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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27화
일평생 강호의 거친 물살을 헤치며 협행을 가슴속에 품고 살았다.
칼끝에 협이 없다면 힘세고 잔혹한 무뢰배들과 다를 바가 무어란 말인가.
가문의 영달을 이루는 수없이 많은 길 중에 무(武)를 택한 까닭은 첫 번째가 그 힘으로 가문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함이고, 두 번째가 그들을, 약자를 위협하는 불의에 지지 않기 위해서였지 않은가.
그런데 단목현우가 불쑥 말했다.
“그래도 다시는 그러지 말아라, 련아야.”
“숙부……?”
어리고 앳된 얼굴 위로 동그란 눈동자가 기울어졌다.
단목현우가 엄하게 말하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옛 성현이 이르시길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 하지 않았느냐? 뭐 우리는 무림인이니 나랏일은 건너뛰면 수신, 제가, 평천하일진데 네 한 몸 건사하지 못하면서 무슨 평천하겠느냐?”
“숙부…….”
“너부터 무사해야 한다. 남을 지키는 건 그다음 일이다. 알겠느냐? 아버지도 한마디 하세요. 칭찬만 해서 될 일입니까, 이게.”
단목천기는 앓는 소리를 삼켰다. 꾸중을 하라는 것치고 단목현우는 몹시 애달픈 얼굴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단목천기가 나직이 한숨만 내쉬는 사이에 단목현우가 련의 손을 잡고 소곤거렸다.
“성아와 비아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 네 고모도 잠 한숨 안 자고 네 침소를 지키다가…… 나도 얼마나 걱정했는데. 네 할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다. 너 하나 잘못되면 집안이 이렇게 다 엉망이 된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겠지?”
“그…… 아니…… 네……. 하지만 제가 불로 뛰어들지도 않았고, 혈귀들이 나타난 건…… 그렇긴 하지만…….”
련이 더듬더듬 변명을 늘어놓았다. 위험한 일에 먼저 나선 것도 아니었고, 주변을 구했다고 해도 혈귀 한 놈을 간신히 상대했던 것이 전부요, 화재 속을 헤쳐 나올 때는 옆으로 잡아당겨 준 것 정도인데…….
그런데도 단목현우는 뭐라고 엄하게 말하려 했으나 결국 더는 말을 못하고 련을 꼭 끌어안기만 했다.
련은 자신을 끌어안은 숙부의 품이 예전보다 조금 더 헐거워서, 그만 눈을 꼭 감고서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조심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정말이에요, 약속할게요, 그런 말을 중얼거리면서.
* * *
탕약을 한 사발 들이켜고 가족들을 돌려보낸 뒤 한숨 자고 다시 일어나자 새벽이었다.
해가 떠오를락 말락 해서, 련은 의원이 했던 산책 얘기를 떠올리곤 슬그머니 처소 밖으로 향했다.
새벽이라 인기척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숨을 가볍게 들이마시자 몸이 가벼워진 게 느껴졌다.
‘이대로 허공답보도 할 수 있는 거 아닐까?’
혼자 든 생각에 킥킥 웃으려는데 누군가 뒤에서 손을 덥석 잡았다.
“어, 륜아야!”
련은 그제야 가족들이 들이닥친 바람에 화륜과는 제대로 된 얘기를 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벌써 일어났어?”
“제가 할 말인데요.”
“나는 뭐 사흘 내내 잠만 잤잖아. 졸리지가 않아.”
“자랑이에요?”
“자랑은 아닌데…….”
련은 저도 모르게 화륜의 눈치를 살폈다. 화륜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그녀가 눈을 떴을 때부터 그랬다.
어쩌면 불길 속에서부터, 아니면 그보다 더 이르게 혈라곡의 혈귀들을 마주했을 때부터…….
“나 때문에 걱정 많이 했어?”
“하나도 안 했는데요.”
그제야 화륜의 표정이 조금 뚱해졌다. 련은 오히려 조금 안심했다.
“와, 진짜 놀라긴 했지. 벌써 혈라곡이 나타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그러게 말이에요…….”
“우리 할아버지 보러 왔던 사람들도 다들 도와줘서 양민들 중에서도 다친 사람은 없다더라. 운이 좋았어, 그렇지?”
“운이 좋았으면 혈귀들이 안 나타났겠죠.”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련의 말에도 화륜은 동의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잠깐 뚱한 표정이나마 지었던 것도 도로 사라졌다.
“……동생들 데리러 간다고 했던 것도 그냥 무애단을 보냈으면 됐잖아요.”
“내 동생도 거기 있었는데 어떻게 그래.”
“그게 뭐라고 직접 가야만 한다고 하는 거예요?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던 거 아니에요?”
“꼭 알았다기보다는…….”
“이상한 걸 알았으면 다른 사람들한테 맡겨야죠.”
“나도 일이 그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니까. 그냥 뭔가 이상한 낌새가 있으니까 비아 빨리 데려와야겠다, 한 거지.”
련은 그렇게 말하며 화륜을 빤히 쳐다보다가 활짝 웃었다.
“이 누이가 위험할까 봐 걱정이 많이 됐구나, 우리 륜아!”
“걱정 진짜 하나도 안 했거든요. 일의 효율을 따지는 거라고요.”
“그래서 다 살아 나왔잖아. 효율이나 이득으로 치면 이만큼 큰 소득도 없는데?”
화륜은 소리 지르고 싶다는 얼굴로 련을 쳐다보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손을 휘적휘적 흔들었다.
“아, 몰라요. 됐어요. 마음대로 해요, 마음대로.”
“우리 륜아가 삐쳤네.”
“그거 진짜 사람 열받게 하는 거 알죠. 화났는데 삐쳤냐고 하는 거.”
“우리 륜아가 화가 많이 났네.”
“아 진짜 ■■ 짜증나…….”
“■■?”
화륜이 자신의 입을 때리고 싶다는 표정으로 련을 쳐다보았다.
“……애 앞에서는 찬물도 못 마신다더니…….”
“내가 너보다 두 살 많다, 이 꼬맹아.”
“이젠 키도 제가 더 크거든요.”
“진짜 조금 더 큰 거잖아. 아니 근데, 그래도 그렇지…… 너 사람이 아니라 죽순이야? 어쩜 이렇게 빨리 크지?”
“…….”
“흠. 죽순인 건 좋은 일이지. 올곧은 대나무처럼 쑥쑥 자랄 수 있으니까.”
“심한 말 해 놓고 대충 좋은 말로 얼버무리지 말라고요.”
련은 웃음을 터뜨렸다. 툴툴거리는 화륜은 그제야 기분이 조금 풀린 것 같았다. 련은 그런 화륜을 끌고서 나란히 처마 끝을 따라 산책하며 물었다.
“너도 알잖아. 큰 사고였긴 하지만 다들 무사히 나왔고 나도 무리 안 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르니까 그런 거겠죠.”
“뭘 몰라?”
“누이가 무슨 생각으로 비아를 데리러 가자고 했는지 모르니까요.”
화륜의 눈동자는 차분하다 못해 조금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 일 있을 줄 몰랐다는 얘기 거짓말인 거 알아요. 우연히 동생을 데리러 갔다가 그 자리에 있게 된 게 아니었잖아요.”
뭔가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위험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간 것임을.
“동생이니까 그렇지. 가족이니까.”
“단목비가 아니라 남궁서진만 있었대도 갈 거였잖아요.”
화륜은 그렇게 말하다가 혼자서 또 살짝 열이 뻗쳤는지 련의 손을 놓고는 팔짱을 끼고 섰다.
“안 지 일 년도 안 된 하인이 거기 있었대도 데리러 갈 거였죠?”
련은 심통 난 표정으로 한껏 입술을 삐죽였다.
“아니.”
“…….”
“안 갈 건데. 알아서 하라고 놔둘 건데. 우리 집 애도 아닌데.”
“…….”
그러나 련은 곧 그 표정을 사르르 무너뜨리고는 화륜의 손을 붙잡고 흔들었다.
“막상 내가 안 간다니까 약간 서운하지.”
“……아니거든요.”
“서운한 거 다 알거든?”
“아니라고요.”
“아니, 네가 매번 그러지 말라고 하니까. 너한테 한 소리 들을까 봐 일부러 안 간다고 한 거잖아.”
“……말 한마디로 사람 농락하니까 재미있어요?”
“농락 아닌데? 재밌긴 하다 야.”
“두고 봐. 복수할 거야.”
“죽순이라도 나보다 아기 죽순이면서 또?”
“두고 봐요. 복수할 거예요.”
“그래, 그래!”
“하…… 내가 2년만 일찍 태어났어도.”
“바꿀 수 없는 건 집착하지 말고 내버려 두는 게 좋아.”
“소림사로 들어가시려고 그러세요?”
“이 꼬맹이가.”
련은 화륜의 기분이 완전히 풀린 걸 느끼고는 방긋 미소 지었다.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내 꿈이 뭔지 말 안 해 줬나?”
“뭔데요?”
“무사고! 무재해! 무병장수!”
“하…….”
“아니, 좋은 거 말해 줬는데 왜 또 한숨 쉬는 건데.”
“■■ 어려운 거잖아요. 쉬운 게 아닌데. 보통 일이 아니라고요.”
“그게…… 그렇긴 한데……. 너 방금 또 욕했다…….”
화륜은 련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뭐 부귀영화 천하재패 이런 것도 아니고. 무슨 무사고 무재해 무병장수야, 진짜.”
“아, 아니, 너 부귀영화에 천하재패는 쉽니?”
“그건 그냥 하면 되잖아요.”
“천하재패가, 그게 한다고 되는 거야?”
“열심히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러려고 세가 꾸리는 거잖아요. 천하제일 세가가 아니라 천하에서 두 번째 세가 되려고 하는 거예요?”
“그게……. 물론 다들 천하제일이 되려고 하긴 하는 건데…….”
“부귀영화야 뭐 돈 많고 보석 많고 재물 많으면 되는 거고.”
“돈이랑 보석이랑 재물은 흙에서 난대?”
“무사고 무재해 무병장수보단 쉬운 것 같은데요. 벌써 무사고는 박살 났는데.”
“나한테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아직 무사고야.”
“없긴요? 어깨 완전히 베였잖아요.”
“거기서 더 심하게 베이지는 않았으니까…….”
련은 그렇게 말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사실에 눈을 깊이 떴다.
“네가 한 거였지?”
“뭘요.”
“그때 네가 뭔가 던져서 그 혈귀가 비틀거린 거였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