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11화
‘실전적, 패도적, 어떤 의미에서는 잔인할 정도. 하지만 고통을 유도하는 방식은 아니야. 후환을 남기지 않으려고 할 뿐.’
하북팽가가 지난 혈라곡과의 전투에서 실력을 뽐낸 이유가 있었다.
“음, 앞이 강한 만큼 뒤가…….”
“이 도법은 뒤가 약하니까 다수가 앞에서…….”
동시에 말을 잇던 련과 모용설호는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와 눈을 퍼뜩 마주한 련은 모용설호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다급히 먼저 말했다.
“앞을 강하게! 몰아세우니까! 상대적으로 뒤는 개의치 않는, 개의치 않는 도법인 것 같아.”
‘뒤가 약한’이라는 표현을 어떻게 그 도법의 후계자 앞에서 할 수 있겠는가. 련에게는 그 정도 상식은 있었다.
‘설호한텐 없는 것 같지만…….’
“그래서 내 생각엔 여덟 명 중에 다섯 명이 정면에서 먼저 승부를 하는 사이에 남은 세 사람 중에 하나는 어르신의 옆에서, 그리고 두 사람이 뒤로 가서 공격하는 방식이 좋을 것 같은데. 어때?”
련의 의견을 잠자코 듣고 있던 악소형이 물었다.
“옆은 왼쪽? 오른쪽?”
“오른쪽.”
모용설호가 빠르게 대답했다.
악소형은 자신만 이 대화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한 건지 잠시 눈치를 살피다가 나머지 여섯도 명쾌하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아채곤 조금 안심했다.
“오른쪽인 이유가 뭐야?”
악소형이 되묻는 말에 모용설호가 대답했다.
“어르신은 왼손잡이니까.”
“뭐?”
저도 모르게 여섯 명이 몽땅 고개를 돌려 팽무혁을 쳐다보았다.
상대와 마주하고 있으니 좌우가 잠깐 헷갈린 아이들이 자신의 양손을 쥐었다 펴 보며 가늠하다가 작게 소곤거렸다.
“……지금……! 어르신은 도를 오른쪽에 쥐고 계시잖아.”
이번엔 모용설호가 련을 쳐다보았다. 련은 팽무혁을 흘끗 쳐다보곤 입을 가리고 미소 지었다.
“그건 속임수야. 당연히 오른손잡이라고 생각하게 만든 거. 관찰력 좋은 애가 우연히 알아봐도 오른손잡이라고 생각하게 만든 거야.”
“그럼 왼손잡이인 걸 어떻게 알아?”
팽주란은 다소 소름이 돋은 얼굴이었다.
“왼팔이 오른팔보다 더 두꺼우시잖아. 왼쪽 다리가 오른쪽 다리보다 조금 더 앞으로 나와 있고.”
“그게…… 보여?”
악소형이 기죽은 얼굴로 물었지만 련은 대꾸하지 않고 빠르게 말을 이었다.
“어르신이 뒤로 돌아가는 사람을 그대로 두고 볼 리가 없으니 뒤쪽 공격을 맡는 사람은 당연히 자기 무공에 대한 이해가 높아야 하고 또 민첩하게 반응할 재기가 있어야 해. 정공법 이외의 방법에도 능숙해야 하니까, 나는 신유와 주란이 갔으면 해.”
“…….”
“…….”
련이 쏟아붓는 말에 잠깐 모두가 침묵하다가, 모용설호가 말했다.
“내가 제일 강한데? 내가 뒤로 가는 게 낫지 않아?”
“아니, 너는…….”
련은 잠깐 아득해져서 미간을 감싸 쥐었다. 그사이에 악소형이 반발했다.
“야! 무……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그럼 아니야? 너희가 나보다 강해?”
모용설호가 담담하게 되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는 듯이. 악소형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들은 이미 지난 저녁에 다 함께 자율 수련을 했었다.
모용설호가 련의 말을 듣고 곧장 틀렸다고 부정하지 않고 ‘내가 가는 게 낫지 않아?’라고 온건하게 말하는 것도 그래서였다.
련의 의견이라면 자신과 달라도 틀리지 않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만큼, 서로의 실력 차이도 이미 모두 체감하고 있었다.
련은 거의 기절할 것처럼 빠르게 말했다.
“아니, 설호 너는! 네가 정면에서 어르신의 시선을 끌어야 애들이 뒤로 빠질 수 있잖아. 앞이 강한 도법이니까 상대하는 우리도 앞이 강해야 하지 않을까?”
“맞는 말 같네. 알았어. 내가 앞. 그럼 너는?”
“나는 옆. 극림과 네가 정면 앞줄. 기초가 탄탄한 종하와 소형, 그리고 아직 어린 비아가 정면 제일 뒤에서 두 사람의 공격 사이로 어르신을 상대하게 하는 거지.”
“응, 이해했어.”
“알겠습니다.”
“넵.”
“네에에!”
차례로 모용설호와 서극림, 매신유, 단목비가 대답했다. 여덟 명이 한 조인데 한 명이 의견을 내고 네 명이 동의했으면 남은 세 명은 잠자코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다만 팽주란이 다소 불안한 표정으로 련을 붙잡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나 한 번도 아버지의 뒤를 잡아 본 적 없는데……. 여태 그럴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어.”
“그러니까 지금부터 생각하면 되지.”
“그…… 그런가?”
“사실 여덟 명이라서 우리가 더 불리한 점도 있어. 손발을 맞춰 보지도 못했으니까…….”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야지. 지레 포기하는 건 무인의 소양이 아니야.”
모용설호가 엄격하게 말했다. 팽주란은 질린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버지한테 두들겨 맞으면 생각이 좀 바뀔걸. 아무리 너라도.”
“그렇다 하더라도 불굴의 정신으로 도전해야지.”
“아니, 그게…… 아니…… 아니다, 열심히 할게…….”
련은 여기에 단목성이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잠깐 하고는 아이들을 떼어 놓았다.
“아! 그리고 합격진 해 본 사람?”
련은 남아 있는 시간을 가늠했다. 여럿이서 강자를 상대하기 위해 발전한 합격진에 대한 책을 읽은 적은 있지만 실전에 적용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거 사실 좀 비겁한 거 아니야? 한 사람을 여럿이서 상대한다니.”
“비겁한 건 그걸 핑계로 악을 방관하는 거다.”
“……!”
악소형은 또 자신의 말을 반박하는 모용설호를 보고 비명이라도 지를 것 같은 표정을 지었으나 이윽고 그 맑은 눈동자에 질려서 눈을 피했다.
“젠장,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소형, 불만이 있으면 말을 분명히 해. 그렇게 웅얼거려서는…….”
이번엔 련이 비명을 지를 것 같은 얼굴로 끼어들어서 빠르게 말했다.
“그래, 아무도 안 해 본 건 알겠다! 알겠어! 그럼 일단 앞줄인 설호와 극림은 둘 다 검법을 쓰니까 가장 기본은 찌르기, 둘 다 오른손잡이니까 제일 뒷줄에서 가장 왼쪽은 종하, 가운데가 단목비, 우측이 소형. 어때?”
“……으음.”
모용설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련은 그가 이 배치에 담긴 뜻을 눈치챘음을 알았다.
가장 왼쪽의 금종하는 앞줄의 방해 없이 도법을 펼칠 수 있는 자리였다. 그의 힘에도 일정 부분 기대겠다는 뜻인데, 모용설호는 그것을 자신의 검을 믿지 못한다는 뜻으로 해석한 눈치였다.
“지금 우리 중에 누구도 의혈도를 꺾을 수는 없잖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는 거지. 그리고 신유는 내 뒤로, 주란은 의혈도의 왼쪽으로 지나서 뒤로 가는 거야.”
“우리 아버진 왼손잡인데 나보고 왼쪽으로 가란 거야?”
련이 진중한 표정으로 그의 양손을 꼭 붙잡았다.
“네 아버지니까 네가 가장 잘 알 거야. 우리 중에 네가 가장 잘할 거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말이었으나 팽주란은 격렬하게 고개를 흔들며 소스라치듯 자신의 손을 빼냈다.
“나한텐 그 표정! 그 눈빛! 해도 소용없어. 그런 거에 넘어가는 건 소형 정도니까!”
“뭐? 대체 내가 또 뭔데? 뭐야?”
갑자기 호명된 악소형이 돌아보았다.
련이 그런 악소형을 보고 빙긋 웃으며 달래듯 말하는 사이에, 팽주란은 말해 봤자 아무것도 통하지 않을 모용설호는 넘기고 금종하에게 속삭였다.
“그래, 저렇게 어르고 달래서 시키는 대로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건 소형뿐이라고. 난 아냐.”
팽주란이 진저리치듯 뒷걸음질까지 치면서 말했지만, 금종하는 가엾은 중생 보는 부처 같은 눈으로 그를 흘끗 쳐다봤을 뿐이었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던데…….’
말했던 일각이 다 지나고, 팽무혁은 슬그머니 눈을 떴다. 열몇 살 먹은 아이들끼리 뭉쳐서 이런저런 계책을 짜낸들 귀엽기만 할 뿐이겠으나 그렇지 않은 조도 있었다.
‘흠. 단목련이라고 했던가? 이번 경항운련 자율 수련도 주도해서 한다더니…….’
아이가 몸이 아프다가 일어났다기에 의욕이 충만하다고 생각하기만 했는데, 저들끼리 모여 소곤대는 이야기는 몹시 논리적이고 명석했다.
무림맹의 군사들이 모여서 계책을 짠다 한들, 이 정도 인원으로 이 정도 힘의 격차가 나는 전투를 치를 방도를 구상하라 하면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팽무혁은 단목련의 조를 가장 마지막으로 미뤄 두고 차근차근 아이들을 상대했다.
어차피 처음부터 대단한 걸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빤히 드러나게 움직이는 아이들도 있었고, 의외로 기지를 보이는 아이들도 있었다.
‘흠. 이 애는 단목세가에서 혼자 도를 잡았다더니…….’
아들 팽주란이 떠드는 얘기를 통해 들은 적이 있었다. 남들과 다른 길을 가는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그 빛도 다른 법이다.
팽무혁은 단목성이 있는 조를 상대할 때는 한층 더 신경을 써 주었다.
아들이 봤다면 그저 있는 힘껏 두들겨 패기만 한 게 아니냐고 했겠지만 어쨌든 그는 신경을 써 주었다.
그리고 남궁세가에 도착하기 전까지 가장 눈여겨보고 있던 남궁서건이 포함된 조를 마주하고서는, 팽무혁은 내심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