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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09)화 (109/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09화

“네 할머니가…… 준비해 주셨다고 하는구나. 그 둘에게 하나씩 줄 것이다.”

“네? 두 분에게요? 네? 할머니요?”

단목천기는 갑작스러운 조모의 얘기에 놀란 련의 표정을 보고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아마 성아는 알고 있을 것인데, 여태 네게는 네 조모 얘기를 해 주지 못했지. 그녀는…….”

단목천기는 말을 꺼내다 목이 멘 듯 잠깐 숨을 골랐다.

“그녀는 원래 북해빙궁의 여덟 번째 소궁주였지.”

“북해빙궁은 여기서 엄청…… 나게…… 멀지 않아요?”

항주와 만 리는 떨어져 있는 마천교를 보고서도 새외(塞外)라곤 하지 않는다. 어쨌거나 이 무림에서 함께 부대끼는 사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저 북쪽 멀리 있는 북해빙궁이나 남쪽의 남만야수궁을 보고서는 ‘새외무림’이라고 칭했다. 아득히 먼 곳이기에.

‘그래서 그 북해빙궁이 혈라곡과의 전투에까지 참전했을 때 놀랐던…… 어라, 설마?’

련의 눈이 점점 커지며 그 눈동자 위로 별빛이 사르르 어리는 것을 본 단목천기는 그리운 표정을 지었다.

“다들 북해의 차기 주인은 그녀가 될 거라고들 말하곤 했지. 도무지 그 차가운 북해의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치 혈기가 넘치고 괄괄한 사람이었단다…….”

— 너! 네가 단목천기냐? 이 중원 무림 후기지수들 중에 네가 제일 세다고?

뚜렷한 콧대와 흐릿한 별빛이 어려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진 여자가 삿대질을 일삼으며 외쳤다가, 뒤에 함께한 벗에게 ‘……단목천기, 이 이름 맞지?’라며 속삭이던 모습이 아직도 그의 기억 속에 선연했다.

“그 성미에 어찌 얌전히 북해에만 있었겠느냐. 중원 무림은 어떤지 구경을 해 보겠다고 빙궁을 뛰쳐나왔지. 그러다가 우연히 나와 만나게 되었는데…….”

겨뤄 보자며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사람을 상대하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모른다.

이쪽은 상대가 북해의 소궁주 중 한 사람, 그것도 유력한 차기 궁주 후보라는 걸 알고서 진땀을 빼는데 그녀는 그런 게 없었다.

— 내가 소궁주랍시고 여기 온 것도 아닌데, 대체 뭐가 문제냐? 이 겁쟁이!

함께 끌려온 젊은 모용취려가 그녀의 뒤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모습, 입을 함지박만 하게 벌리고 웃던 얼굴…….

“그러다…… 그러다가…… 여기에 남게 되었지. 이 할아비와 함께.”

수십 년 전 일인데도 어제 일처럼 뚜렷하게 떠오르는 기억이었다.

서호를 떠도는 풀벌레들 우는 소리, 멀리서 울려 퍼지는 피리의 가냘픈 떨림, 취객들의 고성방가가 어우러진 항주 시내를 걸어가던 빙설언은 그때도 그보다 한 걸음 앞서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성격이 급해 가만히 있질 못하고서.

그러다가 우뚝 멈춰 서더니 그를 돌아보며 말하는 것이었다.

— 우리 결혼하면 어디에서 살지?

— 하하,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누가 누구랑 뭘 한다고?

— 너하고 내가 결혼하면 말이야.

— 왜?

— 그야 내가 널 좋아하니까.

단목천기는 길 가다 낯선 사람에게 갑자기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어안이 벙벙하고 열이 올라 굳었는데 빙설언은 혼자서 계산을 시작했다.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으며 믿을 만한 후계자는 단목천기뿐인 단목세가와, 다른 후보 소궁주들이 여럿 있는 북해빙궁의 상황을 혼자서 척척 따져 보더니 한껏 양보한다는 표정으로 으스대었다.

— 에이, 기분이다. 서호가 아름다우니 봐주는 거야. 알겠어?

— 아니, 누가 누굴…… 누가 누구랑 어디서 뭘 한다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서 말을 더듬거리고 있으니 빙설언은 그 꼴을 보며 태양처럼 활짝 웃었다.

제 살던 곳을 떠나 아는 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항주에 남겠다는 결심이 쉬웠을 리 없는데도.

자신이 손에 거머쥘 북해빙궁을 내팽개쳐야 한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인데도.

그녀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이 여행이 ‘궁주가 되기 전의 마지막 일탈’이기에 가능했던 것인데도.

“이 중원에 무림맹이 창설되고 혈라곡과 상대하는 데 북해빙궁이 손을 거든 것은 그녀 때문이었지. 그리고 그녀가 그랬던 건…… 나 때문이었고.”

눈 뜨고 자기네 소궁주를 빼앗긴 북해빙궁은 언제나 흰 눈을 뜨고 단목천기를 보곤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혈라곡을 상대하기 위해 북해의 무인들을 보냈다.

왜냐하면 그것이 협이기 때문에.

무림인이 무(武)를 단련한 것은 작게는 힘을 연마하여 자신의 깨달음을 얻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이지만, 크게는 자신보다 약한 자를 돕고 악한 자와 맞서 싸우기 위해서이므로.

그러나 그 과정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 모였으니 그것을 규합하고 조율하는 것도 일이었다.

그리고 모든 일의 마지막엔, 마침내 혈라곡을 격퇴하고 난 이후에는 그 모든 걸 후회했다. 그녀와 처음 만났던 그 순간마저도, 단목천기는 후회했다.

북해빙궁의 손까지 빌리지는 말걸 그랬다고. 그녀까지 여기에서 싸우게 해서는 안 되었다고. 처음부터 그녀를 항주에 남겨선 안 됐다고.

자신과 혼인을 해선 안 됐던 거라고.

처음부터 우리는 만나서는 안 되었던 거라고.

그랬다면 중원 무림 한복판에서 쓰러진 그녀를, 살릴 방도가 없어 북해로 돌려보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아니, 그 무엇보다도 어쩌면 사람을 살리기 위해 나서겠다는 자신의 소망과 마음 자체가 그른 것이었다고.

가족조차 지키지 못하는 협의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중원 사람을 다 살려도 내 아들이 죽고 아내가 눈을 뜨지 못하면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런데 할머니는 왜 북해로…… 떠나셨어요?”

련은 두려운 마음을 감추고 물었다.

아이를 잃은 부부는 때로는 함께할 힘을 잃기도 한다. 현성을 잃었기 때문에 그리되었다는 말이 나올까 봐 긴장한 련을 두고서 단목천기는 쓰게 웃었다.

“험한 전쟁이었다. 네 조모도 그 와중에 심하게 다쳐…… 도무지 어찌할 방도가 없었던 것을, 북해에서 어떻게든 해 보겠다고 데려갔지.”

그 이후로 긴 시간이 흘렀다. 북해는 문을 걸어 잠갔고 그 자녀들에게조차 열어 주지 않았다.

그러나 단목현요는 개의치 않았다. 닫힌 문은 그 자체로 그녀에겐 희망이었다.

어머니가 아직 돌아가시지 않았다는 건, 언젠가는 나으실 수도 있다는 얘기였으니까.

“많이 건강해졌다고 하는구나. 일어나서, 네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 널 도와준 사람들에게 값을 치러야 한다고 이걸 보내왔다.”

련은 조금 멍한 표정으로 조부를 바라보았다.

엄하거나 장난기 있거나 혹은 이따금 벅찬 듯한 표정을 짓곤 하던 조부가 아니었다.

그리고 련은 머릿속에서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곧장 말했다.

“가요.”

“뭐…… 뭘?”

“가요. 우리가 북해로 가요. 할머니께…….”

“경항운련이 이제야 시작할 것인데 어딜 가자고 하는 게야.”

“아, 아…… 그렇지…… 그렇지요.”

련이 자신의 이마를 매만지며 조금 멍하게 중얼거렸다.

항상 명석하고 침착한 련의 모습만 보아온 단목천기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가, 이윽고 빙그레 웃음 지었다.

“그리고 오라는 말도 없었는데 어찌 대뜸 찾아간단 말이냐? 그럴 수는 없지.”

그렇게 말하는 단목천기의 목소리가 조금 씁쓸했다.

“이게, 이게 오라는 얘기예요!”

련은 영약이 든 함을 가리키며 맹렬하게 말했다.

“할머니한테 이렇게…… 이렇게 굉장한 걸 받았으니까 당연히 감사 인사를 드리러 가야죠!”

“그래도…… 괜찮나?”

단목천기가 다소 자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 태도를 보고서는 련도 조금 망설였다.

“혹시 두 분…… 엄청 싸우시면서…… 헤어지셨어요?”

“아니, 그건 아니었다. 그녀는 그때 …….”

의식이 없었다. 그녀를 데리고 돌아가겠다는 것은 북해빙궁 사람들의 결정이었다.

그때 깨어 있었다면 그녀는 반대했을까? 그랬다면 정말 다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부 가정일 뿐이었다.

“그럼 가서 얘기해야죠. 할머니께서 이렇게까지 해 주셨는데, 감사하다고요. 오랫동안 보고 싶었다고. 또 손녀 손자들이 얼마나 많이 컸는지랑…….”

련이 더듬더듬 할 얘기를 손꼽다가 단목천기의 눈빛을 보곤 침착해졌다.

“북해까지 가서 문전박대를 당하더라도 가야죠, 문전박대당하러.”

“문전박대당하러?”

그 말이 자못 재밌게 들렸는지 단목천기는 작게 웃었다가, 이윽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자꾸나. 가자, 북해로.”

“이번 경항운련만 끝나면요. 곧장.”

“그래, 그래.”

“경항운련, 이거 빨리…… 어떻게 안 되나요?”

급하기로는 단목천기가 더 급하겠지만 련이 조르듯 말했다. 단목천기가 웃음을 터뜨리곤 련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쓰다듬었다.

단목천기가 웃는 소리가 조용하게 웅웅거리며 울려 퍼졌다.

“너 북해빙궁 가 본 적 있어?”

“네…… 네?”

단목비와 단목성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현란한 그림자놀이의 손가락 움직임을 이리저리 재현해 보던 화륜은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사촌과 동생을 재운 련은 창가에 기대어 앉아서 흐드러지게 핀 목련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아니…… 제가…… 뭘 어떠…… 어떻게 북해에 가요. 갑자기 북해는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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