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14화
“어, 서진아, 음, 같이 먹을래?”
“아니에요, 어른들이 기다리실 거예요…….”
남궁서진은 련의 제안만으로도 기쁘다는 듯이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고는 꾸벅 인사한 뒤에 돌아갔다.
련이 기어코 남궁서진에게 식사 제안을 했던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던 단목비였으나, 남궁서진이 돌아가자 그제서야 웃음을 비쳤다.
* * *
“이게 뭐야? 흙 묻어 있잖아.”
“아, 그게, 그러니까…….”
련이 기어코 남궁세가 형제들까지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저녁 자율 수련이 접어들자 다소 숫기가 없던 아이들도 같이 수련하자고 찾아왔다.
이름 있는 세가 아이들이 모두 하고 있으니, 다른 집안에서도 그 자율 수련에 함께하라며 떠민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서 한 아이가 쭈뼛대며 선물이랍시고 바구니를 하나 가져왔다.
악소형은 그 바구니를 뒤적거리다가 그 안에 든 덩어리 하나를 내팽개친 차였다.
“고구마인데, 이거 구워…… 구워 먹으면 맛있는 거야. 아니면 쪄먹거나…….”
기가 죽은 아이가 소심하게 중얼거리듯 대꾸하는 말에 악소형이 투덜거렸다.
“그걸 지금 가져와서 뭘 어떡하라고?”
그때 그 모습을 가만 지켜보고 있던 단목성이 불쑥 끼어들었다.
“구워 먹는 거면, 앞뜰에 불 피워서 구워 먹으면 되지.”
“아, 아니…… 그게…….”
단목현요를 쏙 빼닮아 눈에 띄게 화려한 얼굴의 단목성이 여느 때와 같이 차갑게 말하면, 거기서 담담하게 대꾸할 만한 또래는 거의 없었다.
고구마 바구니를 가져온 아이도 악소형도 움찔해서는 어깨를 움츠렸다.
“너! 가서 여기에 모닥불을 피우도록 해.”
단목성이 근처에 서 있던 하인 하나를 지목하자 하인이 어쩔 줄 모르다가 남궁서건의 끄덕임을 보고서는 얼른 장작과 불씨를 가져왔다.
‘성아도 은근히 마음이 약하다니까.’
무리에 끼고 싶어서 뭐라도 챙겨 온 아이가 주눅이 들어 있으니 그걸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저런 게 분명했다.
“좋아, 모처럼 고구마니까 맛있게 구워 먹자. 우리가 가져온 꿀단지가 하나 있잖아.”
꿀을 챙겨 온 건 그게 약재로 쓰이기 때문이었다. 단목천기는 련이 건강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련은 노인과 함께하는 여행길에는 뭐라도 하나 더 챙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걸 써도 돼?”
단목성이 조심스럽게 속삭이듯 물었다. 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쓰고 다시 사 두면 되니까. 수유(酥油)까지 있으면 정말 좋겠지만…….”
수유는 우유를 오랫동안 저어서 유지방만 뭉쳐 만든 것이다.
약재로도 식자재로도 쓰이는데 고소한 향과 깊은 맛이 일품이었다. 그러나 만드는 데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 이 역시 고가였다.
“수유? 약으로도 쓰는 것 말이지?”
그 모양새를 잠자코 보고 있던 남궁서건이 끼어들었다. 련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궁서건이 하인에게 손짓했다. 가져오란 뜻이었다.
“진짜? 괜찮아?”
련이 놀라서 묻자 남궁서건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 뭐 얼마나 한다고. 같이 먹으면 맛있는 거라며?”
그렇게 때아닌 고구마 직화구이가 시작되었다.
련은 그 모닥불 위에 얇은 철판을 올리고, 물에 씻은 고구마 여러 덩이를 올려놓고 불에 굽기 시작했다.
모닥불에 가까이 붙어선 아이들의 얼굴이 열기에 발갛게 달아올랐다.
한창 움직이고 나면 흙도 먹을 수 있는 아이들이 밤중에 모여서 고구마가 익어 가는 걸 보고만 있으려니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작물이 불에 닿으며 익어 가는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모락모락 퍼졌다.
“이런 건 처음 먹어 봐…….”
“그런데 이거 흙에서 나온 거 아니야? 진짜 먹어도 되는 거야?”
악소형의 말에 모용설호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너 고구마 먹어 본 적 없어?”
“다, 당연히 있어! 있지!”
“그런데 고구마 어떻게 캐는 건지 몰라?”
악소형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에게 음식은 부엌에서 나오는 것이지, 어떻게 탄생하는지는 알 바 아니었고 여태 알지도 못한 게 사실이었다.
“먹기 싫으면 넌 먹지 마.”
“아니 누가 안 먹는대!”
악소형이 빽 소리쳤다. 그사이에 금종하는 련의 곁에 딱 붙어서 련이 하는 걸 따라 하고 있었다.
“고구마를 가른 틈에 이 수유(酥油)랑 꿀 섞은 걸 넣는 거야?”
“어, 그렇긴 한데…… 음, 이거 정말 다 써도 돼?”
련이 금종하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다가 남궁서건을 흘끗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남궁서건이 근사한 미소를 지었다.
“당연하지. 걱정하지 마. 부족하면 더 가져다줄까?”
‘에라, 모르겠다…….’
며칠 함께 있으면서 련은 어렵지 않게 남궁서건의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가 왜 처음에 그렇게 살갑게 대했는지, 왜 돌연 냉랭해졌는지, 왜 지금은 또 다정한 듯하면서도 거리를 두는 것처럼 구는지.
남궁서건은 련이 자신과 비슷한 처지일 거라고 생각했던 거였다.
없는 자질을 아득바득 긁어모아서 후계자 행세를 하며, 아래로는 재능 넘치는 동생과 사촌들을 견제하고 위로는 어른들의 기대에 짓눌려 살아가는 자신과 비슷할 거라고…….
그런데 막상 마주해 보니 련은 사촌이나 동생은 물론이고 방계와도 사이가 살갑지 않은가.
그걸 확인하곤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차가워졌다가, 이제는 그냥 손님이라고 여기기로 한 것이다.
‘어휴. 사춘기인가?’
그가 련의 신체 나이보다 고작 몇 살 더 많으니까 그럴 만도 하다.
“우왓! 불조심해! 우린 아직 수화불침(水火不侵) 같은 거 아니라고!”
“어? 어어…….”
반쯤 구워진 고구마를 가져오려고 모닥불을 헤집던 련은 튀어 오른 불티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는데, 그사이에 금종하가 곁에서 더 정색하며 외쳤다.
‘방금 뭐였지?’
련은 자신을 스쳐 지나갔던 불티를 다시 떠올렸다. 자신의 손끝을 마치 피해 가는 것처럼 기묘하게 움직이던 불티…….
“그럼 이 수유 넣은 고구마는 이대로 얼마나 더 구우면 돼?”
그러나 팽주란의 질문에, 련은 상념에서 깨어나 고구마를 다시 불판으로 올리며 대답했다.
“이제 일각쯤 더?”
“일각이나?”
“참을 줄 알아야 진정한 무인이 될 수 있어.”
모용설호가 엄하게 대답했다. 악소형은 넌덜머리 난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고구마를 보며 꾹 참았다.
겉은 질길 정도로 바삭하게 굽고, 속은 수유가 스며들어 촉촉해진 고구마를 반으로 가르자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와 함께 아직 찬기가 남아 있는 봄 밤공기 사이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입 안을 데 가며 허겁지겁 먹기 바쁜 와중에 열기로 달아오른 아이들의 뺨 위로 구운 고구마 껍질에서 묻은 검댕이 이리저리 얼룩졌다.
“흐업, 허어, 뜨거, 뜨거워~!”
“맛있어…….”
“이거 엄청 맛있어!”
심지어 련에게 심통 부리는 것처럼 애매하게 친절하게 굴던 남궁서건과 항상 주눅 들어 있던 남궁서진도 나란히 서서 입을 호호 불며 고구마 탐닉에 여념이 없었다.
“흐엇, 뜨거워어어…….”
심지어 남궁서진이 한 입 잘못 베어 먹고는 혀를 데 울상을 짓는 순간, 남궁서건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동생을 돌아보기까지 했다.
그런 자신에게 흠칫 놀라서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체 고개를 돌리긴 했지만.
“서진아, 많이 뜨거워? 천천히 먹어야지. 여기 차갑게 한 우유 조금 먹자.”
그사이에 련이 남궁서진을 향해 다정하게 말하며 달래 주는 걸, 남궁서건이 복잡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때 조금 떨어져 있던 단목비가 조르르 달려왔다.
“누이, 누이! 나도 아 뜨거요. 뜨거워요오.”
누이 말이라면 항상 착실하게 듣는 단목비는 이번에도 고구마를 천천히 식혀 먹고 있었지만, 누이의 관심을 끄는 데도 착실한 만큼 얼른 한 입 베어 물곤 달려온 차다.
련이 놀라서 단목비에게로 눈을 돌린 사이에 남궁서진이 조금 서운한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남궁서건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하인을 불러다 찬 우유 한 잔을 가져오라고 명했다.
남궁서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형을 흘끗거리다가 울먹거리면서 그가 쥐여 준 잔을 홀짝거렸다.
남궁서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련과 눈을 마주하고는 빠르게 눈을 피했다.
“동생이랑 사이좋네.”
남궁서건의 등이 움찔했다. 련은 고구마를 구워 먹고 남은 수유를 챙겨 그에게 건네주러 온 차였다.
“……그렇게…… 좋진 않아.”
그가 ‘동생이니까.’라고 대답할 줄 알았기 때문에, 련은 조금 놀라서 남궁서건을 쳐다보았다.
모닥불에서 멀리 떨어진 음지에 선 남궁서건은 다소 어두운 얼굴로 련을 흘끗 쳐다보곤 말했다.
“넌 좋겠네.”
“내가 뭘?”
“재능도 있고, 동생하고도 사이가 좋아서 걱정할 게 없잖아.”
‘여기서 갑자기? 수련회의 기적 같은 건가?’
련은 티 나지 않게 모닥불과 남궁서건을 번갈아 흘끗거렸다.
한밤중에 불을 피워 놓으면, 사람이 감상적으로 변하는 것이 만고불변의 진리인 모양이었다.
“넌 이대로 소가주 되고, 나중엔 가주 되고, 뭐 그러겠다.”
련은 뺨을 매만졌다. 줄곧 다정하고 어른스러운 사람인 양 굴던 남궁서건이었는데, 련에겐 그러길 관두기로 한 건지 이죽거리는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