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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16)화 (116/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16화

무림에서 내공이 의미하는 바는 단지 몸속에 쌓인 기 정도로 폄하할 수 없다.

인간의 젊음, 육체 능력이 절정에 달하는 때는 아주 잠시뿐. 채 서른을 넘기기도 어렵다.

그러나 무림에서 ‘고수’라고 이름 붙은 자들은 하나같이 귀밑머리가 하얘진 지 오래된 이들이고, 젊은이들은 원숙해지기 전까지 단지 ‘후기지수’라 불린다.

‘후배들 중에서 빼어난 자들’이라고만 불리는 것이다. 그 찬란한 젊음으로도 결코 한 걸음 앞서 나간 선배들을 꺾지 못하여.

그것은 무공의 성취와 우열이 단지 육신의 강함, 즉 빠른 반사신경이나 강한 힘, 기민한 판단력만으로는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내공은 노쇠해져 가는 육신의 시간을 거꾸로 붙들어 주고, 인간의 육신으로는 낼 수 없는 힘을 행사하며, 그와 동시에 지평 너머를 볼 수 있게 해 준다.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시대를 압도하는 강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모용취려가 묻는 것도 그것이었다.

련이 스스로에게 미래가 없다는 걸 알기에 타인에게 관대하고, 자신의 명석함을 베풀어 주는 것이냐고.

처음에는 몹시 놀랐던 련이었으나 이윽고 빙긋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음, 제가 내공을 쌓지 못한다는 건 사실이에요. 다른 아이들에게는 비밀로 해 주세요. 다들 마음이 약하거든요…….”

련은 자신의 상태를 알면, 가령 단목완 같은 경우엔 먹은 흑곡단을 다 토하려고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퍼뜩했다.

“하지만 그래서…… 설호 공자나 다른 사람들에게 뭔가 알려 준 건 아니에요.”

거기까지 대답한 련은 약간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긁적이며 일부러 다소 건방지게 대답했다.

“굳이 따지자면 그거 맞아요. 알려줘도, 딱히…….”

그러면서 어깨를 으쓱한다. 우쭐한 체하려는 것이었으나 내심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다.

모용취려는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나직하게 웃었다.

“내공 한 줌 없이 그들과 경쟁해도 어렵지 않으리라 여겼다는 게야?”

“방법이 있겠죠. 산송장이었다가 일어나기도 했는데 까짓 내공이야!”

“끝내 방법을 못 찾으면?”

“어르신은 왜 강해지려고 하셨어요?”

“뭐?”

“무공을 익히고 강해지려고 하신 이유가 뭔가요?”

“악을 섬멸하고 세가와 벗을 지킬 힘을 가지기 위해서지.”

“저도 비슷해요.”

악을 섬멸하고, 가문과 친구들을 지킬 힘.

“하지만 악을 섬멸하려면 혼자만의 힘으론 안 된다는 걸…… 저희 할아버지께서도 보여 주셨잖아요.”

혼자 힘으로 되었다면 흑천련과 마천교까지 한데 모은 무림맹은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힘을 다 모았는데도 불구하고 혈라곡의 씨를 말리는 데는 실패했지 않은가.

련은 천비궁(天妃宮)에서 들었던 말을 상기했다.

‘피의 그림자는 피할 수 없다…….’

미래는 그대로 다가올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시시각각.

“천하제일인도 혼자서는 못한 일이잖아요. 다 같이 해야죠.”

“하면 너의 세가와 벗은 어찌 지킬 참이냐?”

“저만의 세가가 아니에요. 세가 사람들이 다 같이 힘을 모으고, 벗들도 제가 항상 지켜 줘야 하는 나약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네 힘이 미약하면 세가의 사람들이 너를 따르겠느냐?”

“세가 사람들은 짐승이 아니에요.”

“……!”

“아니, 짐승도 힘으로 굴복시켜서 따르게 할 수는 없잖아요.”

모용취려는 깊은 눈으로 가만히 련을 내려다보았다. 련은 그녀와 시선을 맞추다가 시선을 피하듯 눈동자를 굴렸다.

“그리고 내공이 있어야 보인다는 것도 뭐…… 제 눈엔 그냥 보이기도 하고…….”

“뭐라?”

건방진 소리를 들었다며 혼쭐을 내줘야 할 것 같은 말이었으나 모용취려는 그럴 수가 없었다.

단목련의 발화 의도가 그저 ‘저는 괜찮아요.’라는 뜻임을 알아서가 아니었다.

이 살벌한 무림에서 오래 살아남은 사람들은 제각기 지닌 빼어난 무공 외에도 감이 있기 마련이다.

‘진실이로구나. 정말로 보이는 게야.’

“……그런 네 눈에 우리 모두가…… 네 또래의 모두가 성취를 끌어올리고 힘을 모아야 할 만한 일이 있을 것 같더냐?”

모용취려는 지금 ‘혈라곡이 다시 창궐할 거라 생각하느냐?’라고 묻고 있었다.

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부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 허물어질 거라는 이야기를 그리 쉽게 하는 것이더냐?”

“제 할아버지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그때 그곳의 사람들을 구한 거예요.”

잠깐 침묵했던 모용취려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지, 그래. 네 말이 옳다. 그의 업적은 그것이지.”

악은 언제나 새로이 솟아나지만 사람을 구한 일은 결코 허물어지지 않는다.

련은 모용취려가 한참 웃는 동안 괜히 심통 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부의 업적이 폄하될 뻔한 손녀라면 응당 지어야 하는 표정이다.

모용취려는 한참 더 웃고는 말했다.

“너와 얘기를 나누고자 했던 건, 당연하지만 무월검의 업적에 입을 대려고 한 것이 아니다.”

어느새 두 사람은 아주 조용하고 어둑한 곳에 다다랐다. 련은 여기가 모용세가 사람들의 거처와 가깝다는 걸 눈치챘다.

“받은 것이 있으면 보답을 하는 것이 응당 옳은 일이지.”

“받은…… 거요?”

“……모용세가의 후계를 도와준 게 네게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구나? 그리도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할 줄이야.”

“그게, 설호 공자와는 벗이 되기로 했으니까요.”

그건 그걸로 끌이었다고 간단하게 대답하는 어린 소녀를, 모용취려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네가 그 애의 벗이 되어 준다는 건 충분히 기쁜 일이지만, 이 모용세가가 그렇게 간단하게 입을 씻을 수는 없는 일이다.”

모용취려는 그렇게 말하며 달빛 아래에서 소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두전성이(斗轉星移)에 대해 알고 있느냐?”

련이 어떻게 말할까 고민하는 사이 모용취려가 말을 이었다.

“상대의 무공을 되받아쳐 반격하는 우리 모용세가의 절기이지. 설호가 설명을 듣고도 한 발을 내딛지 못해 지지부진했던 것이기도 하고.”

모용설호에게 도움이 된 부분이 바로 그것이었다.

“네가 의혈도와 상대하는 모습을 보았다. 너는 벌써 너보다 강한 힘을 흘려내는 법에 대해 잘 알고 있더구나. 받아치는 법도 알고 있겠지만 그러지 않은 건, 그의 힘이 지나치게 강해서였겠지. 네가 감당할 수 없다는 걸 알고.”

모용취려는 담담하게 말하며 조용히 검을 빼 들었다.

달이 높이 뜬 밤, 봄기운이 스치기 시작하여 하늘거리는 꽃잎들이 허공을 춤추는 시기였다.

“네가 내공을 어찌할 수 있게 될 때까지는 이 배움이 미약하게나마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무엇을……?”

련이 되물었으나 모용취려는 말없이 집중하기 시작했다. 련의 눈동자 위에서 별빛이 떠올랐다.

아주 미세한 움직임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마지막까지 피어 있던 매화의 꽃잎 하나가 파르르 날리며 모용취려의 검 끝에 닿았다가 왔던 방향 그대로 다시 되돌아 날아갔다.

순간 련은 눈동자를 크게 떴다.

그와 동시에 검을 다시 집어넣은 모용취려가 련의 얼굴을 보고 기가 막힌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알겠느냐?”

남들이 봤으면 무슨 장난이라도 치는 거냐고 반문했을 터였다. 겉으로 보기에 모용취려는 아무 움직임 없이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러나 한참 동안 홀린 듯 서 있던 련은, 정신을 차리고서는 도리어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모용취려를 바라보았다.

“어…… 그런데 이걸 저한테 보여 주셔도 괜찮은 거예요?”

모용취려는 혀를 찼다.

‘보통은 이런 걸 한번 본다고 해도 아무것도 알지 못하거늘!’

“어차피 네 앞에서는 감출 수 있는 게 없는 듯하니 먼저 보여 주고 생색이라도 내는 게 낫겠구나.”

모용취려는 그렇게 말하다가 돌연 불신으로 가득 찬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알겠느냐?”

련은 고개를 끄덕끄덕 흔들었다.

“모용세가에서 두전성이 가르치실 때 훈련하는 동작인가요?”

모용취려는 봄의 밤공기에 자신의 솜털이 곤두섰다는 걸 인지했다.

“……그래, 당연한 말이지만 네가 설호를 도와준 은혜가 아무리 깊다 한들 세가의 절기를 알려 줄 수는 없지만…….”

절기를 가르칠 때 훈련하는 동작도 남에게는 쉽사리 알려 줄 수 없는 것이긴 했다.

그래도 알려 준 건 설호의 배움이 정말 작지 않은 일이기 때문인 것이 첫 번째, 단목련이 친우의 장손인 것이 두 번째, 그리고 련에게 우정과 신의에는 응당 보답이 따른다는 얘길 해 주고 싶었던 까닭이 세 번째였다.

“……방금 본 것을 한번, 해 볼 수 있겠느냐?”

“음, 어르신의 공격을 받아치는 게 아니라 꽃잎 정도라면…….”

련이 작게 중얼거리며 허리춤에서 달랑거리는 목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곤 바람이 불어올 때를 잠시 기다렸다.

멀리서부터 꽃향기와 함께 얇고 가느다란 꽃잎이 휘몰아치듯 날아들었다.

그러다 그 바람이 아주 잠시 잦아든 순간, 련의 팔과 다리 그리고 코앞까지 들어 올린 목검이 기묘하게 움직여 꽃잎 세 개와 스치듯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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