멸! 라! (滅羅)!”
그와 동시에 모두가 손바닥과 주먹을 다시 맞부딪히고 양발을 척척 구르며 쩌렁쩌렁 외쳤다.
“행! 협! (行俠)!”
남궁세가의 대가주 남궁환까지 그 외침에 동참하여, 모두가 하나 되어 외치는 목소리에 하늘이 들썩이고 땅이 흔들렸다.
단목천기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들을 가만 바라보기만 했다.
잠시간 자신이 수십 년 전, 살아 있는 아들과 함께 시산혈해를 헤쳐 나가며 선봉에서 사람들을 구하던 그때로 되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모든 전쟁이 끝났던 마지막 순간으로…….
사람들의 외침이, 그 울림이 천천히 사그라들며 다시 침묵이 찾아왔을 때 단목천기는 자신의 손을 맞대어 포권하며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멸, 라…… 행협.”
약간 말라붙은 목에서 쉰 듯이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그와 동시에 사람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다시 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우와아아아아!”
“무월검! 무월검!”
멸라행협(滅羅行俠).
이건 아주 오래된 구호였다.
본디 백도맹에서는 ‘행협장의(行俠 仗義)’를 기치로 삼았다.
그러나 백도맹과 흑천련, 마천교가 혈라곡을 상대하기 위해 무림맹을 결성하면서부터는 혈라곡을 없애겠다는 ‘멸라(滅羅)’가 협을 행하거나(행협行俠) 의를 수호하는 것보다(장의仗義) 앞서 오게 되었다.
그리고 단목천기가 혈라곡을 꺾은 지금, 무림맹은 다시 ‘행협장의’로 돌아섰기에 ‘멸라행협’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모두가 그에 대해 잊었다고, 단목천기 자신도 잊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큰 뜻은 큰 족적을 남기고 위대한 희생은 결코 잊히지 않으며, 악의는 한때 찬란했을지언정 추모하는 이 없고 선의는 덧없는 듯 보여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진 듯 보여도, 바닥난 듯 느껴져도 그렇지 않다.
꺼진 듯 보였던 불씨가 바람을 만나 다시 타오르듯 작은 계기가 있으면 모두가 다시금 외치게 되는 것이다.
당신의 은혜를 기억하고 있다고.
한날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당신이 이룩한 것을, 수십 년 전 당신이 지켜낸 게 무엇인지 보여 주고 싶었노라고.
그들 사이를 지나쳐 남궁세가로 들어가며 련이 조용히 말했다.
“할아버지가…… 나오셔서, 예요.”
“무어라?”
사람들의 환호성 속에서 속삭이는 듯한 손녀의 작은 목소리를 놓칠 수도 있었는데 단목천기는 그러지 않았다.
눈가가 젖어든 단목천기가 련을 돌아보았다. 련이 조용히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
“할아버지가 잃었던 힘을 되찾으셔서, 그래서 이 사람들이 온 게 아니에요.”
“…….”
“할아버지가 세가 밖으로 나오셨기 때문에, 배에서도, 지금도, 이 사람들이 모인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