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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24)화 (124/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24화

불길은 그녀에게 치명적인 해를 입히지 못했다. 물론 불구덩이 속에 아예 던져지거나 뜨거운 것에 직접 손을 대는 건 조금 다르겠지만, 이렇게 옆에서 일렁거리는 불길들은 감히 련에게 다가오지 못했다.

이를 깨달은 직후엔 흑월의 힘을 믿고 자신이 가장 앞에서 전진하면 되지 않을까 했지만, 뒤쪽의 불길은 어찌할 수 없어서 련은 행운 수치를 소모하고 심안을 쓰면서 최대한 안전한 곳으로 헤쳐 나가고 있었다.

련의 눈동자에 별빛이 사르르 일렁거렸다.

“이제 괜찮아요. 얼른…… 가요.”

다들 옷자락으로 입을 막고 몸만 낮춘 채, 불길 사이를 전진했다.

‘그나마 정화가 통해서 다행이야.’

영기가 지속적으로 빠져나가고 있었지만 쓰지 않을 수는 없었다. 공기를 정화해 주고 식혀 주어 그들의 호흡을 남몰래 돕고 있었다.

처음엔 정화를 썼다가 산소를 불러와 화재를 더 키우지 않을까 했는데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아마 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방식으로 동작하는 게 아닐까 할 뿐이었다.

바닥이 삐걱거리다가 확 망가져 빠질 뻔하기도 하고, 건물의 나무 기둥이 우지끈 쓰러지며 불티가 튀기도 했다.

‘천화당 정말…… 너무 넓어……. 너무 너무 넓어!’

련이 뒤에서 걸어오던 누군가를 다급하게 잡아당길 때마다, 그들을 구해내는 순간순간 련의 행운 수치가 살살 녹아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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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 수치 : 28 / 120 (15▼)

‘갈 길도 영기도 모두 얼마나 남았지? 혈라곡하고 상대할 때 행운 수치를 쓰지 말걸 그랬다…….’

아끼고 싶다고 아낄 방도는 보이지 않지만. 여기까지 아무도 화상 입지 않고 온 게 정말 기적이었다. 련의 행운 수치와 흑월이 남겨 준 힘이 만들어 낸 기적.

‘앞으로 정말 행운 부지런히 쌓아야지. 남 돕고, 알려 주고, 전부 열심히 할게요. 제발요. 아니면 제발 아무나 여기서 날 보고 깨달음을 속성으로 쌓아 줄 수 없나?’

물론 불에 타 죽기 직전에 그런 게 가능할 리 없다. 모두들 뺨에는 그을음을 묻히며, 살 대신 옷자락을 태워 가면서 밖으로 향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눈물과 땀은 나오기가 무섭게 말라붙었다. 바닥에 몸을 바짝 낮추어 기어가듯 전진하던 악소형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구워지는 고구마의 심정을 알 것 같은데.”

팽주란이 그를 쳐다보며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한동안은 군고구마 안 먹어도 될 것 같은 기분이야…….”

남궁혜민은 티격태격하는 팽주란과 악소형을 흘끗 쳐다보았다.

다른 아이들도 긴장하고 놀라서 땀과 눈물이 말라붙은 얼룩진 표정을 하고 있으되 좌절이나 불안함은 보이지 않았다.

‘그건 이쪽 덕분인가?’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침착하게 이끌어 주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가장 앞에서 전진하는 또래 소녀가 시종일관 침착해 보이니 다들 불안에 떨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상황에 대해 전혀 모르고 그러는 것도 아닌데.’

이 거센 불길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는 단목련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옆에서만 보이는 저 눈이 저렇게 긴장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토록 민첩하게, 뒤따르는 아이들이 다칠 것 같은 순간마다 멈춰 세우거나 끌어냈을 리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어도…….’

“앗, 종하!”

그때 앞을 보던 소녀가 자연스럽게 뒤를 살피듯 바라보는가 싶더라니 금종하를 불렀다.

그와 동시에 화륜이 금종하를 자신의 방향으로 홱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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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 수치 : 23 / 120 (5▼)

금종하가 반쯤 넘어질 뻔했을 때 그의 앞으로 불타고 있는 나뭇가지 하나가 쓰러졌다. 근처의 문을 장식하던 문살 중 하나인 것 같았다.

화들짝 놀란 금종하가 몸을 움츠렸다. 그사이에 옆에 다가온 아이들이 다시 금종하를 다독였다.

“주, 죽을 뻔했다.”

금종하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대로 걸어갔다면 죽지는 않았다고 해도 큰 화상을 입었을 것이다.

“어! 문이다!”

그때 악소형이 소리쳤다.

그리고 모두의 얼굴에 환희가 스쳤다가 천천히 스러졌다.

“어, 문이긴 한데…….”

악소형의 말대로 그들의 앞에는 밖으로 향하는 마지막 문이 있었다. 불길에 휩싸이긴 했으되.

“……뚫고 갈 수 있는 거 맞아?”

금종하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악소형이 어깨를 움츠리고 말했다.

“진짜 군고구마가 되겠는데.”

“탄 고구마겠지…….”

팽주란이 탄식했다. 옆에서 모용설호가 엄한 얼굴로 말했다.

“고구마는 채소니까 우리는 따지자면 ‘양주 무림인 구이’에 가까운―.”

“그만.”

악소형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쳐 말했다.

“수서호 무림인 구이……?”

“그만!”

팽주란의 진절머리 난다는 외침에 모두들 작게 웃었다. 련마저 동나 가는 영기와 행운 수치를 가늠하다가 작게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그때 가까이 다가온 화륜이 조용히 물었다. 련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당연하지.”

“……지금 뭔가 무리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이미 바짝 마른 입술이 더욱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무리야 다 같이 하고 있지.”

련이 모두를 구할 수는 없었다. 자잘하고 사소한 불행과 사고에서 아이들을 구한 건 무애단의 무사들이었다.

“하지만 누이가…….”

“응?”

뭐라고 말하려던 화륜이 말을 그만두었다가 다시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니에요.”

련은 화륜이 하려다가 만 말이 궁금했지만 물어볼 여유는 없었다. 당장 아이들을 독려해 이 불지옥을 빠져나가야 했다.

“자, 여기만 나가면 군고구마 먹자!”

“조금 전까지 군고구마 안 먹어도 될 거라고 얘기하고 있었던 거 아녔어?”

“려, 련아 소저가 먹자고 하면…… 내가 고구마밭이라도…….”

그 순간 문짝이 풀썩 허물어지고 바깥으로 통하는 길이 드러났다.

확 일어나려는 불길이 아주 잠시 주춤한 순간.

“가자! 지금이야!”

다들 한 마디씩 하던 아이들이 종소리를 들은 강아지처럼 련이 손짓하는 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 * *

“이 미친 혈귀 놈들이 예가 어디라고 감히!”

남궁환이 일갈했다. 분노 아래에는 황당한 마음이 깔려 있었다.

그들의 검에 도륙된 침입자들은 산 채로 썩은 듯이 지독한 냄새를 풍겼다.

한 세가를 책임질 정도의 무력을 갖춘 자들이 한자리에 즐비해 있으니 침입자들을 처리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나, 그 수가 만만치 않았다.

“이놈들이 진정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이놈들이 언제는 제정신이었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

모용취려는 그렇게 말하며 표표히 검을 흩뿌렸다.

“이놈들이 다시 활개 치기까지 못해도 십 년은 더 걸릴 줄 알았건만…….”

악을 뿌리 뽑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걸 모용취려는 알고 있었다.

수십 년 전 단목천기도 혈라곡의 곡주를 물리치는 데 성공했지만 그들을 완전히 멸절시키지는 못했다.

혈라곡의 씨를 말렸다 하더라도, 아마 다른 것들이 다시 창궐했을 것이다.

‘차라리 다행인가?’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정정한 지금, 혈라곡을 상대한 경험을 가진 자들이 아직 많을 이때.

과거의 악을 깨끗이 씻어내는 데 실패했던 그들이 다시 후손들에게 깨끗한 환경을 물려줄 기회를 가졌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기껍기도 했다.

“아이들은?”

“무애단에서 데리러 갔소이다.”

침입자들이 다수 발생했다고 해서 흔들릴 남궁세가가 아니지만 그 침입자들이 전원 이 갑자나 되는 내공을 마구잡이로 흩뿌리며 나타난다면 얘기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미리 불순한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방비를 했기에, 그리고 여기가 남직례성의 거목 남궁세가의 성이나 다름없기에 이 정도 선에서 막아 낸 것이다.

“이 제정신이 아닌 움직임은 여전하군…….”

목적을 위해 막무가내로 쳐들어와 죽음까지 불사하는 이해 불가한 행위들.

전략도 없고, 자원을 아끼고자 하는 의도도 없으며, 그저 목표한 곳으로 매번 밀고 들어오는데, 왜 그것을 목표로 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이번만 해도 그렇다. 전력을 완전히 회복하지도 못했으면서 어찌 대뜸 남궁세가로 쳐들어온단 말인가?

하물며 이 자리에는 한때 혈라곡으로 하여금 피눈물을 흘리게 한 단목천기까지 있는데!

“세가에 무슨 꿀이라도 발라 두었나?”

모용취려의 말에 남궁환은 넌덜머리 난다는 듯이 고개를 내흔들었다.

“꿀 발라 놓은 걸로 치면 우리가 아니라…….”

“또 뒷담이나 종알대고 있나?”

“어휴.”

단목천기의 등장에 남궁환은 두 배로 고개를 휘휘 거세게 흔들었다.

단목천기가 마지막으로 검기를 싣고 달려오는 침입자를 제거하고는 칼을 뽑아냈다. 그 칼에 피 한 방울 묻어나오지 않은 것은 허공섭물의 또 다른 경지였다.

“자네 창궁단에서 몇몇을 생포했다고 하던데.”

“쓸모없는 짓들을 했군.”

남궁환은 혀를 찼다.

그들을 심문해 본 역사가 짧지 않았으나 유효한 답을 얻어낸 적은 거의 없었다.

광기 어린 상태로 명령만을 수행하는 자들은, 여유가 생기면 자신의 이지를 유지하기 위해 남의 피를 탐할 뿐 다른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알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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