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18화
“그럴 거면 처음부터 훔칠 필요가 없었던 거 아니야?”
“도벽은 이성으론 해결이 안 되는 부분이니까…….”
“그나저나 용봉지회를 가기 싫다고 안 갈 수나 있나?”
청년들 중 한 명이 툴툴거렸다. 이름난 세가의 자손으로 산다는 건, 그런 자리에 불참할 자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도 재미있겠다. 서쪽에서도 오겠네?”
경항운련에 참석하는 세가들은 동쪽에 치우쳐 있다 보니, 묘하게 서쪽 세가들에 대한 경쟁심이 있었다.
“제갈세가가 나오면 한 방 먹여 주는 거야, 경무!”
시종일관 시큰둥한 표정으로 찻잔만 홀짝이고 있던 남궁경무가 화들짝 놀랐다.
“내, 내가? 제갈세가를……?”
“그래! 걔네들은 항상 기문진법으론 자길 이길 사람이 없다고 말하잖아.”
남궁경무는 ‘그게 사실이니까.’라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놓지는 않았다.
이런 무리에서는 자기객관화가 패기없음, 나약함, 어리석음으로 치환되었다.
할 말이 여의치 않은 남궁경무가 찻잔만 만지작거릴 때였다.
“그보다 경무, 나 조카들 줄 선물을 좀 사야겠는데. 양주 시내 좀 안내해 주겠어?”
누군가 호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에 장난기 있는 표정이 인상적인 청년, 단목현우였다.
* * *
입을 다물고 가만히 서 있는 단목현요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마치 상아를 잘 깎아 만든 인형 같았다.
그러다 가족들과 마주한 순간에는 그림 속의 나무에서 그림 밖으로 잎사귀가 돋아나는 듯이 한순간에 생기가 번졌다.
“아니, 저 녀석이 애들하고 뭘 하고 있담. 잠시만요.”
경항운련이 아이들의 경쟁과 육성을 위한 모임이라곤 해도, 각 지방에서 주름잡는 어른들이 모여서 할 일은 따로 있었다.
서로의 이권을 어디까지 뻗어 나갈 수 있을지, 무림맹에서 어디까지 함께 협력하고 어디까지 견제할지, 아이들을 보며 상대의 장래를 겨누어 보는 것.
다만 이번 경항운련은 오랜만에 열린 것이기도 했거니와, 지금까지 참석하지 않았던 모용세가라는 거성의 등장과 단목천기의 부활 덕분에 무척 부드럽게 풀린 차였다.
다만 그들이 앞으로 다룰 안건은 부드럽지 않았지만.
“현우야, 애들하고 뭘 하고 있니?”
“누이, 저 양주 시내 구경 가려고요. 이 친구랑 같이요. 그러다가 애들을 만나서요.”
단목현우는 자신을 슬며시 노려보는 누이의 시선을 피했다.
여기가 단목세가였으면 ‘네 조카들은 공부에 수련에 예습 복습 다 하는데 너는 놀러 나가니!’라며 꾸중했을 텐데, 남궁세가라 눈짓 한 번으로 끝날 수 있었다.
“옷을 그리 입고 나가려고 그래? 돌아올 땐 쌀쌀하지 않겠어?”
“안 추워요.”
단목현우는 말을 했다가 슬쩍 눈치를 보았다. 단목현요의 입에서 ‘아이고 현우 공자, 벌써 한서불침의 경지에 올랐나 보죠?’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것도 여기가 남궁세가라서다.
‘남궁세가에서 평생 살자고 해?’
“크흠. 피풍의 하나 챙겨 갈게요.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요. 그렇지, 경무?”
“어? 어어…….”
남궁경무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에, 단목현우는 ‘이 숙부가 선물 사 올게!’라는 말만 남기고서 남궁경무를 이끌고 줄행랑을 쳤다.
“어휴, 저 장난꾸러기는 나이를 먹어도 저래요.”
단목현요는 혀를 몇 번 차고는 이제 자리에 남은 아이들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수업을 들으러 가는 길이니?”
“네-!”
단목세가 아이들이 나란히 대답했다.
“그래, 그래. 열심히 해야 한다. 너희들 모두가 단목세가의 대들보니까.”
아이들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어 주고 이름을 불러 주며 덕담을 늘어놓던 단목현요는, 뒤늦게 하인 하나를 발견하곤 내심 움찔했다.
‘이름이 뭐랬더라? 무슨…… 륜이랬나?’
단목련이 아끼는 하인이 하나 있다더니 바로 그 애였다.
기억에도 흐릿하고 눈에 띄지 않았는데, 막상 마주하자 그 생김새에 놀랐다.
아직 어린데도 뚜렷한 콧대며 커다란 눈하며 왼쪽 눈 아래의 눈물점까지, 귀티가 흐르는 그 얼굴을 보고 있자면 하인이 아니라 어느 명가의 자손이라 할 법했다.
하지만 단목현요는 그런 것들보다도 그 하인 아이의 눈빛에 더 놀랐다.
패배를 물리쳐 온 사람들이 가지는 눈동자. 자신이 이길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눈빛.
아버지와 오라비에게서밖에 보지 못했던 눈빛이었다.
‘아니, 아니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단목현요는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조카의 하인을 보고서 할 만한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단목현요는 괜히 꺼림칙한 마음에 다른 아이들 대하듯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는 못하고, 어깨만 톡톡 두드려 주었다.
“어머니는 어디 가세요?”
“고모는 어디 가세요?”
단목성의 질문에 단목비가 따라 물었다. 단목현요가 얼버무렸다.
“세가 방비 방식에 대해서 다른 세가들은 어찌하고 있는지 서로들 얘기를 나누려 한단다. 너희들도 나중에는 다 배우게 될 거야.”
“……지금요?”
단목현요는 련의 질문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마치 련이 다 알고 질문하는 것 같아서였다.
“어…… 그래. 다 같이 모였을 때 한 번씩 얘기를 해 보면 좋지 않겠니.”
아무리 그들이 같은 무림맹 중에서도 백도맹 소속이었고 지금은 경항운련을 함께한다고 해도, 집안 방비와 같이 내밀한 걸 떠들 리 없건만 단목현요는 적당히 말을 돌리곤 아이들을 내보냈다.
“아이들이 저리 쾌활하고 명석하니 기쁘시겠습니다.”
“아이가 많으니 기쁜 맘이 반, 사고 치진 않을까 걱정되는 마음이 반이네요.”
단목현요가 얼른 웃으며 대꾸했다. 소소한 대화가 오가던 것도 잠시, 이윽고 어른들의 안색이 흐려졌다. 가장 안쪽에 있던 남궁경해가 안쪽을 향해 고갯짓했다.
그들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하늘에는 슬금슬금 먹구름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 * *
오늘 수업은 남궁환의 차례였는데, 놀랍게도 그가 가져온 것은 검이나 도, 창이나 활이 아니라 서책이었다. 그것도 서너 권이나 되었다.
“어어……?”
아이들이 얼떨떨한 표정만 짓고 있는데도 남궁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늘은 무공의 역사를 빠르게 되짚어 보려 한다.”
“무공의…… 역사요?”
무림의 역사도 아니고 무공의 역사라는 말에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 무공의 변천사에도 그 흐름이 있고 유행이란 것이 있다. 그 속을 살아가는 우리는 잘 모를 뿐. 가령 지금은 상대의 공격을 읽어내고 허를 찔러 반격하는 쾌속을 제일로 쳐주지만, 십 년 전까지는 공격의 방향을 읽어내는 시야보다는 강한 내공이 실린 공격을 알아채는 기감을 훨씬 더 중요시했다.”
련은 그 이유를 알았다. 10년 전까지라고 하면, 혈라곡을 상대하고 잔당을 처리하던 시절이다.
혈라곡의 기이한 특수성이 거기에 있었다. 어떤 경로로 얻었는지 모를 강력한 내공과 그에 미치지 못하는 미숙한 공격.
“그리고 그전에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투로를 숭상했지. 상대를 덫으로 밀어 넣는 세련된 수법과 정교한 기교, 상대를 상하게 하되 잔혹하지 않은 것을 최고로 쳤다. 왜 그렇게 된 줄 아느냐?”
아이들은 고요했다. 태어나지도 않았을 10년 전 이야기만 해도 전혀 알지 못하는데 그보다 더 이전 이야기를 어찌 안단 말인가?
그때 누가 번쩍 손을 들었고, 그와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작은 소년에게로 쏠렸다. 활짝 웃는 얼굴의 단목비였다.
“응? 비야, 너는 알겠느냐?”
단목비가 씩씩하게 외쳤다.
“저희 누이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단목비에게 모였던 시선이 그대로 련에게로 향했다.
련은 뜨악한 얼굴로 단목비를 쳐다보았으나 ‘우리 누이는 천재예요.’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동생의 얼굴을 보자 모진 말이 나오지 않았다.
“련아, 너는 알겠느냐?”
련은 울상을 짓지 않기 위해 애쓰며 천천히 생각을 다듬었다.
‘섬세하고 기교적인 면이 유행했다면…… 그전엔 그게 아니라 다른 게 유행했겠지. 섬세하지 않은 것. 기교적이지 않은 것. 잔혹한 것에 지쳐서 저런 유행이 나온 거겠지.’
“그 이전에는 패도적인 수법이…… 인기가 있었을까요? 가령 한 합에 상대를 날려 버릴 만한 압도적인 힘?”
“……!”
남궁환이 눈을 크게 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크흠, 그렇다. 상대의 무기까지 부술 수 있는 방법이라면 더욱 좋았지. 패왕, 패도, 패검, 이런 별호들이 무림에 퍼져 나갔다. 이런 식으로 공격의 방법에도 흥망성쇠가 있느니라. 그러나.”
남궁환이 갑자기 말을 멈추었기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남궁환은 잠깐 침묵하며 주위를 환기한 다음 말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
남궁환은 쌓아 둔 서책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행동이 역사를 이룩하나 기록이 역사를 지탱한다.”
남궁환은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련은 그런 남궁환에게서 조금 놀라운 점을 발견했다.
그의 오른손 중지에 박인 굳은살이었다. 검을 쥐거나 박투술을 익히는 것으로는 생기지 않는 굳은살.
글 쓰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에게서만 보이는 흔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