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04화
경항운련에 금가장도 참가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금종하가 이렇게 나타날 줄은 몰랐다.
그러나 금종하는 인사도 없이 연이어 다급하게 외치며 악소형과 련 사이에 끼어들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
“넌 뭐…… 뭐야!”
금종하는 악소형을 쏘아본 뒤 련을 돌아보며 외쳤다.
“련 소저! 경항운련에서도 무공을 수련하려는 건 정말 좋은 생각이다. 같이 공부할 사람이 필요하다면 내가 동참하겠어!”
“너 뭐야! 대체 뭔데 갑자기 끼어들어서 네가 하니 마니 하는 건데!”
악소형이 버럭 외치며 금종하를 밀치려다 금종하의 이글이글 빛나는 눈과 마주하곤 움찔했다.
“나는 련 소저의 벗인, 금가장의 금종하다! 당연히 련 소저에게 함께 공부할 이가 필요하다면 함께해야지.”
마치 악소형이 당연히 과제를 해내지 못할 것이고, 함께 공부하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는 투였다.
“아, 아니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가문 출신이……!”
“아기씨, 공부는 저희끼리 해도 괜찮은데…….”
거기다 단목완까지 조용히 말하며 악소형을 흘끗 쳐다보았다. ‘굳이 쟤도 끼워 주실 이유가 있으세요? 라는 표정으로.
“맞습니다. 아기씨께서 저희 봐주시기도 바쁜데 굳이 다른 사람까지 불러오실 필요는…….”
서극림도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렇다고 안 들릴 리 없다.
악소형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처음부터 공부 같은 건 같이할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 갑자기 ‘넌 빠져!’라는 얘기를 들으니 괜히 분한 마음이 들었다.
마치 저 저녁 공부를 함께하지 못하면 대단한 손해를 보는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까지!
“난 처음부터 너희랑 공부할 생각도 없거든?! 얼마나 잘났는지 너, 너희부터 저기까지 가 보든가!”
련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매신유를 쳐다보았다.
지금껏 침묵하던 매신유는 인상을 찡그리곤 련에게 한 걸음 다가와서는 물었다.
“진짜 저 사람도 끼워 주시려고요?”
련이 입을 떡 벌렸다.
“아니, 너까지 이럴 거야?”
“그렇지만 아까운데요…….”
그러면서 흘끗 악소형을 쳐다보는 눈길에 담긴 뜻이 명명백백했다.
‘굳이 싫다는 놈한테 떡을 주시려고요?’
“그래도 다 같은 백도 무림인이니까 함께 강해지면 좋지.”
그 얘길 들은 단목완의 눈동자가 글썽글썽 반짝거렸다.
세상에 살면서 이렇게 선하게 빛나는 걸 본 적 없다고 웅변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괜히 민망해진 련이 얼른 시선을 피했다.
‘난 그냥 혈라곡 상대할 때 좀 편해지고 행운 수치 좀 쌓으려고 그러는 건데. 얘들이 강해지지 않으면 나중에 큰일 난단 말이야.’
“아기씨의 뜻이라면…….”
매신유도 수긍하며 한발 물러서고는, 챙겨 온 목검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아셨을까?’
매신유는 자신의 목검 끝을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번 경항운련에 따라온 세 사람 중에서 자신만이 비겁한 술수로 자격을 따냈다고 생각했다.
단목련이나 단목현우는 그런 재치도 재능이고 노력이라며 인정해 주었지만, 매신유는 그렇게 편하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남궁세가로 출발하기 직전까지 매신유는 발자국을 하나도 남기지 않을 수 있게 될 때까지 연습에 또 연습을 거듭했다. 그렇지 않으면 당당하게 함께 갈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그 노력의 성과가 눈앞에 펼쳐졌다.
련과 단목현우의 말은 옳았다. 정확한 자세로 올바르게 펼치면, 내공 한 줌 없어도 기세를 실을 수 있다.
하물며 자신에게는 그동안 단목련이 만들어 먹여 준 흑곡단이 차곡차곡 쌓여 있지 않은가.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에 딱 맞물린 듯이 검이 움직였다.
복잡한 바위와 자갈이 깔린 길을 매끄럽게 내려가는 냇물처럼 유려한 움직임이었다. 그와 동시에 거센 검풍이 일어 발자국을 지웠다.
마침내 매신유가 저 멀리 떨어진 곳에 도착했을 때, 그 자리의 모두는 침묵하고 있었다. 련은 슥 고개를 돌려 악소형을 바라보았다.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악소형이 시선을 눈치채곤 몸을 떨었다.
“이, 이건 사기야!”
“뭐가?”
“여기서 저기까지 날아간 게 아니잖아!”
“날아가라고 한 적 없는데? 처음부터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갈 수 있냐고 했지.”
“아니, 저게…… 저건…….”
“우리 세가는 검이나 도를 주로 쓰지만, 너희는 창이 성명병기잖아. 더 쉬운 거 아니야?”
련의 말에 악소형이 어깨를 움찔했다.
“다…… 당연히 할 수 있어! 그 자리에서 딱 봐.”
악소형이 련을 흉흉하게 쏘아보곤 등에 메고 있던 창을 손에 쥐고서 신중한 표정으로 거리를 가늠했다. 다른 세가의 방계 녀석이 해냈다면 자신이 못해 낼 리가 없었다.
핵심은 꿰뚫어 보았다. 거리 조절, 힘 조절, 보법과 투로(鬪路)의 조화.
한 번에는 해내지 못해도 두세 번쯤 하면 가뿐하게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못 해내면, 그건 그냥 내가 처음 해 보는 거니까…….’
하지만 자신은 산동 악가의 후계자 아닌가.
다른 세가의 방계 녀석이 여러 번 연습해서 해낸 걸 한 번에 해내지 못해서야 안 될 말이었다.
악소형은 괜히 매신유를 한번 쏘아봤다가 심호흡하며 창을 고쳐 쥐었다.
“자, 잘 봐라.”
“응! 열심히 볼게.”
순간적으로 단목련의 눈동자 위로 별빛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처럼 보여서, 악소형은 움찔하며 그 눈을 피했다.
“흐읍!”
경항운련이 결정되고 나서부터 집안에서 들들 볶이다시피 했던 악소형이었다.
‘이쯤은 해낼 수 있다!’
한 발짝 한 발짝 신중하게 내디뎠지만 속도를 붙이지 않으면 무기에서 바람이 일지 않아 발자국을 지울 수가 없었다.
속도를 내되 보법과 가문의 창법이 뒤엉키지 않으면서 바닥을 기세 좋게 훑어야 하고, 앞으로 전진을 하고, 그리고…….
눈앞의 상대가 아닌 다른 부분을 신경 쓰며 창법을 펼친 것은 처음이었던지라 잠깐의 무아지경이 깨어진 순간 퍼뜩 정신이 흐트러졌다.
‘이, 이다음에 뭐였지?’
그리고 순간 발이 꼬였다. 넘어질 뻔했던 걸 휘청하며 몇 걸음 잘못 디딘 사이에 발자국이 서너 개 남고 말았다.
악소형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멍한 얼굴로 자신이 우다다 남긴 발자국을 쳐다보다가, 점점 더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이, 이, 이……!”
마음 같아선 쥐고 있는 무기를 내팽개치고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이 많은 눈 앞에서는 그럴 수도 없었다.
악소형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때였다.
“와! 너 대단하다. 그래도 처음 해 보는 건데 절반 넘게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갔네!”
“뭐? 그…… 그야, 그쯤이야, 당연, 당연하지.”
악소형은 얼떨떨한 얼굴로 련을 쳐다보았다. 련은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 부분에서 창을 이렇게? 휘두른 건 여러 명을 상대하는 걸 상정한 움직임이었어?”
“마…… 맞아. 우, 우린 역사와 전통이 있는 세가라 전쟁…… 전쟁을 대비한 동작이 많으니까!”
“그렇구나! 그럼 이쪽에서 이쪽으로 가는 건 멀리 있는 상대를 겨눈 동작이야?”
“어? 어어. 원래는 던지게 되어 있는데…… 그건 허공섭물을 익힌 뒤에 활용 가능해서…….”
련이 묻는 말에 대답하던 악소형은 중간부터 흥이 올라서 세가의 창법이 추구하는 바, 그것이 가진 신묘한 이치, 창법을 창안한 조상님들의 높은 이상까지 신이 나서 떠들어 댔다.
정신을 퍼뜩 차린 건 뒤에서 팽주란이 그를 잡아당겼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자신이 너무 떠들었다는 걸 알아챈 악소형이 스르르 입을 다물고는 눈치를 살폈다.
솔직히 이대로 어물쩍 사과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들었지만, 마치 ‘널 믿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 같은 단목련의 눈과 마주하자 왠지 창피해졌다.
“그…… 뭐야. 그거…… 미안… 미안합니다…….”
“…….”
“…….”
“방계 어쩌고 해서 미안. 그게 우리 세가 방계 애들은, 아니, 아니…… 미안해…….”
뭐라고 변명을 하려다가 그런 건 멋지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 데다가, ‘우리 방계 애들은 못해서 그렇다.’라고 말을 하자니 저도 모르게 자존심이 좀 상한 탓에 악소형은 얼른 말을 삼켰다.
잠깐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단목완과 매신유의 눈길을 받은 서극림이 한 발 앞으로 나와 짧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악소형이 눈동자를 굴려 련의 눈치를 살폈다. 이걸로 된 거냐고 허락을 구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련은 방긋 웃으며 악소형을 바라보았다.
“다음엔 잘 모르면서 그런 얘기 하면 안 돼!”
“아, 알았어. 안 그럴게…….”
“저녁에 공부는 같이할 거야?”
“하, 하라며.”
“안 하고 싶으면 안 해도 돼. 그냥 해 본 얘기였어.”
하지 말까?
악소형이 잠깐 갈등한 순간이었다.
“아기씨…….”
매신유가 여전히 인상을 쓴 듯한 표정으로 련을 부르는 걸 보고 악소형은 맘을 굳혔다.
그 공부가 뭐 얼마나 대단한 거길래 자기네들끼리 하려고 자꾸 저런단 말인가?
“아니, 할게! 우리도 할게.”
그런데 그보다 앞서서 먼저, 팽주란이 불쑥 말했다. 악소형은 놀라서 팽주란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