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08화
곧 하인이 달려와 모용취려가 먼저 들어가 있으라 했다며 말을 전했다. 모용설호가 기다리고 있을 줄 안 것 같았다.
‘이젠 세가 안을 구경할 수 있겠네?’라는 남궁서건의 말에 모용설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련은 왜인지 복잡한 심경이 되어 남궁서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참새에게 황새와 같이 공부를 하자고 한 것이 잘한 일 같지 않았다.
* * *
“먼 길 오시느라 노고 많았소.”
아주 오래전에는 천하제일 세가로 불린 적도 있으나, 이제는 중원에서 한발 물러선 모용세가였다.
그러나 혈라곡의 재앙이 온 중원을 뒤덮을 때 모용세가 역시 참전하여 그 피비린내를 걷어 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때 백룡신검 모용취려가 남긴 족적 또한 대단하였기에 그런 그녀를 환대하는 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돌아와서야, 모용취려는 단목천기와 마주할 수 있었다.
“편히 왔으니 노고랄 것도 없소.”
모용취려는 그렇게 말하며 맑게 우려낸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면서 문 바깥쪽을 흘끗 쳐다보았다.
이 문 너머, 담벼락 근처에 서 있을 남매를 떠올린 것이다. 단목현요와 단목현우.
“그간 현요가 참 고생이 많았는데…….”
“…….”
“운하가 있다 한들 저 북해까지 닿지는 않지 않소. 가는 길은 멀고 고되지. 하물며 매번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으면서도 꼬박꼬박 찾아오는 것이 보통 정성으로 될 일이 아니거늘.”
모용취려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내리감고 차향을 음미했다. 그녀의 주름진 얼굴 위로 따스한 김이 스쳤다.
“듣기로는 현우는 심마가 들어 폐관 수련만 했다던데, 오늘 보니 전혀 다르더이다. 생기가 넘치고 씩씩한 것이 꼭 그 애 어릴 때 같았소.”
“……단목세가에 복이 돌아오고 있는 게지.”
그 말에 모용취려는 눈을 떴다.
“그런 듯하오. 그 복이 설언이라고 비껴갈까? 그 아이 역시 단목세가의 사람이기도 한 것을.”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서로를 아이라 하오?”
“벗이란 그렇지 않겠소? 서로가 영원히 처음 만나던 날의 아이일 적 같지.”
저 먼 북쪽에 모용세가가 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북쪽, 새외(塞外)라고까지 불리는 먼 곳에 북해빙궁(北海氷宮)이 있었다.
모용취려는 어린 빙설언을 처음 봤던 날을 떠올렸다.
중원무림이 궁금하다는 이유만으로 빙궁을 뛰쳐나온, 패기만만했던 소녀.
혼자서 그 먼 길을 말 한 마리와 함께 내려왔던 소녀는 오랜 여행으로 뺨엔 땟국물이 말라붙었고 소맷자락은 까맣게 물들었는데, 눈동자만은 호수처럼 깊고 샘물처럼 맑았다.
— 네가 모용세가의 소궁주니?
— 뭐? 우린 궁주라고 하지 않아. 가주라고 하지.
— 그래? 그럼 나를 모시도록 해.
— 뭐라고?
— 일개 집안이나 다스린다며? 난 장차 빙궁을 다스릴 몸이니까!
그 뒤로는 제법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서로에게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칼과 주먹이 오갔다.
머리가 산발이 되고 옷이 넝마가 된 다음에 그들은 서로를 소가주, 소궁주가 아니라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다.
뒤늦게 모용취려는 생각했더랬다. 그 눈은 아마도 북해빙궁의 보물이라는 빙정(氷精)을 따다 만든 것이리라고.
“나는 내가 언제 이리 나이를 먹었는지 아직도 모른다오. 내 마음은 아직도 철이 없어 어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싶은데 모두 나에게 어디로 가냐고 물으니 할 말이 없다오.”
모용취려는 그렇게 말하며 작게 웃었다. 그 웃음에 단목천기 역시 어렵사리 웃음을 흘렸으나 이내 굳은 얼굴을 했다.
그 표정을 가만 들여다보던 모용취려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도 있기 마련 아니오. 평생 그 그늘 속에서 자책만 하려 했소?”
“그녀의 불행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오. 내 책임이지. 내가 그녀를 여기까지 데려왔고, 내가…….”
단목천기는 빠르게 말했으나 말을 끝맺지는 못했다.
모용취려가 그를 가만 바라보다가 챙겨 온 손바닥만 한 상자 두 개를 내밀었다.
“이건, 아까…….”
그리고 상자를 열어 본 단목천기는 잠시 말을 잊었다.
조금 전 모용세가를 환대하는 자리에서, 모용취려는 직접 크고 납작한 상자 하나를 내놓았다.
경항운련에 처음 참가하는 자리를 기리기 위해 아이들에게 나누어 줄 작은 내단을 선물로 가져왔다는 것이었다. 그 함 안에는 열 개의 환약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만 해도 보통 값진 것이 아니다. 솔직히 이런 아이들 모임에 내놓을 것은 아니었다.
“조금 전 그것은 우리 모용세가에서 내놓은 것이고, 이것은 북해빙궁에서…… 그 아이가 전해 달라 부탁한 것이오. 그래서 좀 늦었지.”
“이게, 무슨…….”
“두 사람이 련아의 벌모세수를 도와주었다고 들어서 두 알을 보낸 것인데 설마 셋은 아니겠지?”
마지막 말은 농담이었지만 분위기가 부드러워지진 않았다. 모용취려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영단에 대해 설명했다.
“설련실(雪蓮實)과 태양금리(太陽金鯉)의 내단을 조합해 만든 영단이라 하오. 북해에서 태양금리의 내단을 구하기 쉽지 않았을 것인즉, 그 정성을 헤아려 주길 바라오.”
설련실은 차가운 곳에서만 자라는 연꽃의 열매로, 그중에 아주 드물게 나는 붉은 열매를 말한다.
거기다 태양금리는 뜨거운 물에서 사는 잉어들—화리(火鯉)— 가운데에서도 가장 특별한 녀석이었다.
화리가 몸은 양기를 품되 그 내단은 음기를 띤 것과 다르게, 태양금리는 몸도 내단도 양기 그 자체다.
아마 북해의 인물이 섭취할 것이었다면 설련실만으로 충분했을 것인데 굳이 태양금리를 구하여 조합해 만든 것이었다.
“이걸 왜 그녀가…….”
“왜냐니? 조모로서 손녀딸을 위해 희생한 자들에게 값을 치르는 게 당연한 거라며 내놓았소. 영단을 취하고 심법 운용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 오래지 않아 잃었던 것을 복구할 수 있을 거라 하더이다.”
이만한 영단은 돈이 있다고 함부로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때와 운이 따라야 하고, 인연이 닿아야만 만들 수 있는 걸 두 개나 손에 넣기까지 보통 수고롭지 않았을 것이다.
“본래는 그녀가 이걸 들고 직접 오려고 했는데…….”
“……!”
단목천기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모용취려가 씁쓸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많이 나아졌다곤 해도 그 몸으로 어찌 오겠소. 아직은 시기상조라 내가 대신 전해 주겠다 하여 들고 온 것이오. 무월검께서는 이만 받아 주시오.”
단목천기가 작은 함에서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하다가 천천히 닫았다. 그의 눈매에 고통이 스쳤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모용취려가 입을 열었다.
“현요가 그 애를 닮아서 여름에는 맥을 추지 못했는데, 아이들도 그렇소?”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단목천기는 의아해하면서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련아도 성아도 더위가 심해지면 그저 드러눕곤 하지. 한서불침(寒暑不侵)은 언제쯤 되는 거냐고 한탄하면서…….”
더위에도 추위에도 끄떡없는 한서불침은 보통의 내공으로는 도달하기 어려운 먼 경지다.
아직 어린 손녀들이 까마득한 미래를 꿈꾸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저 애틋하여 희미한 미소가 그의 얼굴 위로 번졌다.
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모용취려가 조용히 말했다.
“더울 때면 피서를 가는 게 어떻겠소? 저 먼 북해라면 시원할 테지. 하하, 오히려 추울 수도 있겠다만.”
모용취려가 농담처럼 덧붙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그때쯤이면 기력을 되찾은 설언이 얼굴 한 번 못 본 손녀들과 만나겠다고 난리법석일 테니, 직접 가서 달래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오.”
둘러말했지만, 그들이 북해까지 찾아가도 좋을 거라는 얘기였다.
* * *
“이게 뭐…… 뭐예요?”
련은 단목천기가 자신을 조용히 불러서 보여 준 환약 두 개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련의 눈에는 푸르스름한 기운이 한껏 일렁이는 작은 경단처럼 보였다. 련이 무심결에 손을 뻗는데…….
* 정순하게 만든 한련서리단(寒蓮暑鯉團)입니다. 가까이 가면 영기가 차오르는 속도가 근소하게 빨라집니다. *
련의 눈앞에 선경이 떠올랐다. 련은 화들짝 놀라 손을 거둬들였다.
련이 경악한 표정을 짓는 걸 보고, 단목천기는 이 손녀가 영단의 정체를 간파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뭔지 알겠느냐?”
련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찬 것과 뜨거운 것을 조화롭게 만든 것이요. 설련실에…… 태양금리.”
말을 마친 련은 문득 단목세가에 있는 연못 속 작은 잉어를 떠올리곤 괜히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 애가 설마 영물이 될까? 아니…… 아니겠지?’
“너라면 알아볼 줄 알았느니라.”
“그런데 이건 왜, 어디서…….”
“청윤진인과 유성도 그 두 사람이 네 벌모세수를 돕기 위해 그간 착실히 쌓아 왔던 내공을 불사른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네.”
그걸 어떻게 잊겠는가. 자신이 타인의 삶을 일부 훔쳐 내어 눈을 떴다는 사실을.
그들이 이 작은 도둑을 얼마나 기껍게, 애틋하게 여겨 주었는지를.
그들이 제 인생 전부를 쏟아부었음에도 ‘단목련’이 십여 년을 겨우 숨만 연명하다가 의미 없이 산화했을 때도 원망하지 않았던 것을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