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10화
평소였다면 화륜의 태도가 수상쩍다며 트집을 잡았을 련이 오늘은 조금 멍한 듯 몽롱한 듯 했다.
“나 몰랐는데…… 우리 할머니가 북해에 있대.”
“누이의…… 할머니요?”
“오래 아프셨는데 지금은 많이 괜찮아지셨대. 그래서 내 벌모세수 도와준 분들한테 드릴 영단도 함께 보내 주셨다는 거야.”
“오.”
“그래서 가기로 했어. 경항운련 끝나고 나서.”
“네?”
거기까지 말한 련은 열의 가득한 얼굴로 화륜의 손을 꼭 붙잡았다.
“엄청 멀긴 하지만! 그래도 재밌을 거야. 북해 구경도 하고. 춥다니까 겨울옷 같은 걸 챙겨야겠지? 가는 길에 오리 구이 먹을까?”
“네? 오리 구이요? 갑자기 자학이에요?”
“그게 무슨…… 우화륜!”
련이 소리를 꽥 지르고, 화륜의 머리카락이 거의 새집이 되고 나서야 둘은 겨우 진정했다.
련은 조금 전의 대화를 아주 잊은 것처럼 말을 이었다.
“하…… 진작 표국을 키워 놨어야 했는데 내가 좀 늦었네.”
“표국이요?”
화륜이 엉망이 된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잡아당기며 물었다. 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원대한 꿈이 있거든. 표국을 키워서…… 표행 나간 표사들한테 요리가 끝내주게 맛있는 객잔을 발견하면 적어 오라고 해서 작은 책자를 발간하는 거지. 그럼 다른 표사들도 그 지역에 갈 때 맛있는 걸 먹으러 바로 갈 수 있겠지.”
“그런 건 선배 표사들이 알려 주겠죠.”
“……아니, 그러지 못할 수도 있잖아……. 그리고 무림 전체 객잔 지도를 만드는 것도 의미가 있고…… 꼭 우리 표국에서만 쓰는 게 아니라 다른 표국이나 상단에 책을 팔 수도 있고!”
“네, 그래서 오리 구이요.”
“어어. 오리 구이도 먹고. 다른 맛있는 것도 먹고, 또 꽃이나 나무도 여기랑 다를 테고.”
“그렇기는…… 하겠는데…….”
“대신 갔다가 꼭 같이 와야 한다.”
“네?”
“북해빙궁에서 우화륜 똑똑한 거 알아보고 금은보화 준다고 해도 거기 남으면 안 된다고. 나랑 같이 돌아와야 해.”
“또 혼자 쓸데없는 상상 했어요? 금은보화를 주긴 누가 줘요.”
화륜은 건성으로 얘기하며 손을 내저었지만, 련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화륜의 양 뺨을 꽉 눌러 잡았다.
“내 눈에 보석은 남의 눈에도 보석이라는 말 알아?”
“…….”
“이 누이는 너무너무 걱정이 된단다. 밖에서 누가 우리 륜아 알아보고 채갈까 봐.”
“……어디 안 간다고 했잖아요.”
“그렇지? 내가 양자 입적 얘기한 것도 안 받아 줬으면서 다른 데 가 버리면 배신이지 진짜.”
“배신이라고 할 것까지야…….”
“배신이다. 배신자는 즉결처분. 알지?”
“어떻게 즉결처분인데요?”
“내가 만든 경단 백 개 먹어야 돼.”
순간 화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진짜 심한 거 아니에요?”
“너는 항상 빠져나갈 구석을 만들려는 경향이 있어. 대체 왜 그럴까? 이 단목련은 궁금해.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는 너의 내면 탓일까?”
“아, 알았다고요. 배신 안 한다고요.”
련이 엄하게 하는 말에 화륜이 그 손을 떼어 내며 투덜대듯 말했다. 련은 금방 배시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같이 갔다 오자. 북해에 가면 빙판도 있대. 빙판 알아? 호숫물이 다 얼어서, 그 위에서 놀 수 있다는 거야…….”
련이 열심히 재잘거렸다. 화륜은 그 말을 귀담아듣는 시늉을 하면서도 련의 안색을 훔쳐보았다.
그 얼굴에 아픈 듯한 창백한 기색은 없어서, 화륜은 ‘그런 거 관심 없다고요.’라거나 ‘그런 건 북경에만 가도 있어요.’라고 대꾸하는 대신에 ‘그러다 얼음 깨지면 어떡해요?’라고 물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이 누이가 구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련이 활짝 웃었다. 눈동자에 어린 별무리도 눈매 사이로 쏙 숨어들었다. 화륜은 괜히 팔에 고개를 파묻고서 ‘약속했어요.’라고 중얼거렸다.
밤이 곱게 저물어 갔다.
* * *
모용세가까지 도착하여 거창한 환영 연회가 끝나고, 이제 이 경항운련의 목적을 취할 때가 왔다.
첫 강연자는 하북팽가의 가주 팽무혁이었다.
팽무혁은 건장한 체격에 부리부리하게 큰 눈하며, 다소 부드러운 말씨를 쓰는 팽주란과는 많이 다른 인상이었다.
‘의혈도(義血刀) 팽무혁이라더니.’
백도 인물의 별호에 ‘혈’이 들어가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만큼 그의 성격이 얼마나 호쾌한지 보여 주는 것이다. 그 호쾌의 방향은 제쳐 두고 서라도 말이다.
“중요한 건 실전이다.”
연무장에 아이들을 다 세워 놓고서, 팽무혁은 인사말이나 자질구레한 건 전부 집어치운 뒤 대뜸 그렇게 말했다. 오른손에는 그 너비가 사람 허벅지만 한 도를 들고, 왼손에는 쇠로 만든 종을 든 채였다.
‘저 종은 뭐지?’
아이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굴리며 팽무혁을 올려다보았다.
“자! 그러니까 여덟 명씩 나와서 나와 싸운다.”
“네?”
“그게 무슨…….”
“마, 말도 안 돼요. 하하하.”
웃는 아이들도 있었다. 진짜 칼을 든 무림 세가의 가주와 싸우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휴…….”
그 와중에 팽무혁의 아들인 팽주란만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의 성미를 생각했을 때 저리 나올 줄 알고 있었기에.
그리고 아이들이 어떻게 반응할 새도 없이, 팽무혁은 아이들을 눈에 보이는 대로 여덟씩 나누었다.
“다행히 이 몸은 관대한 사람이다. 딱 일각(15분) 줄 테니 어떻게 공격할지 각자 의논한 뒤에 덤비도록! 그럼 시작!”
그리고 그와 동시에 팽무혁이 왼손에 든 종을 요란하게 흔들었다.
귀청을 때리는 종소리에 아이들이 저도 모르게 팽무혁이 나눠 준 조대로 서로를 마주했다.
“음.”
그리고 련 역시 자신의 조원들을 쳐다보았다.
가까이 붙어 있는 아이들끼리 대강 나누었던지라 이쪽은 련, 단목비, 매신유, 모용세가의 모용설호, 금종하, 팽주란, 악소형, 서극림이 한 조였다.
따로 떨어진 단목성과 단목완이 아련한 눈으로 련을 흘끔 쳐다보았다. 특히나 단목완의 눈빛이 몹시 처연했다.
“의혈도 어르신의 공격 성향은 어떻게 돼?”
그러나 고작 일각이면 눈 깜짝할 새나 다름없었다. 련은 지체하지 않고 이 자리에 있는 팽주란에게 물었다.
팽주란이 황당한 얼굴로 련을 쳐다보았다.
“지금 우리 아버지 약점을 나한테 물어보는 거야?”
“약점을 물어보는 게 아니라 공격 성향이 어떻게 되시냐고. 알아야 조금이라도 대응을 잘하지 않겠어? 우리 조에 마침 네가 있으니까 우린 다른 조보다 더 잘해야만 하잖아.”
“아니…… 나는…….”
“빨리!”
재촉한 건 모용설호였다. 팽주란은 얼떨떨한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다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아, 아버진…….”
그러면서 동시에 수련이라는 이름으로 아버지에게 쥐어 터진 나날들이 가파르게 스쳐 지나갔다. 팽주란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상대의 약점이 보이면 일격에 때려 부수는 걸 좋아하시는데…….”
련은 이런 질문으로는 제대로 된 답변을 얻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아니, 너희 집에서도 이런 식으로 수련하는 거지?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식이야?”
“어, 아버지가…… 보통은 반각 정도 받아 주시다가, 잠시 동안은 내가 견딜 만한 공격을 퍼붓고, 그다음에는 내가 감당 못할 초식으로 제압하시곤 해.”
련은 마른침을 다셨다.
“그냥 너희 기본 도법을 한 번만 보여…….”
“도법 한 번만 펼쳐 봐.”
련은 동시에 말을 꺼낸 모용설호를 돌아보았다. 모용설호 역시 놀랐는지 눈을 끔벅거리다가 다시 팽주란을 쳐다보았다.
팽주란은 저 멀리 떨어져서 팔짱을 끼고서는 왼손에 종을 든 채 눈을 꾹 감고 있는 아버지를 흘끗 쳐다보았다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려울 건 없지만…… 이렇게까지……?”
다른 조도 소곤대고 있었지만 잘 들어 보면 ‘열심히 해 보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자신만 너무 열심히 하려니 조금 창피하다.
“당연하지. 의혈도 어르신을 다음에 또 뵌다 하더라도 몇 년 뒤일 텐데, 지금 하나라도 열심히 배워야지!”
‘그리고 이번 경항운련에서 성취가 제일 좋은 순서대로 모용세가 영단을 나눠 준다고 했잖아. 그건 내 거야!’
당연히 자신에게는 필요 없고, 세가 아이들에게 나눠 먹일 생각이었다.
거기다 영단은 내공을 증진시키는 것 외에도 부수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것들이 있다.
몸을 정순하게 해 준다거나, 내공 상실을 막아 준다거나.
‘그런 건 단지 영단에 어린 영기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특별한 제조법에서부터 비롯되는 것 같으니까.’
여러 가지 종류의 영단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나중에 영단을 만들 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 생각으로 련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자 결국 팽주란이 엉거주춤 도를 손에 쥐었다.
저 별이 반짝이는 듯한 열렬한 눈동자를 보고 있으려니 뒤로 뺄 수가 없었다.
“음, 이건 건곤연환탈백도(乾坤連環奪魄刀)라는 건데. 어…… 지금 할게.”
“그래, 그래!”
련을 따라 모두 집중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자 광대가 된 듯한 기분도 들었지만, 팽주란은 더는 투덜거리지 않고 묵묵히 도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사이에 련의 눈동자에 떠오른 별빛이 더욱 선명해졌다. 련의 눈 속에서 심안이 반짝이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