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07화
“아주 오랜만에 보오, 남궁 가주. 별일은 없었소이까?”
“모두 어르신과 모용세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말씀 편히 하시지요, 어르신.”
“일가의 가주에게 어찌 그러겠소?”
노부인, 모용취려의 말에 남궁경해가 대꾸할 새도 없이 그 옆에 서 있던 남궁환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쪽 아들딸보다 젊은 놈을 놀리면 좋소?”
“하하하, 이제 곧 염라께서 손짓할 나이인데 네가 아직도 혈기가 넘치는구나.”
“아직 천년은 멀었소!”
남궁환이 노부인과 마주 서서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에, 이미 도착했던 경항운련의 아이들은 모용세가 일행을 구경하고 있었다.
‘북쪽에 있는 세가라고 하더니 확실히 분위기가 다르네.’
백룡신검 모용취려의 눈동자는 세월 탓에 탁한 빛이었으나 묘한 푸른 기가 엿보였다.
모용취려
특성 : 水魚之交(수어지교) / 쾌속 / 표리일체 / 유연한 /
자질과 오성 : 상-하(上-下)
건공무적공(乾坤無敵功) : 12성
건곤백절검해(乾坤百絶劍解) : 12성
유성지(流星指) : 11성
일엽락(一葉落) : 11성
두전성이(斗轉星移) : 9성
고민 : 오랜만이라 어색한데 말문을 어찌 연담?
그리고 그 푸른빛은 모용취려가 아니라 다른 아이에게서 더 선명히 보였다. 모용취려의 바로 뒤에 선 소년이었다.
모용설호
특성 : 죽순 / 낯을 가리는 / 고요한 / 신중한 / 규행구보(規行矩步)
자질과 오성 : 상-중(上-中)
건공무적공(乾坤無敵功) : 4성
건곤백절검해(乾坤百絶劍解) : 5성
일엽락(一葉落) : 3성
고민 : 저녁 수련은 어디서 할 수 있지? 단목세가에서 왔다는 애들을 만날 수 있을까?
새하얀 얼굴에 무척 신비롭게 보이는 푸른 눈이 몹시 인상적인 소년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데 그 애만 유난히 눈동자가 맑고 푸르렀다.
그걸 다른 아이들도 알아챘는지 ‘눈이 파래.’ ‘벽안귀(碧眼鬼)같은 거야?’ ‘모용세가 사람인데 무슨 헛소리야!’ 라며 속삭였다.
수군대는 소리가 들릴 텐데도 모용설호는 꼿꼿하게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무월검은 어디 있는가? 그도 왔다지 않았나?”
‘할아버지?’
련은 고개를 갸웃했다. 모용세가와 단목세가가 연이 있는 줄은 몰랐다.
‘혈라곡 상대할 때 어지간한 세가들과 문파들도 다 힘을 모았으니까, 그때 본 건가? 모용설호, 저 애도 단목세가 애들을 콕 집어서 궁금해하고.’
그때 북해빙궁까지 한 손을 보탰다고 하니까, 그렇게 따지면 이해할 수 있다. 련이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이었다.
모용취려의 시선이 스르르 돌아가더니, 나란히 서 있던 단목련과 단목성에게 바로 꽂혔다. 그중에서도 단목련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련은 갑자기 눈을 마주해 조금 놀랐지만 얼른 절을 해 보였다.
“안녕하세요, 백룡신…… 우왓!”
그러나 고개를 제대로 숙일 새도 없이 성큼 눈앞에 나타난 모용취려가 련을 번쩍 들어 올렸다.
련이 화들짝 놀라서 눈을 크게 뜨자 모용취려가 련을 들어 올린 채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흠, 보니 알겠다. 네가 련이로구나.”
이번에 련은 정말로 놀랐다. 어떻게 보자마자?
‘설마 이분도 선경 같은 게 보이는 건가?’
모용취려가 빙긋 웃으며 다시 련을 내려주었다.
“네 눈이 설언의 눈과 똑 닮았으니 알았지. 마치 별이 뜬 듯한…….”
거기까지 말을 잇던 모용취려는 련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왜인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단목천기가 서 있었다.
련은 모용취려가 말한 ‘설언’이 누구인지 알았다.
자신의 조모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련은 한 번도 보지 못한.
* * *
어른들끼리 자리를 비운 사이에, 아이들은 조금 떨어져서 모용세가의 아이들을 흘끗거렸다.
그때 모용설호가 뚜벅뚜벅 걸어와 련의 앞에 섰다. 푸른 기가 도는 눈동자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할머님의 무례에 대해 사과할게.”
“아냐, 괜찮아.”
련은 갑자기 모용설호가 사과부터 하는 걸 보고 놀랐다가, 차분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 뒤로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음, 나는 단목련이야. 얘는 내 사촌인 단목성. 그리고 이쪽은 서극림, 단목완, 매신유. 다 우리 친척들이야.”
“안녕, 모용설호라고 해.”
다소 딱딱한 인사였다. 그가 고개를 까딱하자 다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때 잠시 그 풍경을 보고만 있던 남궁서건이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난 남궁서건이야. 여기까지 오는 길이 힘들진 않았어?”
모용설호는 남궁서건을 한번 보곤 짧게 고개를 흔들었다. 무례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데 남궁서건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러면 세가 안을 안내해 줄까?”
“괜찮아.”
“어……?”
단칼에 거절이 나오자 이번에는 남궁서건도 좀 놀라서 움찔했다.
하지만 모용설호는 더는 설명하지 않고 침묵하기만 했다. 조금 전과는 비할 바 없이 더 어색한 침묵이 좌중에 맴돌았다.
차마 이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련이 어색하게 뺨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어, 저기…… 너도 저녁에 따로 수련할 계획 있어?”
“어?”
“우리…… 그러니까 관심 있는 애들끼리 저녁에 따로 모여서 공부하기로 했거든. 너도 할래?”
자신이 고민하던 부분이었기 때문인지 모용설호는 남궁서건의 안내 제안을 거절할 때보다 좀 더 생기가 도는 얼굴이었다.
“공부는 어떻게 할 계획이야?”
갑자기 교육 과정을 추궁당했지만 련은 당당하게 얘기했다.
“서로 각자 할 수 있는 걸 선보이고, 어려운 부분에 대해서는 의견을 주고받는 거야. 이제 백룡신검께서도 오셨으니까 강연을 시작할 텐데 그때는 다 같이 복습도 할까 하고.”
“여럿이서 하는 게 실질적인 도움이 돼?”
전혀 주위 분위기를 살피지 않는 질문에 련은 잠깐 침묵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그럼 나도 같이해도 될까.”
모용설호는 마치 원치 않는 것처럼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푸르스름한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대로 알았다고 대답하려고 했던 련은 대신 다른 걸 물었다.
“그런데 남궁세가 구경하는 건 관심 없어? 여기 신기한 거 많던데.”
“그건 할머님 모시고 접객당 들른 다음에 해야 하는 거니까.”
“할머님…… 백룡신검께서는 아무래도 다시 나오시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을까? 그동안 구경하고 있어도 될 것 같은데.”
“하지만 그건 손자 된 도리가 아니야.”
모용설호의 말을 듣고서 그가 장원 구경을 거절한 이유를 안 남궁서건이 표정을 조금 풀고 물었다.
“그럼 할머님 기다리는 동안은 뭐 하려고?”
“머릿속으로 배운 것 복습.”
“……!”
그 얘길 들은 련의 마음이 갑자기 따스하고 든든해졌다.
‘상-중’의 자질은 련이 보았던 엽운 도사만큼이나 대단한 것이다. 그런 그가 이 나이부터 이렇게 열심히 수련을 거듭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찼다.
‘이대로 성장해서…… 북부 무림의 한 축이 되어 혈라곡을 조져 주는 거지.’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련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얼른 물었다.
“그거 정말 멋지다. 복습하는 건 뭐야? 검술?”
련의 질문에 왜인지 모용설호는 조금 얼떨떨한 것 같기도 했고 놀란 듯도 했다. 그는 묘한 얼굴로 련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검술은…… 항상 단련하고 있고, 요즘은 할머님이 두전…… 크흠, 가문 절기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는데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해서 복습하고 있어.”
‘가문 절기?’
련은 눈을 깜박였다. ‘두전……’으로 시작하는 모용세가의 가문 절기.
‘설마 두전…… 성이(斗轉星移)?’
언뜻 들어본 적이 있었다. 말로는 무공이든 독이든 뭐든 반사해 낸다는, 모용세가의 절기 중에서도 절기였다.
‘그걸 벌써 가르친다고?’
하지만 자질을 생각해 봤을 때 ‘벌써’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암, 뭐든 가르쳐 줄 법해. 더군다나 이렇게 열심히 하잖아. 내가 도와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렇게 자질이 뛰어난 아이를 도와주면 올라갈 행운 수치와 장차 이 애가 멋진 무림인으로 자라나 혈라곡을 상대해 줄 미래까지 생각하면 가슴이 벅찰 지경이었다.
“가문 절기뿐만 아니라 아직 내가 배워야 할 게 많아서…… 기초도 많이 부족하고.”
마지막은 약간 똑똑한 아이 특유의 기만이라는 게 느껴졌지만 이 정도라면 도리어 귀여울 지경이었다.
당장 같이 공부하자고 끌고 가고 싶은데, 련은 그 전에 자신에게 못 박힌 시선을 느끼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왜인지 몹시 서운해하는 것처럼 묘한 얼굴의 남궁서건이 련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서건 공자도…… 같이 저녁에 공부할래? 서진이랑 함께.”
“……서진이도?”
“응, 불편해?”
련이 눈을 가만히 뜨고 남궁서건을 바라보았다.
“동생인데, 그럴 리가 있겠어? 다 같이 하면 좋지. 안 불러 줬으면 서운할 뻔했다.”
“이미 서운했던 거 아니야?”
련이 농담인 척 물었는데 서건이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그랬을지도. 설호에게만 권했잖아.”
“나는 서건 공자가 관심이 없는 줄 알고…….”
모용설호는 남궁서건과 련 사이에 끼인 셈이 됐지만, 무뚝뚝한 표정 그대로 변함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