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23화
‘생각보다 불이 크잖아?’
무너진 벽과 창 너머로 불길이 보였다.
그리고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을 한 한 사람도. 팔뚝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는 걸 보면 어디서 벌써 다투고 온 모양이었다.
“여기가 맞는데?”
그러나 남자는 아픔도 모르는 듯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주위를 한 번 둘러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횃불을 휙 집어던졌다.
곧 벽에 걸려 있던 천이 타들어 가고 남자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돌아가더니 아이들에게로 고정되었다.
“여기가 맞는데?”
남자는 했던 말을 몇 번 반복하더니 도중에 눈이 번쩍 빛났다. 그러곤 검을 쥐고 그대로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우, 우와아악!”
깜짝 놀란 악소형이 어떻게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모용설호가 그 공격을 받아쳤다.
콰앙!
“크윽!”
“어! 어어!”
챙! 채챙!
처음에는 이리저리 구르고 짧은 비명이 난무했지만 아이들은 금방 의혈도 팽무혁을 상대하던 걸 기억해 냈다.
“주란, 신유!”
“네!”
거기다 팽무혁에 비하면 이자의 검술은 형편없다는 걸 눈치채는 것도 금방이었다.
틈을 봐서 주란과 신유가 뒤로 빠지고, 련까지 옆에서 공격에 합세하자 침입자의 표정도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익, 이익, 죽어!”
챙! 챙챙챙!
‘반쯤 미친 건가?’
“설호! 받아쳐!”
“흐아아앗!”
남자가 숨을 들이켜며 검기를 휘두른 것을 모용설호가 부드럽게 목검을 움직여 받아쳤다. 그 순간 목검이 박살 났지만, 모용설호가 받아친 공격은 그대로 남자를 덮쳤다.
* 모용설호의 배움
매신유의 배움
서극림의 배움
단목비의 깨달음 *
현재 행운 수치 : 72/120 (6▲)
‘지, 지금?’
련은 대체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뺨을 훔쳤다.
모용설호의 무기가 박살 난 파편이 튄 탓이었다. 남자는 자신의 내공이 실린 반격을 받고 비틀거렸으나 생각보다 빠르게 몸을 추스르곤 곧장 무기 없는 모용설호에게 달려들려는 순간.
“하아앗!”
“이 괴물아, 여길 보라고!”
서극림과 금종하가 양쪽에서 나란히 공격하고 련이 모용설호를 뒤로 홱 잡아당겼다.
부상을 피했습니다.
행운이 소모됩니다!
행운 수치 : 67 / 120 (5▼)
련의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잠깐 둘이 나뒹구는 사이에 련의 어깨를 살짝 스친 공격에서 핏방울이 튀었다.
‘행운이…… 이런 식으로 쓰인다고? 그럼 운이 좋지 않았으면.’
남자가 비틀거리지 않았으면 어깨에 스치는 부상 정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상대가 점점 더 광기에 물들어 가면서 공격이 중구난방으로 변하는 와중에 아이들의 공격은 점점 더 첨예해졌다.
그러다 련은 침입자의 눈동자가 점점 뒤집어지는 걸 보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흐어, 죽어…… 죽어야 해. 배신자는 죽어야 해!”
‘뭐야? 왜지? 왜 이렇게 광증이 빠르게 심해지는 거야?’
혈라곡에서 익히는 기묘한 무공이 이런 광증을 심화시킨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였던가?
남자는 자신의 상처에서 난 피를 빨아먹고 잠깐 정신을 찾는가 싶더니 다시 공방을 주고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치 앞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즉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는 말이었다.
“흐아아앗!”
“련아!”
“누이!”
“단목련!”
타앙! 타앙! 탕앙!
“……!”
“……!”
“……!”
반격에 행운이 소모되었습니다!
반격에 행운이 소모되었습니다!
반격에 행운이 소모되었습니다!
행운 수치 : 57 / 120 (10▼)
‘해, 해냈다!’
달려드는 침입자의 공격을, 얼마 전 모용취려에게 배웠던 방식으로 방어했다. 그편이 반격까지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감사합니다, 백룡신검 어르신!’
아주 섬세하게 온몸을 조종해야만 가능한 일이기에, 감히 실전에서 할 수 있을지는 스스로도 불안이 없지 않았으나 조금 전에 행운 수치가 소모된 것을 보고 용기를 낸 것이었다.
행운 수치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쓰인다면, 이 공격을 막을 때 약간의 부족함과 비틀림이 생기더라도 행운 수치로 어떻게든 보정할 수 있을 테니까!
그 결과 이 갑자 가까이 되는 내공을 가진 이 침입자가 자신의 내공이 실린 공격에 도로 당한 채 피를 왈칵 토하며 반쯤 주저앉아 있었다.
아이들 역시 검을 쥔 채 놀라고 경악한 얼굴로 련과 침입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 순간 바깥에서 안으로 정영이 뛰어 들어왔다. 무애단 무사들은 아직 침입자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아기씨! 도련님!”
“영!”
그러나 정영은 방 안의 침입자를 상대할 새가 없었다.
반쯤 기절할 것처럼 주저앉아 헉헉대던 남자가 문밖의 침입자들을 보더니, 눈이 뒤집어져 그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정영은 당황했으면서도 빈틈을 노려 공격했으나, 남자는 등에 큰 검상을 입었으면서도 조금도 개의치 않고 다른 침입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일단 처리해!”
“죽여!”
“한 놈은 살려!”
침입자들이 미쳐서 서로를 공격하고 있으니 일은 수월했다.
무애단이 남은 침입자들을 모두 처리하는 사이에 정영이 억장 무너진 얼굴로 련의 앞에 무릎을 꿇고서 품 안의 작은 단지를 꺼냈다.
“아기씨, 금창약을…….”
“난 괜찮아. 정영부터 발라. 고생했잖아. 그리고 빨리 여길 나가야겠어. 불 번지는 속도가 심상치 않아.”
련의 말대로였다. 방 쪽으로 침입한 자가 지른 불과 바깥에서부터 번져 오는 불이 한데 겹쳐 열기가 뜨거웠다.
“얘들아, 진짜 고생했는데 우리 한 번 더 해야겠어.”
긴장이 풀려 기진맥진한 채 앉아서 숨만 쌕쌕 몰아쉬던 아이들이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련을 돌아보았다.
가장 먼저 꿋꿋한 표정으로 일어난 건 금종하와 모용설호였다.
모용설호가 굳은 얼굴로 다가가자 악소형이 비명을 지를 것 같은 얼굴로 일어났다.
“일어났어! 일어났다고…….”
“소형, 나 좀 잡아 줘……. 콜록, 콜록…….”
짧게나마 전투에 참가했던 아이들이 비틀비틀 서로에게 의지해 일어나는 사이에, 련은 단목성과 남궁서건이 지키고 있는 아이들을 확인했다.
동생들은 놀라서 창백해진 얼굴로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있긴 했어도 울음을 꾹 참고 있었다.
련이 목검의 손잡이를 세게 움켜쥐느라 새하얗게 번진 단목성과 남궁서건의 손을 펴 주었다. 그사이 주위를 정리한 남궁혜민이 다가왔다.
“도련님, 아기씨……. 불길이 번지는 기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어떻게 세가가…… 세가가 불에 탈 수가…….”
“이 건물만 불타고 있으니 여기만 빠져나가면 돼요. 여기서 세가 안으로 향하는 최단 거리로 안내해 주세요.”
“그러려면 세가의 정원을 가로질러야 하는데, 지금 남궁세가의 정원에 깔린 기관진식들이 화재와 침입자에 대응하느라…….”
뭐가 발동이 됐을지 안 됐을지, 망가진 게 있을지 없을지, 안전한 파훼로가 여전히 안전할지 알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함정은 피할 수 있을 것이고 진법은…… 불에 타 죽느니 진법에 빠지는 게 나을 수도 있어요. 남궁세가에서 어떻게든 꺼내 주겠죠.”
“그건 그럴지도 모르겠으나 함정을 피할 수 있다고는…….”
“저놈들도 피해서 들어왔는데 우리라고 못 할 거 없지 않습니까.”
단언한 건 모용설호였다. 다들 내심 생각했으나 차마 못한 이야기였는데…….
* * *
남궁혜민은 잠깐 헛기침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씀입니다. 하면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뒤에는 련이, 련의 뒤에는 화륜이 섰다. 가운데는 아이들이, 끝은 무애단이 자리 잡고 불길 속을 헤쳐 밖으로 나가는 원정대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바쁜 걸음은 몇 번이나 멈춰야만 했다.
“잠깐!”
발을 디디려던 남궁혜민은 앳된 소녀의 목소리에 빠르게 멈췄다.
그와 동시에 그의 앞에서 불길이 확 일었다가 천천히 잦아들었다.
“가…… 감사합니다.”
곁에서 남궁혜민이 불의 열기에 익어 벌게진 얼굴로 감사 인사를 했다.
행운이 소모되었습니다!
행운 수치 : 43 / 120 (5▼)
그와 동시에 련의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건물을 태우는 불길은 뱀의 혀처럼 그들을 위협했고, 그 사이로 한 발짝씩 옮기는 일은 쉽지 않았다.
벌써 이런 일이 몇 번이나 있었다. 련이 붙잡아 채는 사이에 위험이 스쳐 지나가고, 남은 그들은 놀라서 아연실색하는.
하여 남궁혜민 역시 의심이나 망설임 없이 련의 말을 기민하게 따르는 중이었다.
련이 남궁혜민과 함께 앞장서며 행운 수치를 있는 족족 소모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서너 명은 다른 누군가에게 업혀 있을 것이었다.
‘흑월…… 진짜 고마워. 고마운데.’
련은 건물을 태우는 불길이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걸 느낄 때마다 이젠 떠나고 없는 오골계를 떠올렸다.
나름대로 정성껏 키우다 맥없이 떠나가 얼마나 서운해했던가?
‘정말…… 영물이 되고 만 거였어. 진짜로 주작이 되고 만 거구나…….’
깃털 흔적만 남기고 떠나갔을 때도 그게 뭔지 몰랐는데, 고구마를 구워 먹을 때도 그게 뭔지 몰랐는데 이제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