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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20)화 (120/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20화

두 사람은 튀긴 생선에 양념을 듬뿍 묻혀 반쯤 먹어 치우고 나서야 대화를 재개할 수 있었다.

“넌 악기 연주할 줄 아는 거 없냐?”

“악기?”

단목현우와 처음으로 뭔가 ‘하는 것’에 대한 얘기가 나왔지만 남궁경무는 호쾌하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다룰 줄 아는 악기는…… 없는데.”

그렇다고 다른 걸 제대로 할 줄 아는 건 아니지만. 남궁경무는 괜히 주눅이 들어서 입술 끝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가 할 줄 아는 건 그렇게 많지 않았다. 가문의 무공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그 외의 것들을 익힐 틈은 전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 별로 관심 없나?”

“아니, 그건 아니야. 그냥 시간이…… 안 났지.”

남궁경무는 변명으로 들릴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웅얼거렸다. 그러다 결국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서는 솔직히 말했다.

“사실 내 재주가 부족해서…… 악기까지 배울 짬이 없어.”

너는 이런 맘 모르겠지만.

조카를 지키다가 심마에 빠질 정도로 정이 깊고, 심마에 빠져 몇 년을 날리고도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을 만큼 빼어난 너는.

그러나 남궁경무의 우울한 생각은 금방 날아가고 말았다.

“재주가 부족하다니? 말도 안 된다! 너는 비파를 쥐기만 하면 금방 배울 텐데! 내가 가르쳐 줄까?”

“갑자기 무슨 비파를…….”

“너 지금…… 양념에 들어간 고추로 탑을 쌓았잖아.”

“어?”

남궁경무는 동작을 멈추었다.

그의 손에 쥐어진 젓가락 끝에 다져진 채소 조각이 가냘프게 매달려 있고, 그 앞에는 그가 무심결에 한 칸씩 쌓아 올린 채소 탑이 있었다. 어린아이 새끼손톱보다 잘게 다진 채소로 쌓은 작은 탑이.

“이 정도 재주면 뭔들 못하겠냐고!”

“아니, 이건…….”

양념 채소로 탑을 만들었다고 갑자기 비파에 재능이 있을 거라는 얘기로 빠지는 놀라운 전개에 남궁경무가 눈만 끔벅거릴 때였다.

악기 다루는 것에는 자신이 있으니 걱정 말라며 가슴을 탕탕 치고 요리를 먹던 단목현우가 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세가 안에서는 둔하다고 호통만 듣기 일쑤였던 남궁경무였으나 단목현우를 보자 바로 알 수 있었다.

지금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어, 이봐, 현우? 왜 그러는가?”

남궁경무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단목현우는 천천히 젓가락을 내려놓고 주위를 훑어본 다음 차창 밖을 내려다보았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바삐 오가는 활기찬 거리의 모습에서 별다른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으나.

“……그놈들 냄새다.”

“그놈들?”

조카들에게 다람쥐 모양의 생선튀김을 어떻게 보여 줄지 고민하던 천진난만하고 장난기 넘치는 청년의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살짝 파리해진 낯과 분노가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고요하게 침잠해 들어가고 있었다.

“……혈라곡.”

단목현우는 짓씹듯이 대답하고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객잔을 뛰쳐나가는 그를 보고 놀란 표정만 짓고 있던 남궁경무가 급히 요릿값을 치르고 따라붙었다.

그사이에 해가 다 저물어 어둠이 가라앉은 거리는 등불에 빛이 들어왔다.

“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혈라곡 놈들의 냄새가 났다고. 남궁세가로 당장 돌아가야 해.”

“아니, 아니, 잠시…… 그럴 리가 없어. 혈라곡 곡주는 네 할아버님께서 처리하셨잖아!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혈라곡 냄새가 날 수 있겠어?”

남의 의견에는 그저 네 말이 맞겠지, 라고 생각하는 편인 남궁경무였으나 이번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뜬금없이 혈라곡이라니, 말도 안 돼.’

거의 호랑이 얘기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어딘가에는 그 맹수가 있겠지만, 그게 이 양주 한가운데에 나타날 일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거기다 여긴 우리 남궁세가의 앞마당인데.”

“그들이 처음 나타났을 때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어.”

“그건, 그렇긴 하지만…….”

“그리고 그들이 절멸하지 않은 건 내가 가장 잘 알아. 련아가…….”

차마 말을 끝까지 맺지 못한 단목현우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단목세가에 흑천련 행세를 하는 혈라곡 놈들이 쳐들어왔던 건, 그들을 패퇴시켰다고 전 무림에 선포하고도 십여 년이 지났던 날이었다.

그날은 아직도 그의 기억 속에 생생했다. 심마를 떨쳐 낸 지금에 와서도.

남의 생명력을 갈취하는 자들 특유의 비린내, 살점이 썩어 들어가는 악취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단목현우의 강경한 태도에 남궁경무도 주춤했다. 그가 저렇게까지 확신을 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로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기도 했다.

“그, 그래. 뭐 아무 일 없으면 좋은 거고, 아니면 미리 방비라도 할 수 있겠지. 어, 얼른 돌아가자.”

그렇게 세가로 돌아왔을 때, 남궁경무는 단목현우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곧장 알 수 있었다.

칼부림 소리와 함께 세가 한쪽이 불타고 있었다.

* * *

련이 한숨을 푹 내쉰 건 남궁환의 수업이 끝나고 난 뒤였다.

남궁환은 험한 전쟁을 거친 사람답게, 원활한 일의 진행을 위해서 약간의 예의나 인정은 뭉갤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자신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은 손자보다 말길을 쏙쏙 알아듣는 단목련에게 더 집중했단 말이었다.

그게 아무래도 남궁서건의 마음을 크게 상하게 한 눈치였다.

그래도 남궁서건은 련이나 다른 사람에게 그런 티를 내진 않았지만…….

“형님, 형님. 오늘 저녁에는 고기만두가 나온대요. 얘기 들으셨어요? 이따 만두를 쪄서 다 같이 먹을까요? 저녁에요.”

“그래.”

“먹고 나서는 수련하실 거지요? 무슨 수련 하시려고 생각하셨어요? 저는요…….”

최근 다정해진 남궁서건에게 맘을 놓았던 서진은 남궁서건의 표정을 살피지 못하고 조잘대며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가, 남궁서건이 탁 쳐 내는 손길에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아…….”

“아, 서진아. 미안해. 내가 조금 피곤해서…….”

남궁서건이 빠르게 말했지만, 남궁서진은 형과 서먹했던 과거를 떠올린 듯 창백해진 얼굴로 주춤거리더니 눈물이 글썽해져서는 사과의 말을 웅얼거리다가 달려 나갔다.

“서진아, 아니…….”

“…….”

“…….”

싸늘한 공기가 스쳐 지나가며 모두 미묘한 분위기를 감지한 채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옆에서 그 모양을 가만 보고 있던 단목비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제가 가서 달래 줄까요?”

련은 조금 놀라서 동생을 돌아보았다.

자신을 놓고서 계속 티격태격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와는 별개로 서로 정이 든 듯했다. 단목비는 남궁서건을 흘끗 쏘아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곁에 서 있던 단목성이 먼저 고개를 끄덕여 주고 뒤이어 련도 허락해 주자 단목비가 조르르 달려 나갔다.

그래도 걱정된 련이 눈을 못 떼는 사이에 왜인지 불퉁한 얼굴의 모용설호가 남궁서건에게 뭔가 말하려는 순간.

련이 손으로 냅다 그 입을 막았다.

모용설호는 련의 손을 막을 수 있었지만 련을 내버려 두고 눈빛으로 물었다.

‘왜?’

‘너는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러나 련에게도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는 걸 안 모용설호는 련의 손을 잡아떼곤, 못마땅한 얼굴로 남궁서건을 쳐다보며 기어코 말했다.

“아니, 동생한테 짜증을 낸 건 자기면서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데?”

“뭐라고?”

갑자기 비난받은 남궁서건은 평소처럼 유하게 넘기질 못하고 날카롭게 대꾸했다.

“내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다고 그래? 그리고 내가 어떻게 있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

그가 공격적으로 나오는 걸 처음 본 모용설호는 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윽고 맞섰다.

“왜 상관이 없어? 나 지금 련아랑 공부해야 하는데 너 때문에 바로 못 가고 있잖아.”

“미치겠네.”

련이 얼빠진 얼굴로 중얼거리는 사이에 두 소년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내가 언제 련아보고 여기 남으라고 했어? 련아가 남고 싶어서 남아 있는 건데 왜 나보고 뭐라고 해?”

“아우를 보듬을 줄도 모르는 녀석이랑 그런 녀석도 안타까워서 달래 주려는 벗이 있으면 당연히 그놈 탓을 하지 어찌 벗을 탓한단 말이야?”

“……!”

대꾸할 말을 잃어버린 남궁서건이 침착함을 잃고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사이에 모용설호가 설교를 이어 나갔다.

“그리고 내 벗이 마음이 착해서 네 안색이 나쁘다고 남아 준 것이지 남고 싶어서 남은 것이겠냐?”

“아니…… 너희만 친구야? 나는 뭐 아니고?”

남궁서건이 울컥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여태 무표정한 얼굴로 옳은 소리만 해 왔던 모용설호가 처음으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지. 나와 련아는 진실된 벗이 되기로 약조를 한 사이다.”

“뭐?”

“뭐라고?”

“뭐라고요?”

남궁서건이 반문하는 사이에 단목세가의 아이들이 모두—매신유, 서극림에 단목완과 단목성까지— 고개를 홱 돌리며 눈을 크게 떴다.

그 새 한 걸음 떨어져 있던 화륜까지 다가와 련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무슨 얘기예요, 저게?”

“……우화륜, 너까지 이럴 거야?”

“아니, 갑자기 무슨 진실된 벗 어쩌고냐고요. 모용세가랑은 서로 주고받고 손 턴 거 아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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