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22화
혼자 민망해하던 련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화륜과 눈이 딱 마주쳤다. 화륜의 눈이 놀리는 듯이 휘어져 있었다.
“하지만 형이 억지로 놀아 주는 건 좀 그래……. 그건 대업 실패 아니야?”
“그치만 너희 형님이 그냥은 안 놀아 주신다며. 사람이 다 가질 수는 없어. 하나는 포기해야지.”
“내가 좀 더 착해지면 놀아 주지 않으실까?”
“안 돼.”
“왜?”
“너희 형님은 그렇게 착한 사람 아닌 것 같은데. 착한 사람이랑 놀아 주는 건 착한 사람이니까.”
그 순간 남궁서진이 벌떡 일어나더니 살짝 단목비를 밀었다.
“야! 우리 형님 차…… 착해…….”
“착한 건 우리 누이가 착한 거야! 너희 형님은 아니야!”
“아……아니……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우리 형님도 착해! 착하단 말이야!”
아이들의 얘기를 훔쳐 듣고 있던 련과 남궁서건의 표정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모용설호가 벌컥 문을 열었다. 아이들이 놀란 토끼처럼 눈을 떴다.
모용설호가 한 발짝 옆으로 비켜서서 고갯짓했다.
“각자 형님과 누이에게 달려가도록 해.”
“혀, 형님……?”
“누이!”
남궁서진이 놀라서 주춤거리고 있는 반면에, 단목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거의 돌진하는 것처럼 련에게 달려 안기더니 속삭였다.
“제가 서진이 잘 달래 줬어요.”
“저…… 정말 잘했어.”
남궁서건이 남매의 모습과 서진을 번갈아 흘끔거렸다. 모용설호가 그런 남궁서건을 툭 밀쳤다.
“……서진아, 미안. 내가 놀라서 그랬어. 이제 돌아가자.”
“혀엉…….”
울먹거리던 남궁서진이 주춤주춤 한 걸음씩 다가오더니, 그가 뿌리칠 기색이 없자 마침내 정수리를 폭 박으며 남궁서건에게 안겼다.
남궁서건이 어색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련을 쳐다보았다. 련이 턱짓으로 자신의 아래를 가리켰다. 품에 안긴 동생을 토닥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한참 눈빛이 떨렸던 남궁서건이 동생의 등에 팔을 둘렀다.
“……!”
깜짝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던 남궁서진이 얼른 다시 고개를 박았다. 눈치 못 챈 척하면 남궁서건이 계속 도닥여 줄 거라고 믿는 것처럼.
형제의 어색하고 감동적인 상봉의 시간이 이어지는 사이.
“이상한 냄새 나지 않아?”
“…….”
“…….”
아이들이 모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모용설호를 쳐다보았다.
“너는 꼭 이런 순간에.”
“아니, 정말로. 어디서 뭔가 타는 냄새 나지 않아?”
“어?”
아무래도 남궁세가의 가솔이기에 더 감동받은 얼굴로 형제의 화해를 지켜보고 있던 남궁혜민이 화들짝 놀라서 뒤를 홱 돌아보았다.
그 서슬에 다른 아이들도 놀라고, 남궁서건마저 약간 불안한 얼굴로 남궁혜민을 쳐다보았다.
“왜…… 왜 그러십니까?”
“병장기 소리가……. 일단 세가 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여긴 장원 바깥쪽과 가까운…….”
앞선 말은 작았지만 뚜렷하게 들렸다. ‘병장기 소리’라는 얘기에 아이들도 놀라서 눈을 크게 뜨는 그 순간 련은 입을 틀어막았다. 치밀어오르는 구역질 탓이었다.
“누이? 괜찮아요?”
“……침입자가 있어.”
“네?”
“뭐?”
주변에서 당황하는 사이에 정영은 련의 말을 듣자마자 우선 검을 빼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궁혜민 역시 바늘에 찔린 것처럼 검을 빼 들며 아이들을 다시 방으로 전부 밀어 넣었다.
“여기 계십시오!”
“무, 무슨 일입니까?”
남궁서건이 저도 모르게 남궁서진을 품 안으로 가두려는 듯 꽉 끌어안았다.
“근래 불온한 자들의 움직임이 보인다는 가주님 말씀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그자들인 듯합니다.”
“예? 그건 아무 문제 없지 않았어요……?”
남궁서건이 련을 흘끗 쳐다보았다. 무림인이 대거 회동하는 모습을 보였던 건 단목천기를 만나기 위해서 아니었나?
“그자들이 아닙니다.”
“그럼 누구…….”
남궁혜민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으나 적의 정체에 대해서는 입에 담지 않고, 문을 닫고 막아섰다.
그와 동시에 가구들이 부서지는 소리, 사람들이 달려오는 요란한 발소리가 문틈 새로 울려 퍼졌다. 열기와 불타는 냄새도 함께였다.
“이 무도한 것들아!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흙발로 들이닥치느냐!”
여태 큰 소리를 내는 일이 없던 남궁혜민이 쩌렁쩌렁 소리쳤다.
련은 문틈에 바짝 붙어 바깥을 살폈다. 침입자들은 남궁혜민의 외침에도 일절 반응 없이, 기묘할 만큼 침착하게 주위를 살피기만 할 뿐이었다.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대충 묶은 머리카락에 마치 조금 전까지 농사를 짓다 온 것처럼 허름한 차림새를 하고 있는데, 눈동자에는 광기가 번들거렸다.
검을 쥔 손은 어설픈데 한 명 한 명에게서 고강한 기운과 질척한 살기가 느껴졌다.
‘강대한 내공에 비해 터무니없이 부족한 외공, 이지가 흐린 눈동자, 그리고 이 묘한 고기 썩는 냄새까지…… 혈라곡!’
그들의 눈동자가 탐색이라도 하듯이 앞을 훑다가 련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가장 선두에 선 자가 검을 고쳐 쥐고는 그대로 달려들었다.
“이놈!”
무사들이 능숙하게 방어했으나 상대는 다섯이 훨씬 넘었다. 칼과 칼이 맞부딪히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동시에 피 냄새가 확 풍기기 시작했다.
련의 눈동자에 별빛이 떠올랐다.
‘당장 이 문으로 들이닥친 놈들. 공기가 천천히 데워지고 있는 건 불길이 가까워져서? 어, 그리고 한 명이 더……!’
련은 얇은 창문 쪽을 흘끗 쳐다보곤 근처에 서 있던 남궁서건과 서진을 냅다 한가운데로 끌고 왔다.
그와 동시에 모용설호와 눈을 마주했다. 련이 눈동자를 굴려 창밖을 가리키자 모용설호 역시 눈치를 챘는지 목울대를 꿀꺽 넘겼다.
련이 그런 모용설호에게 빠르게 속삭였다.
“상대 내공은 의혈도 어르신 수준인데 실력은 너보다 못해. 얼마 전에 깨친 그거 쓰면 돼.”
“뭐야? 무슨…… 무슨 얘기 하는데?”
벗들과 함께 동생들이나 찾고 남궁세가 장원 모험을 하려고 했다가 이런 일에 마주한 악소형이 당황이 역력한 얼굴로 밖을 두리번거리며 끼어들었다.
“어라?”
그러다 문득 이 방 안에 가득 찬, 열 명이 넘는 아이들의 면면을 헤아려보던 련은 눈을 반짝 빛냈다.
“다 있잖아?”
“난 모용설호가 아니라고! 알아듣게 말해 달란 말이야.”
“우리가 의혈도 어르신 상대했던 거 기억나지?”
“설마 우리끼리 그때처럼 한 놈 잡아 보자는…… 그런 거야?”
“너 똑똑하다?”
악소형의 눈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커졌지만, 그와 동시에 눈동자에 혈기가 맴돌았다.
무림 세가의 혈족으로 자라면서 무명(武名) 쌓는 상상 한 번 안 해 본 이 뉘 있겠나?
“어, 그런데, 어, 우리가 왜 한 명을 상대해야 해?”
악소형이 벌써 허리춤의 목검부터 뽑으려고 하는데 팽주란이 그를 잡아당기며 다급하게 질문했다.
“밖에서 못 막을 거라는 말이야?”
그러나 시간이 촉박해졌으므로 련은 더는 설명하지 않고, 우선 단목비와 화륜의 손을 맞잡게 하고는 남궁서건에게 떠밀고, 단목성과 단목완을 붙잡았다.
“성아야, 애들 부탁해.”
“넌?”
“한 놈이 곧 올 텐데 그거 잡아야 될 것 같아. 혹시 모르니까 너랑 완아하고 서건 공자까지 같이.”
“넌…….”
단목성은 뭐라고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도로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우리 싸우는 거야? 왜? 밖에서 잘 막고 있잖아?”
팽주란이 다급하게 말하는데 금종하가 그를 흘끗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 종알종알.”
“뭐? 난 소형도 아닌데 왜 그런 식으로 말하냐?”
“난 또 뭐, 왜!”
갑자기 불린 악소형은 투덜거리다가도, 평소완 다르게 팽주란을 끌어당기며 작게 속삭였다.
“야…… 우리가 어리긴 해도 할 땐 해야지……. 그래도 하북팽가 산동악가의 미래 아니냐, 우리가. 저쯤은 어? 이렇게 다 같이 힘을 모아서.”
“아니, 할 건데 할 땐 하더라도 일이 어떻게 되는 건지는 알아야…….”
그러나 련이 잡아당기는 손에는 속절없이 이끌려 가고 말았다.
“우리가 의혈도 어르신이랑 했던 거 그대로 하면 돼. 정면이 중요해. 설호, 믿는다.”
“당연, 당연…… 하지.”
실전은 긴장감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모용설호마저 목소리를 조금 떨었다.
“주란, 신유, 우리가 정면에서 대치할 거니까 너희는 뒤로 가서 공격하는 거야. 우리가 했던 거 기억나지?”
“젠장, 몇 합 못 버티고 다 나뒹굴었던 것만 기억난다고…….”
팽주란이 중얼거렸다.
“내공을 실은 공격은 무조건 피해. 난 적이 나타나면 좌우 정해서 옆으로 빠져 공격할게. 시간을 끌고 동생들을 지키는 게 목적이야.”
“진짜 뭐가 오는 거야?”
“왔다!”
“방금 말했는데!”
그와 동시에 쾅 소리가 나며 창문과 벽이 와르르 무너졌다. 바깥의 열기, 썩은 고기 타는 듯한 불쾌한 냄새가 확 밀어닥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