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25)화 (125/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25화

“이놈들은 다 정리되었느냐?”

“현재 천화당 쪽으로 일부 도주한 것을 추격 중입니다. 그 외에는…….”

“천화당? 거기에 아이들이 있다지 않았느냐? 무애단이 아이들을 무사히 데리고 빠져나왔겠지?”

바깥에서부터 침입자들을 처리해 온 창궁단은 벌써 돌아왔는데 아이들을 지키라고 보낸 무애단은 천화당으로 갔다 한 뒤로 아직 소식이 없었다.

그런데 잔당들도 천화당으로 갔다는 건…….

그때 누군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불입니다! 천화당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침입자들의 짓으로 보입니다. 번지는 속도가 빠르니…….”

“뭣이라!”

순간 단목천기와 모용취려, 남궁환의 얼굴이 파리하게 변했다.

혈라곡의 화공(火功)이라면 그들 모두 지긋지긋했다.

혈라곡은 뭔가를 지키거나 남기거나 보존하는 데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가질 수 없으면 부숴 버리는 자들이었다.

단목천기의 흉터 역시 그들에게서 비롯하지 않았나!

“정리하는 인력은 최소한만 남기고 천화당으로…… 천기, 이 사람아!”

단목천기가 가장 먼저 달려 나갔다. 그와 동시에 희미한 연기였던 불길이 거세게 번져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육안으로 보일 정도가 되었다.

천화당은 건물과 정원이 모조리 불길에 휩싸여, 그 앞은 불을 끄려고 애쓰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물을 가져와! 더 뿌려라!”

“무, 물로는 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와아악!”

“모래, 모래를 뿌려라!”

목재가 깡그리 불타는 소리와 열기에 귀가 멀고 눈이 익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때 누군가 거친 호흡을 가다듬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이들이 이 안에 있다고요? 련아도요?”

온몸에 피를 흠뻑 묻힌 단목현우였다.

옆에는 나란히 피를 뒤집어쓴 남궁경무가 거의 죽을 것처럼 숨을 몰아쉬느라 말도 하지 못했다.

세가에 불이 번지는 걸 보자마자 달려와서는, 남은 혈귀들을 해치우고 여기까지 온 참이었다.

그와 동시에 멀리서 뛰어온 단목현요는 비명을 지르는 듯한 얼굴로 불길에서 눈을 떼고 창궁단 단주를 붙잡았다.

“현우 말이 무슨 뜻이오? 아이들이 아직 저 안에 있다고?”

“지, 진정…….”

“우리 딸이랑 내 조카들이 다 저기에 있다는데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단목현요가 쇳소리 나는 목소리로 외쳤다.

여기저기서 경항운련에 참가한 무림 세가 사람들이 달려오는 사이에, 단목현요는 더는 물로 불을 끌 수 없어 내버려 둔 물동이로 달려가 그대로 머리부터 물을 뒤집어썼다.

그녀가 두 번 정도 연거푸 양동이로 물을 퍼 올렸을 때, 단목현우가 달려와 그 양동이를 뺏고는 이번엔 자신이 물을 뒤집어썼다.

“내가 들어갈 거예요. 누이는 여기 있어요.”

“너까지 사람 힘들게 하지 말고 얌전히…….”

“련아를 두 번 잃는 꼴 못 본다고요! 그러니까 누이는 여기 있어요! 내가 갈 테니까!”

단목현우가 외쳤다.

자신 때문에 조카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한다는 생각만으로 어둠 속에서 살아온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한가하게 양주 시내를 구경하는 동안 조카가 불 속에서 죽어 갔다는 사실까지 감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감당할 수 없는 것은 단목현요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 돼. 넌 남아 있어.”

“싫어요! 내가…….”

짝!

순간 단목현우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단목현우는 아프기보다는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단목현요를 바라보았다. 단목현요가 말했다.

“아무도 돌아오지 못하면 네가 세가를 이어라.”

“허튼소리 마라!”

그 순간 들려온 단목천기의 외침은 천둥 같았다.

“아버지!”

“아, 아버지…….”

“환! 자네가 내 아이들 좀 잡아 주게.”

“뭐, 뭐?”

단목천기의 말을 듣고 얼떨결에 움직인 남궁환이 현요와 현우를 붙잡은 사이에 단목천기가 불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미쳤나, 자네!”

“이 얼굴에 흉터 하나 더 덧댄다 한들 누가 알겠느냐?”

“알지! 젠장, 알다마다! 무서운 게 더 무서워졌는데 당연히 알지! 거기 안 서?!”

친우를 향해 미친놈이 분명하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같이 들어가자고 난리를 치는 그 순간이었다.

타오르는 불꽃이 단목천기의 앞섶을 할퀸 바로 그때.

우지끈!

건물 한 축이 무너지더니, 그 틈으로 아이들이 입을 가리고 우르르 달려 나왔다.

가장 앞서 뛰어나온 건 단목비와 남궁서진이었다.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아이들 뒤로 다른 아이들이 따라 나왔고, 가장 마지막으로 련과 화륜, 정영, 그리고 무애단 무사들이 나왔다.

그와 동시에 불탄 건물이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허물어져 갔다. 지금까지 불타던 것은 가벼운 불장난에 불과했다는 듯이 더욱 거세게 타오르면서.

“성아야! 비아야, 련아야!”

남궁환의 손을 뿌리친 단목현요가 달려가려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서 아이들에게로 달려갔다.

딸과 어린 조카의 얼굴이 열기에 붉어졌긴 하지만 달리 다친 곳은 없다는 걸 확인한 그녀의 얼굴에서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처음으로 적과 마주하고, 불길 속을 헤쳐 나오면서 애써 의젓하게 굴었던 단목성 역시 어머니의 쏟아지는 눈물 앞에서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비아야, 련아야! 어디 보자. 이 고모가 얼굴 좀 보자.”

단목현요는 스스로 울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단목현우는 뒤에 서서 멍하니 조카들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스르르 주저앉았다.

아이들이 제각기 자기 보호자를 찾아가 울다가 쓰러지고, 의원들이 들이닥쳤다.

단목현요는 그중에서 제일 침착해 보이는 의원을 매가 다람쥐 낚아채듯 끌고 왔다.

“우리 조카가 이리 피를 흘렸으니 얼른 봐 주시게!”

아름다운 얼굴이 눈물로 얼룩져 매섭게 윽박지르니, 침착했던 의원도 놀라서 소스라쳤다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장차 큰일을 할 아이인데 몸에 흉이라도 남으면 내가 경을 칠…….”

“어, 어머니. 무림인에게 흉터는 훈장이지요.”

눈물을 쓱쓱 닦아 낸 단목성이 얼른 어머니를 만류했다.

단목현요가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리며, 다소 억울한 얼굴로 딸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성아야……. 그래도 너흰 아직 어린데 벌써부터 무슨 흉이란 말이니!”

“고, 고모. 저는 진짜 괜찮아요. 이건 스친 거예요. 성아랑 비아하고 륜아부터 다친 데 없는지 보고…….”

그때 계속 표정이 없던 화륜이 불쑥 말했다.

“이게 뭐가 스친 거예요? 한 치만 더 들어갔어도 큰일 날 뻔했는데.”

“뭐라고!”

단목현요가 대경실색해서는 의원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의원이 뭔가 해 보기도 전에 련이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비틀거리더니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련아야! 련아! 단목련!”

“누이!”

“누이! 누이!”

* * *

련은 멍하니 눈을 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달이 뜨고 주위가 어두운 걸 보니 밤인 것 같았다.

발끝을 꼼지락거리고, 이불 안에 들어 있는 양손도 쥐었다 폈다 했다.

‘몸은 괜찮은 것 같은데……. 다른 애들은 다 괜찮나? 혈라곡은 처리했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면 가까이에서 등불이 사르르 타들어 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사람 숨소리도…….

“뭘 좋다고 웃어요?”

“……!”

련은 깜짝 놀라서 눈을 떴다. 옆에는 무표정한 얼굴의 화륜이 앉아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깜짝이야……. 기척 좀 내고 있어. 쳐다보는 줄도 몰랐네. 너는 괜찮아? 어디 안 다쳤어? 일어나서 밥은 좀 먹었고?”

“…….”

“열은 안 나? 목이 따갑고 그러진 않아?”

련이 일어나서 손을 뻗어 화륜의 이마에 올렸다.

“열은 없는 것 같…….”

탁!

그때 화륜이 그 손을 내쳤다. 련은 얼얼한 손을 붙잡고 놀란 얼굴로 화륜을 쳐다보았다.

“륜아야……?”

“대체 뭐예요?”

“뭐가?”

“한번 죽어 봐라, 뭐 그런 거예요?”

“아니, 다 살려 나왔는데 무슨 소리야.”

“그게 죽어 보라는 거 아니었냐고요. 다 살려 나오기는 무슨, 정작 본인이…….”

언성을 높이려던 화륜이었으나 이윽고 말을 삼켰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며 의원이 나타났다.

“아이고, 일어나셨군요, 아가씨.”

“아…… 다른, 다른 사람들은? 다들 괜찮대?”

련은 무표정한 얼굴로 옆에 선 화륜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의원에게 물었다.

의원은 어쩔 도리가 없다는 얼굴로 빙긋 웃었다.

“그러믄요. 아가씨께서 다 구해 오셨다면서요. 모두들 날밤을 새우며 아가씨 일어나시기만 기다리다가 바로 조금 전에 잠들었답니다.”

“내가 구해 왔다기보다는 다 함께 나온 거지. 그런데 세상에…… 며칠이나 됐어?”

“사흘 됐지요.”

“다들 걱정했겠네…….”

화륜이 ‘지금 남의 걱정이 문제냐?’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의원이 격하게 동감한다는 눈빛을 보냈다.

“사흘이나 누워 계셔서 걱정했습니다만 별다른 이상은 없으신 것 같습니다. 다만 천천히 산책부터 시작해서 차근히 움직이시는 것이…….”

벌컥!

“련아가 일어났다고? 련아야!”

“누이이이!”

의원이 말을 맺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며 단목현요가 들이닥쳤다. 그 뒤를 따라서 단목비와 단목성도 달려왔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