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13화
‘그러고 보면 난…… 친구 없는 사람 자석 같은 건가?’
련은 문득 자신의 교우관계를 되짚어 보았다가 생각을 털어냈다. 그사이에 모용설호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건 벗으로서 당연한 거니까, 나는 당연히 대가를…… 더…….”
“아까 말했지? 친구 사이에는 그런 대가 없이 도와주는 거야.”
“……!”
‘그러니까 나중에 네가 잘 자라서, 후기지수 중에서도 첫 번째 용이니 두 번째 용이니 하고 다툴 만큼 잘 자라서 내가 해 달라는 거 다 들어줘야 한다.’
모용설호 같은 사람은 숫자로 계량된 빚보다 무형의 빚에 더 약하다. 이제 이걸로 요녕성 쪽 표국 지부는 따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꼭 네가 다음 모용세가 가주가 되어야 해! 그래서 우리 유성 표국 지부도 받아 주고, 혈라곡 놈들도 쓸어 주고!’
련은 간절한 염원을 담아 모용설호를 쳐다본 뒤 차근히 말했다.
“흘려보낸다고 해서 반격할 기회까지 흘려보내는 건 아니야. 그 기세와 힘을 이용해서 다시 돌아올 수 있어.”
거기까지 말한 련은 잠깐 부끄러워하며 덧붙였다.
“그…… 내가 날아가기 직전에 했던 것처럼 말이야. 상대도 공격을 했으니까 반드시 빈 곳이 생겨. 거길 노리는 거야. 난 날아갔지만.”
창피해서 괜히 한 번 더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가 상대의 무기에 주의를 기울이는 건 무기가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게 상대의 손이자 발이기 때문이라는 걸 종종 잊는 것 같더라고.”
“……!”
“우리가 무기를 드는 건, 상대가 쥔 무기를 공격하려는 게 아니라 상대를 공격하려는 거니까……. 반격은 ‘되받아쳐 공격한다’는 말인데, 여기서 핵심은 ‘공격’이지 되받아치는 게 아니잖아.”
* 모용설호의 배움 1
모용설호의 깨달음3 *
두전성이 : 1성 (新)
행운 수치 : 51/120 (4▲)
처음엔 흐뭇한 미소를 지었던 련이었다. 역시 아이가 똑똑하니 더는 설명할 필요 없겠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똑똑해도 너무 똑똑한 것 아닌가? 여기서 갑자기 두전성이를 깨쳤다고?’
련은 얼빠진 얼굴로 모용설호를 쳐다보았지만 모용설호는 지금 자신의 머릿속에 물결치는 것들을 수습하기에 바쁜 모양이었다.
“……!”
그리고 정신을 차린 모용설호가 눈을 크게 떴다. 벅차오른 얼굴이 마치 엄청난 생일 선물이라도 받은 것 같았다.
팔을 번쩍 벌렸다가 황급히 내렸다가 하길 한참 반복하다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르기까지 했다.
“이…… 이게, 어떻게 이게……!”
“우리, 진짜 벗 하기로 한 거다. 약속 잊지 않았지?”
“물론이지. 물론이지만 이런, 어, 좀 더…….”
이런 배움을 얻고 입을 씻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모용설호가 열심히 고개를 흔들었다. 련은 웃으며 손을 휘휘 내젓기만 했다.
“난 몰랐는데 우리 할머니가 너희 할머니랑도 엄청 친하대.”
“어, 알고 있어. 할머님께 말씀 많이 들었다.”
“우리도 두 분의 계보를 잇는 멋진 친구가 되는 거야. 친구끼리는 편들어 주는 거 알지?”
“알아. 하지만 아무리 벗이라도 틀린 말을 하면 알려 주는 게 도리…….”
“행여나 틀린 말을 하면 이미 주위에서 다 틀렸다고 난리칠 텐데, 그때 벗이라도 편을 들어 줘야 하지 않겠어?”
련의 주장에 모용설호는 잠깐 생각하다가 맞는 말이다 싶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언제나 너의 편. 약속할게.”
모용설호가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렇게 모용설호를 보내고 나자 다음 사람이 련을 기다리고 있었다. 련이 쓱 지나쳐 걸어가자, 담벼락 옆에서 목검을 품에 안고 안절부절못하던 아이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게 보였다.
련은 은근한 미소를 감추고 몸을 돌렸다. 아이가 반색했지만, 련이 뭔가 잊은 게 있다는 듯이 다시 스쳐 지나가자 또 어깨가 축 처졌다.
련은 그만 놀리기로 하곤 아이에게 다가갔다.
“서진?”
“아, 아, 안녕하세요…….”
단목비와 동갑인 아이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여기서 뭐 해?”
“어…… 지나…… 지나가는 길이요…….”
서진이 발끝을 살짝 끌었다. 걸어가고 있었다는 시늉을 하려고.
“어디로 가는데?”
눈동자를 팽팽 굴리던 남궁서진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얼른 외쳤다.
“저기, 그, 접객당! 접객당이요!”
련이 접객당으로 돌아가는 길일 테니 함께 가면 될 거라고 생각한 눈치였다.
“그래? 그러면 같이…….”
“여기서 뭐 해?”
“누이! 누이!”
그리고 그러기가 무섭게, 분명 련이 먼저 돌려보냈던 단목성과 단목비가 불쑥 나타났다.
특히 단목비가 곧장 련의 팔을 끌어안으며 무척 경계심 어린 눈으로 남궁서진을 맹렬히 쳐다보았다. 남궁서진이 한껏 기가 죽어서 어깨를 수그렸다.
“서진이하고 같이 접객당 가려고. 서진이도 가는 길이래.”
“그래? 접객당에 무슨 볼일이 있는데?”
단목성이 내려다보며 묻는 말에 남궁서진은 더욱 쪼그라들었다. 이러다 대사를 그르치겠다 싶어진 련은 단목비에게 잡히지 않은 쪽 손으로 서진의 손을 붙잡았다.
“우리 저녁 공부를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서 온 거 아닐까? 이제 같이하기로 했잖아.”
“그, 그게요…… 저도, 해도…… 해도 되나요?”
“하기 싫으면 하지 마!”
단목비가 불쑥 외쳤다. 남궁서진이 함께하지 않았으면 하는 강렬한 욕망이 드러나는 눈빛이었다.
“하기…… 하기 싫은 게 아닌데. 나도 하고 싶은데……. 할 건데…….”
남궁서진이 우물거렸다. 단목비는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련 앞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채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들이 하는 모양새를 가만 보고 있던 단목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곤 그게 련에게는 그다지 해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는지 힘을 풀고 부드러운 얼굴이 되었다.
그렇게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접객당에 도착할 때까지도 남궁서진은 하려던 말을 꺼내지 못하고 우물거리기만 했다.
결국 입술만 달싹거리다가 ‘안녕히 계세요…….’라는 말만 남기고 고개를 푹 숙이는데,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단목비가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하면 되잖아. 할지 말지 헷갈리게 하지 말고.”
괜히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서 누이의 관심을 빼앗긴 게 불만인 모양이었다.
단목비의 공격적인 언사에 머뭇거리던 남궁서진이 간절한 표정으로 련을 바라보았다.
여럿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할 얘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간파한 련은 잠시 단목비와 단목성을 떼어 놓곤 남궁서진을 이끌고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그제야 남궁서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형님이…… 정말 저랑 같이 공부하겠다고 하셨어요? 저도 같이해도 된대요?”
남궁서진은 불안한 듯도 하고 간절한 듯도 한 얼굴이었다. 련은 그 눈과 마주하고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럼. 서건 공자가 먼저 같이하자고 했는걸. 걱정하지 마.”
련의 말에 남궁서진은 긴장이 풀려 흐물흐물한 표정을 짓다가, 그제야 조금 부끄러워진 것인지 배시시 웃었다.
멀찍이서 초조하게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단목비는 두 사람의 대화가 마무리된 걸 귀신같이 눈치채곤 조르르 달려와서는 남궁서진과 티격태격했다.
“너 왜 귀여운 척해?”
“아, 아닌데……. 안 했는데.”
“네가 그래도 련 누이는 내 누이거든.”
“내, 내 누이라고 안 했어…….”
“알면 됐어. 잘 외워 둬.”
“알았어…….”
아이 둘이 소곤거리는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련은 단목비가 보인 의외의 공격성과 독점욕에 조금 놀랐다.
그 기색을 알아챈 단목성이 의젓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원래 하나뿐인 가족을 뺏길 것 같으면 다 저렇게 되는 거야.”
“그…… 그런가?”
단목성이 의젓하게 속삭이는 말에 련은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단목성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련을 보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너도 혼인은 50년 뒤에 해. 알았지.”
“어? 50년 뒤에?”
50년이나? 련이 눈을 크게 떴다. 혼인에 대해서는 예전에도 지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응, 10년 뒤는 너무 빠르고 20년 뒤도 좀 그래.”
“성아 너는?”
“나는 25년 뒤에.”
“왜…… 왜 25년 뒤에 하는데?”
“그때쯤에는 가문에 쓸 만한 사람을 들여와야 하지 않을까.”
‘대체 25년 뒤에는 뭘 하고 있으려고?’
“나는 하지 말고 너만 해?”
“내가 조금 더 언니니까, 너보다 먼저 해 보고 후기 알려 줄게.”
“아…… 알았어.”
같은 사람하고 결혼하진 않을 텐데 후기가 소용이 있을까 싶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마음 써 주는 성의 말에 부정은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성이 만족스러운 듯 슬쩍 웃었다가 정색하고는 두 아이를 떼어 놓았다.
“저녁 공부를 하려면 저녁밥부터 잘 먹어야 해. 알겠니?”
“네에에!”
“네!”
단목비가 냉큼 대답하고는 련에게로 조르르 달려가 그녀의 손을 잡고 저녁 먹으러 가자고 보챘다.
각자의 가족과 식사를 해야 하니, 남궁서진이 서글픈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쓸쓸하게 등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