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12화
‘남궁세가도 쉽지 않겠군.’
첫째인 남궁서건이 얼마나 노력하는지는 알겠다.
그러나 노력만 가지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면 무림의 많은 문제는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형제가 나란히 자질이 부족하면 또 모를까, 아무리 봐도 둘째 남궁서진의 무공에 대한 이해도와 감각은 범상치 않았다.
보아하니 남궁서건은 그 사실까지도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에게 실컷 두들겨 맞은 여덟 명은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면서도 친분이 있는 사이끼리는 서로 부축을 해 주었지만, 남궁세가의 형제는 다소 서먹했다.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조였다.
“열심히 쑥덕쑥덕하더니, 준비는 좀 됐나?”
“열심히 했습니다!”
금종하가 버럭 외쳤다. 팽무혁은 껄껄 웃고는 자신의 도를 번쩍 들었다.
“자, 그럼 오너라!”
합격진을 배운 적도 연습한 적도 없는 어린애들이 일각 정도 소곤거리며 붙어서 의논을 한다 한들 뭘 하겠는가?
팽무혁이 조를 나눈 건 실상 고수가 하수 여럿을 상대하는 다면기(多面棋)를 할 조를 나눈 것이었다.
‘오호라, 제법이야?’
당장 눈앞에 달려드는 소년 두 사람을 상대하면서 도를 강하게 휘두르려 했던 팽주혁은 오른쪽에서 찔러 들어오는 검을 쳐 내기 위해 한 보 가볍게 뛰어올랐다.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아들 팽주란과 단목세가의 방계 한 사람이 뛰어 들어갔다.
“오, 뒤를 잡겠다?”
이런 상황에서는 제법 대범한 발상이다. 그러나 그것도 하수끼리 붙을 때의 이야기 아닌가.
“하하, 어림없지!”
고수의 세계란 마치 빛처럼 움직일 수 있는 법이다.
팽무혁은 정면에서 쇄도하는 검들을 강하게 쳐 낸 다음 뒤에서 찔러 들어오는 도를 밀쳐 옆에 선 아이를 방해하게 했다.
‘오……?’
그런데 인상 사나운 소년은 자신이 팽주란을 공격할 때 이미 대범하게 한 걸음 앞으로 달려들더니 비틀거리는 팽주란을 피해 공격을 감행하는 게 아닌가!
그때를 맞춘 것처럼 자신의 공격을 피한 뒤 숨을 고르던 단목련의 검이 찔러 들어왔다. 검끝에 내공과 힘이 실렸다면 치명적이라 할 만한 곳이었다.
“……!”
몇 번의 검격이 오가자 아이들이 하나둘씩 완전히 바닥에 드러누웠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건 정면에서 공격하던 모용설호와 측면에서 파고들던 단목련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모용설호는 팽무혁이 뿌리치듯 내리꽂은 도의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무릎 꿇듯 주저앉았다.
이런 굴욕은 생경한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이 제법 그의 마음에 들었으나, 팽무혁은 그 무엇보다도 흥미가 가득한 얼굴로 마지막까지 남은 작은 소녀를 돌아보았다.
검을 쥔 소녀의 팔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으나 눈빛은 처음과 다를 바 없이 선명했다.
팽무혁은 도를 겨누며 물었다.
“몇 합이나 더 할 수 있겠느냐?”
“지금, 처럼 해 주신다면, 열일곱 합입니다.”
팽무혁은 팔에 가볍게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자신이 계산한 것이 정확히 그랬다.
“네 힘이 그리 강해 보이지는 않는데 어찌 견뎌 냈느냐?”
알면서도 물었다. 이 또한 수업이기 때문이었다. 얼굴에 땀이 맺힌 소녀가 대꾸했다.
“제가 버티지 못할 힘이기에 견디지 않았습니다. 흘려보냈습니다.”
“좋다. 열일곱 합이라 했지. 가 보자꾸나.”
“네?”
단목련은 조금 당황한 듯했으나 망설이지 않고 검을 고쳐 쥐었다. 팽무혁은 아들이 지금 이 대련을 눈여겨보길 바라며 이제껏 해 온 것과는 다르게 다소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 합, 이 합, 삼 합, 사 합…….
작은 소녀의 검과 팽무혁의 도가 서로 춤을 추듯 움직였다.
‘옳거니, 제가 말한 대로 흘려내고, 흘려내고, 흘려…… 반격!’
그 도중에 소스라치게 놀란 팽무혁이 순간 전력을 다해 련을 완전히 날려 버리기 전까지는 그랬다.
팽무혁의 도에 온몸이 날아가듯 떠밀린 련은 뒤로 세 바퀴쯤 굴렀다. 뺨과 머리에 흙먼지가 묻은 련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팽무혁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거세게 련을 날려 보낸 팽무혁은 스스로도 당황한 듯한 눈치였다.
“그…… 새, 생각해 보니 너 하나만 특별히 가르쳐서야 형평성에 어긋날 일이다!”
“아, 네…….”
놀랐던 소녀가 둥근 눈매를 몇 번 끔벅거리더니 수긍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기에, 그 모습을 본 팽무혁의 목덜미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또래 아이 여덟 명과 함께 자신을 상대했고, 그 이후에는 혼자서 버티느라 기진맥진한 아이의 힘 빠진 공격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소름 끼치도록 정교하게 자신의 약점을 노리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힘주어 내치고 말 만큼.
마치 자신의 도법을 머리 꼭대기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가장 취약한 곳을 바늘로 콕 찍는 듯했다.
저 작고 연약한 어린애의 움직임 한 번에 놀라서 일을 이렇게까지 만들었다는 사실에 팽무혁은 수치심을 느꼈지만 그걸 붉어진 얼굴 이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련이 넘어져서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려니 같은 조였던 아이들은 물론이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단목성과 단목비, 방계 아이들까지 우르르 달려와 부축해 주었다.
팽무혁은 그 소란을 오히려 기껍게 여기며 잠시 숨을 골랐다.
‘단목현성의 딸이라더니…….’
그 천재는 젊어서 요절해, 그 또래 무인들에겐 평생 이길 수 없는 그림자가 되었다.
그림자는 빛 속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되살아나는 것이던가?
팽무혁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아들을 흘끗 쳐다보았다.
평생을 이길 수 없는 또래 무인과 함께 살아가는 건 가혹한 형벌이지만,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자에게는 축복이었다.
벌써 단목련을 바라보며 눈빛을 번뜩이는 모용설호를 보면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뻔했다.
‘아니, 아니, 아니지!’
팽무혁은 얼른 고개를 흔들어 자신의 생각을 털어냈다. 아들이 벌써부터 남의 집 자식에게 패배할 거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자…… 자, 그럼. 간단하게 복기해 주고 내 수업을 마치도록 하마.”
팽무혁은 자신을 향하는 단목련의 눈길을 애써 피하며 머릿속에서 주절주절 떠오르는 대로 말을 늘어놓았다.
* * *
“따가워라…….”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흙바닥을 몇 바퀴나 굴렀으니 머리카락에서 모래가 떨어지고 쓸린 손바닥이 따끔따끔했다.
아이들과 조금 떨어지고 나서야 쓸린 쪽을 살펴보던 련은 갑자기 등 뒤에서 느껴진 인기척에 깜짝 놀랐다.
진중하다 못해 충격을 받은 것 같은 얼굴의 모용설호가 련의 등 뒤에 딱 붙어서 련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와! 깜짝이야. 왜, 왜 그래? 무슨 일인데?”
“조금 전에 마지막까지 의혈도 어르신을 상대한 건 대체 어떻게 한 건지 알려줄 수 있을까?”
모용설호가 진중한 얼굴로 련을 쳐다보며 물었다.
련은 따끔거리는 손바닥을 엉거주춤하게 들어 올린 자세로 모용설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잘……?”
모용설호는 조금 좌절한 듯했으나 간절하게 말했다.
“한 호흡씩 나눠서 설명해 줄 수는 없을까? 부탁할게. 당연히 어…… 배움에 따른 값은 치르겠어.”
얼마를 부르든 다 내겠다고 말하는 얼굴이 제법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련은 그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말을 돌리듯 얘기했다.
“조금 전에 수업에서 말한 것처럼, 그냥 공격을 흘려보냈던 거야.”
“그런데도 넌 패배하지 않았잖아.”
“마지막에 내가 뒤로 세 바퀴 굴러간 건 안 봤어?”
련이 자신의 손바닥을 보여 주었지만 모용설호는 그런 게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눈치였다.
그가 막막한 표정과 목소리로 설명을 계속했다.
“난 막아 낸 다음 받아치려고 했는데 잘 안 됐어. 흘려보낸다는 건 어떻게 한 거야? 흘려보내면 반격할 수 없는데 어떻게…….”
련은 그 얼굴을 쳐다보다가 헝클어진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모용세가, 북쪽 끝. 그나마 북해빙궁과는 가까운 편이고 강직한 성격.’
너무 강직해서 다소 도발적으로 느껴지는 언행을 선보이는 편이기는 하지만 저 자질과 노력하는 성격 끝에 따라오는 성취가 있으니 주위에서 반발할 수도 없을 것이다.
거기다 모용취려가 기꺼이 북해빙궁의 심부름꾼 노릇을 도맡아 해 준 것을 보면, 그들은 단순한 벗 그 이상으로 친한 사이인 게 분명했다.
“알려 줄까?”
련이 은밀하게 소곤거리는 말에 모용설호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무슨 대가든 치르겠다고 했지?”
“으, 으응.”
모용설호가 긴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본인이 생각할 수 있는 액수 중에 가장 큰 금액을 생각하고 있는 듯 조금 부담되는 얼굴이었다.
련이 주위를 살짝 살펴보곤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서 대답했다.
“내가 이거 알려 주면, 너랑 나랑은 앞으로 진짜 벗이 되는 거야.”
“……진짜…… 벗?”
“그래.”
“……가짜 벗도 있나?”
“있지, 그럼.”
“진짜 벗은 뭐야?”
“서로 배신하지 않고, 진솔한 마음을 털어놓고, 생각을 속이지 않고, 친하게 지내면서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는 거야. 가령 내가 네게 이런 도움을 준다거나.”
“……!”
“그러니까 내가 도와 달라고 하면, 너도 나 도와줘야 해.”
“그건, 그건 당연하지.”
모용설호가 조금 상기된 얼굴로 뻣뻣하게 대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