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26화
단목현요는 눈 밑에 그늘이 지고 그 며칠 새 살이 내려 턱선이 더 날카로워졌다.
함께 들어온 단목현우와 단목천기가 아무 말 없이 지켜보기만 하는 사이에, 단목현요가 련의 양 뺨을 눌러 잡고 이리저리 돌려보며 빠르게 물었다.
“아픈 데는? 헛것이 들리거나 열이 오르거나 하지는 않고? 내 말은 똑바로 잘 들리느냐?”
그러곤 련이 대답할 새도 없이 의원을 붙잡고 닦달했다.
“이상이 없는 게 맞는가? 아이가 말을 못 하는데 목이 안 좋은 것 아닌가? 내 알아보니 화재 이후에는 목과 폐가 상한다고들 하는데…….”
“아니, 아니에요! 고모, 저는 괜찮아요.”
“누이이이…….”
괜찮다고 말을 하긴 했지만 며칠이나 누워 있다가 말을 하는 것이라 목소리는 한껏 잠겨 있었다.
단목비가 낯선 누이의 목소리에 눈물을 뚝뚝 흘리며 단목현요와 누이 사이로 파고들어 칭얼칭얼 련에게 안겼다.
련은 그런 동생을 보듬어 주며 간신히 미소를 그렸다. 의원도 땀을 흘리며 말했다.
“그…… 그렇습니다. 천지신명께서 돌봐 주신 것이 분명합니다. 아기…… 아가씨께서는 건강하시고, 다만 며칠간 누워 있었으니 산책부터 시작해서…….”
“며칠이나 누워 있기만 했는데 건강하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인가?”
‘이거 돌팔이 아니야?’라는 눈빛을 받은 의원은 보호자의 도를 넘어서는 반응이 익숙한지 허허 웃기만 했다.
“고모, 고모! 저 진짜 괜찮아요. 벌모세수 받은 게 진짜 좋았던 것 아닐까요?”
“그런가……? 정말 괜찮은 게 맞니?”
“네, 네. 사실 바로 달리기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의원 말이 산책부터 하라며? 절대 달리지 말고! 알겠니.”
“네, 넵.”
때를 노려 의원이 주의사항을 좀 더 알려 주자, 단목현요가 되새기듯 다시 반복했다.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거, 걱정은 무슨! 내가 무슨 걱정을 했다고 그러니? 너한테 무슨 일 생기면 네 어머니 볼 낯이 없어서 그랬다.”
단목현요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그녀의 뜻대로 방을 박차고 나가는 데는 실패했다. 단목현요는 현기증이 일었는지 비틀거리다, 고집을 부려 그대로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실패하고서 반쯤 주저앉고 말았다.
단목현요는 끝까지 괜찮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처소로 겨우 돌아가자마자 탕약을 들이켜고는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
누이가 쓰러져 있는 동안 훌쩍거렸던 단목비도 다신 누이 곁을 떠나지 않겠다며 련의 침상 가장자리에 구겨져 겨우 잠들고, 단목천기와 단목현우만 남아 간신히 주위가 고요해졌을 무렵이었다.
련은 바닥에 물방울 툭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가 탄식을 흘렸다.
“숙부…….”
단목현우는 그냥 서서, 울고만 있었다. 턱을 타고 그의 눈물이 후두둑 흘러내렸다.
단목천기는 그런 아들을 힐난하지 않고서 묵묵히 등을 한번 쓸어내려 주었다.
단목현우는 마치 전혀 울지 않았다는 듯이 눈물을 훔쳐내고 련의 침상에 자리 잡고 앉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고 흐르기만 했다.
“이제 그만 그치거라.”
결국 단목천기가 한마디 했는데, 단목현우는 이미 다 젖은 소매로 눈가를 닦아 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게 제 마음대로 되는 일이겠습니까?”
“그렇다고 이제 겨우 일어난 조카 앞에서 네가 그리 울 일이냐?”
“아버지는 제 맘도 모르고.”
“너는 아느냐? 내 맘을? 허이고.”
티격태격하느라 간신히 단목현우가 눈물을 조금 그치고는 련의 손을 꼭 붙잡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심초사했는지 아느냐?”
“혹시 저만…… 쓰러졌어요?”
“그래! 다들 네 덕분에 그 불길을 헤쳐 나왔다고 하는데, 너만 덜컥 쓰러져 여태 정신을 못 차리니 이 숙부 애간장이 다 녹았다. 보여 줄 수 있었으면 이렇게 손 틈새로 줄줄…….”
“무슨 징그러운 소리를 하고 있어!”
“아버지 얼굴보단 안 징그럽잖아요.”
“하하, 이놈이?”
“련아야, 네 할아버지가 저 흉터 더 늘려도 상관없다고, 어? 너를 찾으러 불길 속으로 들어가겠다고 하셨다. 네 할아버지부터 혼내 주렴.”
“아니, 그러는 네 녀석은!”
뭐라고 벌컥 외치려던 단목천기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차마 ‘너는 죽으려고 했지 않았느냐.’ 라는 말을 다시 꺼낼 수 없어서였다.
자식이라고 있는 것들이 하나같이 제 목숨 아낄 줄을 몰라 탄식했으나 ‘아주 쏙 빼닮았지 뭐.’라는 남궁환의 투덜거림에 스스로 반성부터 했던 단목천기였다.
“됐다. 이제 일어난 아이 앞에서 그만 소란 떨거라.”
“소란은 아버지가…….”
눈물을 훌쩍거리면서도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던 단목현우였으나 부친의 부리부리한 눈빛을 받곤 겨우 입을 다물었다.
단목천기는 며칠 동안 얼굴이 반쪽이 되긴 했으되 생기로 충만하여 별빛이 떠오른 손녀의 눈동자를 보고 간신히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네 조모가 보거든 얼마나 꾸중을 할지…….”
“네? 저희 어머니 뵈러 가나요?”
단목천기는 ‘제발 채신머리 있게 행동할 수 없겠느냐?’ 하고 버럭 외치려다가, 자신이 수년간 아들의 철없는 모습만 바라 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리곤 헛웃음 지었다. 사람의 마음이 이토록 간사하다.
“그래, 보러 갈 것이다. 경항운련이 끝나면.”
“정말, 정말요?”
“그래. 네 누이가 알면…….”
“기절할 정도로 기뻐할 거예요!”
양손을 번쩍 들고 활짝 웃는 얼굴이 눈물로 얼룩져 엉망진창이었다.
간신히 진정이 되고 나서야 단목천기가 말했다.
“혈라곡 혈귀들이었다.”
“그런 것 같았어요. 벌써…….”
“완전히 기세를 회복한 것 같지는 않더구나. 다들 미숙하기 짝이 없었다. 너희가 상대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말 다 한 셈이지.”
아이들은 나와서 몸을 회복하자마자 천화당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몽땅 털어놓았다.
아직 어린 아이들에게 그 안에서 있었던 일은 큰 감명을 남긴 것 같았다.
단목천기는 그 얘기를 다 듣고, 련이 정신을 차리거든 어찌 그리 무모한 짓을 했느냐고 꾸중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이 그랬고 빙설언이 그랬고 단목현성이 그랬는데, 그런 단목현성의 딸로 태어나 보고 배운 것이 그런 것뿐인 손녀를 어찌 탓할 수 있으랴.
“그런데 혈라곡이 대체 왜 이렇게 갑자기 들이닥친 걸까요? 바보같이…….”
손녀가 그의 애타는 속도 모르고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의아해하기만 했다. 단목천기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찾는 게 있었던 모양이다. 이번에 남궁세가에서 새로운 영단을 빚었다고 하는데 그걸 노린 것 같다더구나.”
“영단이요?”
너무 상식적인 물건이 거론되어 련은 도리어 놀랐다.
“혈라곡의 기이한 무공은 빠르게 광증을 유발하고 피를 마셔야만 그 증상이 완화되지만 그것도 잠시라지.”
“아! 영험한 힘이 깃든 영단을 복용하면 그 광증을…….”
기본적으로 영단이 내공을 증진시켜주는 기물이기에 노리기도 하겠지만, 혈라곡의 탐욕은 도가 지나쳤다.
“동정혈사 전후로 소림사가 얼마나 많은 공격을 받았는지 말도 못할 것이다.”
소림사의 대환단과 소환단은 강호에서 누구나 알아주는 내단이니, 혈라곡에서도 엄청나게 그걸 노렸다는 얘기였다.
그때 퍼뜩 련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게 있었다.
“정말 남궁세가에서 만든 걸 노린 게 맞아요? 저희도 있잖아요. 모용세가에서 전해 준…….”
모용세가에서 준 것도 한 방에 수십 년 이상의 내공을 증진시켜 주는 영단이었으니 소규모 장원에서는 가보로 삼을 수도 있는 물건이었다.
“나도 처음엔 그 때문인가 했다. 처음에 그놈들이 접객당 쪽으로 우르르 몰려갔으니. 한데 남은 놈들이 천화당으로 갔던 걸 보면 아마 남궁세가의 내단을 노린 것이 아닌가 하구나.”
“그게 왜 남궁세가의 물건을 노린 게 되는…….”
련의 얼굴에서 천천히 핏기가 가시기 시작했다.
“설마 내단이 천화당에…… 보관이…… 되어…….”
천화당은 전부 불타 소실되었는데!
련의 아득한 얼굴을 보고 단목천기가 조금 놀랐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네가 한 일에 비하면 그깟 내단이 불에 탔다는 거야 우스운 일인데 그리 놀라느냐?”
“혈라곡에서 노릴 정도의 내단이잖아요! 그런 거면 내공이 얼마야……!”
련은 손가락을 꼽아 보다가 정확히 어떤 내단인지 못 들었다는 걸 깨닫곤 도로 손을 이불 안으로 집어넣었다.
“내단은 천화당 지하에 만들어 둔 비밀 창고에 보관하고 있었다더구나. 만든 영단은 모두 무사하다며 우리에게도 하나 내주었다.”
“네?”
“남궁세가의 후계가 전부 불에 타 죽을 뻔한 걸 살려 줬는데 그깟 영단이야 약소한 것이다.”
“어.”
련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렇게 영단이 많아요?”
“뭐라?”
“거기에 사람이 몇 명이나 있었는데 다 나눠 먹을 수 있을 정도인지는…….”
련이 머뭇대며 하는 말에 단목현우가 그제야 웃었다.
아직 눈가는 젖어서 빨갰지만 웃음을 머금자 얼굴에 생기가 돌아오는 듯 보였다.
“무얼 모두에게 다 나눠 주느냐? 네가 그 애들을 다 구했다면서, 몇 번이나. 그러니 감사의 뜻으로 네게 주는 거지.”
“그래도 다시는…….”
다시는 그러지 말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온 단목천기였으나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