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19화
“그리고 아주 오래전에 무공의 여러 가지 면면을 꿰뚫어 본 선생들이 그것을 글로 남겼지. 가장 먼저 오 선생이 남긴 글을 보면, 무공을 익히고 수행하는 데 있어서 눈이 팔 할이라고 말하고 있다. 판본에 따라서는 칠 할이라는 이야기도 있다만 요는 눈이 핵심이라는 것이다.”
남궁환은 그렇게 말하며 검지와 중지로 자신의 두 눈을 가리켰다.
“상대와 마주해 있을 때는 그 공격을 꿰뚫어 봐야 하고, 스승에게 배울 때는 무얼 가르치는지 잘 알아야 하지. 자, 그럼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무인이 될 수 없나?”
아이들이 머뭇거렸다. 당연히 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남궁환의 질문이 그런 뜻이 아닌 듯해서였다.
“그럼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도 무인이 될 수 있나?”
아이들이 또 머뭇거리자 남궁환이 탁자를 쾅 소리 나게 내리쳤다.
“당연히 될 수 있지!”
“앞이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요?”
소년 하나가 조심스럽게 반문했다. 남궁환은 그런 아이를 꾸중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본다’는 것은 단순히 시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안다’, ‘느낀다’는 말이지.”
눈이 안 보여도 기척으로 알 수 있다면, 미세한 기의 흐름을 느끼고 공격을 방어하고 상대를 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그 모든 걸 떠나서 그 누구도 상대를 무인이다, 아니다를 멋대로 재단할 수는 없다.”
“네?”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 모두 이름있는 세가의 자식이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무가의 자부심을 차고 넘치게 가지고 있었다.
자신은 밭 가는 무지렁이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고 또 그것을 입 밖으로 말할 수 있는.
“너희가 말 한마디로 무림인이 아니라고 하면, 그자가 무림인이 아니게 되나? 아니면 그자가 너희에게 스스로 무림인임을 증명이라도 해야 하나? 자신이 무보를 몇 권이나 읽었는지, 어떤 스승에게 사사했으며 얼마나 열심히 무공을 연마했는지 미주알고주알 말하란 말이냐?”
“하, 하지만…….”
“그걸 판단하고 그렇다 아니다 말할 자격을 누가 주나? 무림맹주에게도, 검신이니 투왕이니 불렸던 자들에게도 그럴 자격은 없다!”
버럭 외친 남궁환은 다소 움츠러든 아이들을 보며 내심 혀를 찼다.
단목천기와 함께 혈라곡을 물리친 지, 엄밀히 말하면 잠시 그들의 불길을 꺾어 놓은 지 수십 년이 지났다.
최근 무림맹의 은밀한 정보 기관들은 그들의 불씨가 완전히 꺼지지 않았음을 속속들이 밝혀내고 있었다.
이 아이들은 곧 자라나 다시 혈라곡과 상대하게 될 것이다. 백도맹뿐만이 아니라 마천교, 흑천련과도 손을 잡고.
자신들이 싸울 때 가장 힘들었던 건 미쳐서 달려드는 혈라곡 놈들이었고, 두 번째로 힘들었던 건 끝없이 진정한 무인임을 증명하길 요구한 자들이었다.
무와 협을 아는 진정한 무인임을, 그래서 서로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맹세하길 바란 것이다.
그러나 맹세 한 번으로 그 의심을 모두 불식시킬 수 있었던가? 오히려 맹세가 더욱 덧없어질 뿐이었다.
‘의심암귀(疑心暗鬼)라는 말이 왜 있는지 다 아는 사람들이.’
그들이 왜 그러는지 알고는 있다. 그 역시 이해하기도 했다. 한때 그에 동참하기도 했다.
물과 기름처럼, 어쩌면 물과 불처럼 오랫동안 어울리지 않던 자들이 한 곳에 모여서 섞이는 과정에 어찌 불화가 없으랴, 어찌 무조건적으로 믿을 수 있으랴.
그러나 그 불화가 스스로 상대를 재단할 수 있다는 오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게 문제를 걷잡을 수 없게 했다.
‘당장 지금도 불온한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는데.’
양주에 혈라곡의 잔당들로 보이는 놈들이 나타났다는 첩보를 입수하고서 조용히 방비를 강화한 참이었다.
지금 당장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세가 안에서도 수뇌부들과 경항운련에 참가한 가문들의 대표 몇몇들 뿐이지만.
보장된 평화의 시기는 끝을 보이고, 남은 것은 피와 불화 그리고 싸움뿐이다. 그중에서 같은 편끼리의 불화만이라도 종식시킬 수 있다면.
앞선 세대의 과오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은 남궁환이 무슨 뜻에서 하는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나마 이해를 하는 듯 보이는 소수의 아이들 중 반은 그다지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고, 남은 반은…….
‘으, 으음?’
남궁환은 조금 당황했다. 단목련이 거의 울 것처럼 벅찬 얼굴로, ‘바로 그거예요!’라고 적힌 눈을 하고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작 자신의 손자들은 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있건만.
호응해 주는 아이가 있으니 그 역시 갑자기 벅차며 어떻게든 그 믿음에 부응해 주고자 하는 마음이 솟아올랐다.
‘그럼 오늘 한 권만 가지고 수업을 하기도 좀 그렇지?’
남직례와 절강이 다른 곳들보다야 서로 가깝다곤 해도 이웃집은 아니다.
이번 경항운련이 끝나고 다시 만날 시기를 셈해 보면 가장 빨리 만나도 내년은 되어야 할 텐데, 그럼 오늘 할 수 있는 한 바짝 알려 주는 게 낫지 않겠는가?
갑자기 남궁환의 눈빛이 번뜩 빛났다. 아이들이 흠칫했다.
“하여간 너희는 약자를 지키는 데 힘쓰고 가문을 부흥시키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 알아야 할 것이 또 있으니, 조 선생이 기문진식에 대해 쓴 글인데 여기서는 선천의…….”
남궁환은 아이들의 원망스러운 표정, 심지어 련마저 다소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짓는 걸 모르는 척하며 강의를 계속했다.
* * *
가주 남궁경해의 동생 남궁경무는, 자신도 몰랐지만 조카 남궁서건과 비슷한 생각을 했다.
즉 단목현우가 심마에 들어 성취가 오락가락한다고 했으니, 자신과 얼추 비슷한 상황이라 여겨 마음 편히 동병상련의 감정을 가졌다는 것이다.
직계로 자랐으나 성취가 모자라고 부족해 세가의 짐이 되는 처지, 조카들보다 부족한 신세를 견디고 있는 상황이리라고.
“새? 동물을 돌보는 거라면 우리 련아가 제일인데.”
남궁경무는 희멀건 눈으로 단목현우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딱 동갑이라서 둘이 함께 있는 일이 잦았는데, 단목현우의 화제는 셋뿐이었다.
단목련, 단목성, 단목비.
검술이나 다른 무공 이야기도 없고 세가의 혈족으로서 느끼는 고달픔도 없고 하물며 자신이 심마에 들었던 동안 얼마나 힘들었나 하는 애기도 없었다.
지금 단목현우가 가장 열렬한 반응을 보인 건 남궁경무가 키우는 ‘정토(淨土)’라는 이름의 문조 얘기였다.
“련아 그 애가 동물…… 좋아하나 봐.”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겠고, 동물들이 그 애를 잘 따르기는 해.”
두 사람은 답답한 남궁세가 안을 벗어나, 양주의 시내를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어른들은 한창때인 청년 두 사람까지 구속하려고 들지는 않았다.
“그 애가 피리 하나만 불어도 온 동네 새들이 다 모인다니까.”
단목현우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련은 피리를 불 때면 집중하느라 잘 모르는 눈치였지만, 그 애가 피리를 불고 선율을 가다듬기 시작하면 멀리서부터 새들이 한 마리씩 날아와 담벼락, 나뭇가지, 처마 끝에 내려앉곤 했다.
“굉장하네……. 아, 여기 갈래?”
“네가 좋아하는 덴가?”
“아니, 듣기로는 유명하다고 해서. 3층에서는 수서호가 보인다던가?”
높은 전각을 올려다본 단목현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카와 누이에게서 받은 넉넉한 용돈을 가진 자와 한 번도 가난해져 본적 없는 세가의 둘째 아들은 거리낌 없이 안으로 들어가 가장 맛이 좋은 요리를 주문했다.
“여기 숙수가 제일 자신 있어 하는 거라면 송서궐어(松鼠鳜鱼)입니다.”
“송서궐어?”
“양주 명물이지요. 살이 통통하게 오른 궐어를 잔뼈까지 전부 발라낸 다음에 얇게 저민 칼집을 넣고 바삭하게 튀긴 것인데, 거기에 새콤달콤매콤한 양념을 끼얹어 뜨겁게…….”
점소이가 양손을 휘저어 가며 설명하는 걸 도중에 멈춘 단목현우가 주문할 요리를 결정했다.
“그걸로 한 접시 다오.”
“술은 필요 없으십니까요, 대협?”
“이르게 돌아가야 하니 차만 내다오.”
“예이.”
과연 남궁경무의 말대로 수서호를 감싼 나무들이 꽃망울 움트는 것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멋진 곳이었다.
오래지 않아 점소이가 바삭바삭한 소리가 날 것 같은, 양념을 끼얹은 생선튀김을 가지고 왔다.
“이래서 송서(松鼠-다람쥐)라고 하는군! 련아와 비아와 성아도 봤으면 재미있어했을 텐데.”
단목현우가 아쉬워하며 중얼거렸다. 생선 살을 완전히 잘라 내지 않고 저며 통째로 튀겨 놓은 모양새가 마치 다람쥐처럼 보였다. 남궁경무가 달래듯 말했다.
“먹어 보고 맛이 괜찮으면 세가의 숙수에게 만들어 달라고 할게.”
‘조카가 그렇게 좋은가?’
남궁경무에게는 잘 알기 어려운 이야기다.
솔직히 첫째 조카인 남궁서건과 그는 서로 동족 혐오에 가까운 꺼림을 품고 있었다.
서건은 남궁경무가 실패자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그와 다르지 않은 처지라는 걸 알고 있기에 그처럼 될까 두려워한다. 경무는 조카 서건의 그런 눈빛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서건과 달리 재능 출중한 남궁서진에 대해서라면, 그 아이가 숙부인 자신을 우습게 여기진 않을지 전전긍긍하는 게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