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21화
련과 화륜이 조용히 티격태격하는 사이에 단목성이 단목세가 대표로 팔을 걷어붙이고 모용설호에게 다가갔다.
“모용설호, 그게 무슨 얘긴데?”
“네 사촌이 나와 벗이라는데 왜 네가 그러는 거지?”
“우리 련아는 앞으로 세가의 가……기둥이 될 몸인데 아무나하고 친구 할 순 없어.”
“그럼 네 허락을 받은 사람하고만 벗이 될 수 있고?”
“물론, 그건…… 그런 건 아니지만…….”
단목성이 분한 표정으로 모용설호를 노려보았으나 모용설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련의 벗이 되기에 모자란 점이 있나? 련아하고 말이 제일 잘 통하는 건 나일걸. 그리고 난 앞으로 모용세가의 가주가 될 거고.”
다른 아이들을 반쯤 바보로 만드는 말이었지만 그 얘기를 듣던 남궁서건도, 조금 떨어진 곳에서 훔쳐 듣던 아이들도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그러나 단목성만은 오히려 ‘이겼다!’ 하는 얼굴로 빠르게 말했다.
“그래, 넌 모용세가 사람이잖아. 너무 멀리 살아.”
“……뭐라고?”
“진실된 벗이라면 응당 힘들 땐 바로 옆에서 위로해 주고, 계절마다 그에 맞는 편지와 선물을 주고받아야 하는데 모용세가는 너무 멀다고. 봄에 선물을 보내면 여름에 도착하겠네.”
“그…… 그건…….”
처음으로 말문이 막힌 모용설호가 우물거리는 사이에 련이 끼어들었다.
“자자, 그 얘기는 그만하고. 우리 서진이랑 비아 찾으러 가야지. 가서 서진이한테 미안하다고 할 거지?”
‘너를 믿어…….’라는 표정으로 지그시 바라보자 움찔한 남궁서건은 눈을 피했다. 련이 툴툴거렸다.
“동생 싫어하는 것도 아니면서.”
“당연히 안 싫어해. 방금도 실수였어, 놀라서…….”
남궁서건은 자기도 모르게 변명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꼬마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아?”
아이들을 빨리 찾아서 일을 해치우고 단목련과 오늘 수업에서 들은 오 선생의 얘기를 탐구하고 싶은 모용설호가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서진이가 이럴 때 항상 가는 데가 있어. 안 쓰는 물건들 보관해 두는 천화당이라는 곳인데…….”
남궁서건이 한쪽 방향을 가리키며 앞장설 때, 모용설호가 뒤따라가며 중얼거렸다.
“아우를 울려서 쫓아내는 일이 매번 있었나?”
모용설호의 목소리에서 비난을 읽어낸 남궁서건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모두가 그쪽으로 따라가려는데, 가만히 하는 모양새를 보고만 있던 화륜이 슬쩍 따라붙었다.
“륜아 너도 같이 가게? 돌아가서 쉬고 있어도 되는데. 비아만 데리고 갈 거니까.”
“하인만 먼저 가서 쉬는 경우가 어디 있어요.”
“너도 동생이니까 그렇지.”
련이 아프지 않게 화륜의 코를 살짝 비틀었다. 화륜은 괜히 툴툴대면서도 주위를 한번 둘러보곤, 돌아가지 않고 련의 곁에 붙었다.
“오늘 좀 어수선한 것 같아서 그래요.”
“아…… 너도 느꼈어? 뭔가 번접해졌지. 사람이 는 것 같은데 무슨 일 있…….”
문득 련은 수업을 듣기 전에 단목현요가 했던 얘길 떠올렸다.
갑자기 어른들이 모두 모여 세가의 방비 체계에 대해 담론을 나눈다니.
‘방비한다는 건 지켜야 할 일이 있다는 거겠지. 지켜야 한다는 건 누군가 쳐들어온다는 거고. 그런데 대체 누가, 왜?’
지금 여기는 무림 동쪽 세가의 주축들이 모두 모여 있으니 공격 한 번으로 큰 수확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달리 말해 세가의 주축으로 인정받는 무력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니 지금 공격을 감행한다는 건 너무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설마 혈라곡이? 하지만 벌써?’
지난 삶에서 무림사에 갈등을 일으킨 건 혈라곡뿐이었다. 하지만 혈라곡도 그간 힘을 비축하다가, 자신이 스물이 될 무렵에야 몸을 일으켰다.
그렇기에 련 역시 10년 뒤를 보며 아이들과 배움을 함께하고 있지 않았던가?
‘대체 뭐가 달라진…….’
순간 소름이 오싹 돋았다.
‘피의 그림자는 피할 수 없다.’
천비궁에서 해 준 조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보석을 지참해 영기를 관리하라는 것, 다른 하나는 ‘피의 그림자는 피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련은 지금까지 그것을 막연히 10년 뒤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만약 천비궁에서 이번 여행에 대한 조언을 해 준 것이었다면.
이번에 일어날 일을 예고한 것이었다면.
지난 생과 달라진 것을 꼽자면 수없이 많았다. 자신이 이렇게 눈을 떠 건강하게 뛰어다니는 것부터가 지난 삶과 달랐다.
이전 생에는 열린 적 없던 경항운련까지 열렸는데 대체 뭐가 달라졌냐는 한가한 생각이나 하다니!
“련아야?”
몇 발자국 앞서가던 단목성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가, 련의 얼굴이 창백해진 것을 보고 빠르게 다가왔다.
“련아, 왜 그래? 어디 아파?”
“아, 아니……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그것보다 얼른 비아랑 서진이 찾아 데리고 오자.”
“정말 괜찮아? 아이들 찾는 건 나도 할 수 있으니까 넌 들어가도 돼.”
“아냐…… 다 같이 찾는 게 더 빠를 거야.”
갑자기 남궁세가의 장원이 지나치게 넓게 느껴졌다.
련과 단목성이 목소리를 낮추고 나누는 얘기를 귀담아들은 모용설호 역시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별다른 인기척은 느끼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어…… 그러니까 이쪽으로 가면 될 거야, 아마도…….”
남궁서건도 약간 긴장해 장원의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그때 무사 서너 명이 다급하게 다가왔다. 한 명은 련의 호위인 정영이고, 나머지는 남궁세가의 타격대 무애단의 부단주 남궁혜민과 휘하 무사들이었다.
“도련님, 아가씨.”
“어? 영, 무슨 일이야?”
정영이 련과 단목세가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사이 남궁혜민이 한 걸음 앞서 나와 말했다.
그는 남궁세가의 방계이면서도 자질이 빼어나고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아, 젊은 나이에 무애단 부단주가 된 인물이었다.
“오늘 수업이 끝나셨다고 들었습니다. 얼른 안으로 모시라고 어르신들이 보내셨습니다.”
어린애들에게 안으로 들어가 있으란 이야기를 하려고 타격대 부단주까지 보낼 리가 없다.
련이 얼른 대답했다.
“비아랑 서진이가 지금 잠깐…… 숨바꼭질을 하고 있어서 그 애들만 찾아서 갈게.”
“하지만…….”
두 도련님의 행방이 불명이라는 이야기에 남궁혜민의 표정이 굳었다.
“그럼 나랑 정영이 동생들 찾아갈 테니까 너희는…….”
들어가 있으라고 말하려 했던 련이었으나 자리에 함께 있던 단목세가 아이들은 물론이거니와 금종하, 팽주란, 악소형까지 모두 완강하게 거부하는 표정을 지었다.
“서진이가 어디 있는지는 내가 잘 아니까.”
“나는 벗이니 벗의 아우를 찾는 일에도 빠질 수 없어.”
심지어 단목성은 아무 말조차 하지 않았다. 함께 가는 게 당연하다는 얼굴이었을 뿐이다.
그건 화륜도 마찬가지였다.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련의 곁에 서 있기만 했다.
“……그래, 그래. 그럼 다 함께 얼른 찾자.”
남으란 말을 들을 기색이 아니다. 아무래도 여기서 실랑이만 하다가 시간만 끌고 같이 가게 될 것 같으니, 련은 차라리 시간 낭비 없이 함께 가는 걸 선택했다.
* * *
“그런데 걔가 이런 데 숨어 있는 걸 어떻게 아는 거야?”
이십 분을 넘게 남궁세가 건물들을 헤치며 안으로 들어가던 련이 물었다.
남궁서건은 얼굴이 벌겋게 되어서는 입을 꾹 다물었다.
“동생이 울면서 뛰쳐나가면 항상 찾으러 갔었구나?”
“당연하지. 나는 형이니까…….”
그저 자신보다 잘났다는 이유만으로 동생을 미워하면서도, 동생이 울면 찾으러 갈 수밖에 없었다.
남궁서건은 재능도 부족한 자신이 ‘동생을 보살피지 않는 형’까지 되면 정말 아무도 날 좋아해 주지 않을 거라고 불쑥 말하려다가 남궁혜민의 눈치를 살피곤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에 모용설호가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안 울렸으면 되는 것 아닌가.”
“넌 동생 없지?”
“없다. 내가 동생이 없는 게 네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
“…….”
남궁서건은 입술을 꽉 깨물고 중얼거렸다.
“북쪽은 규율이 엄한가 보네. 아무도 안 죽고 안 죽이고 있는 거 보면.”
“서건, 앞에서 못할 말은 하지 말고 말을 할 거면 당당하게 해라.”
“부처님과 태상노군께서 너를 굽어살피시는 게 분명하단 얘기였다.”
“저기에 애들 있으니 둘 다 조용히 해.”
단목성의 말과 동시에 두 소년이 입을 다물었다. 과연 단목성의 말대로, 반쯤 열린 문틈 사이로 남궁서진과 단목비가 웅크리고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냥 네가 엄청 강해지는 거야.”
“내가?”
남궁서진이 빨갛게 젖은 눈으로 단목비를 쳐다보았다. 단목비가 소곤거렸다.
“응. 그래서 형님을 때려눕혀서 말하는 거지.”
“뭐라고 해?”
“놀아 달라고!”
“형님을 때리긴 싫은데…….”
“너 자꾸 응석 부릴 거야? 이거도 싫고 저거도 싫고. 그래서 어떻게 대업을 이루겠어?”
아이들의 대화를 훔쳐듣고 있던 사람들 중 련이 남몰래 얼굴을 붉혔다. 대업 운운하는 건 련의 말버릇 중에 하나였다. 최근 련의 대업은 화륜을 키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