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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29)화 (129/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29화

“고작 그거 가지고 너무 많다고 해요?”

“아니 너는…….”

남궁세가는 화륜의 옷도 한 벌 새로 맞춰 주었다. 련이 뭘 해 주려고 하는 건 다 질색하면서 남이 주는 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입어 련을 서운케 한 바로 그 옷이었다.

세심한 자수가 놓인 고급 비단으로 꼭 맞게 옷을 해 입히자,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화륜은 경항운련에 참석한 어느 세가의 후계자처럼 보였다.

그 비단옷들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 듯 거침없는 행동거지가 더욱 그런 인상을 강화했다.

“너는…….”

“저는 뭐요?”

“잘 어울리니 됐다. 우리 륜아가 검은 비단이 잘 어울리네. 단목세가 돌아가서도 한 벌 맞출까?”

“됐어요.”

“나 진짜 속상해.”

련이 대번에 정색을 하자 화륜은 ‘속는 것 같은데……’라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련에게 다가갔다.

“왜, 왜요. 뭐가요. 제가 뭐 잘못했어요?”

“너는 우리 집에서 해 주는 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받으려고 하면서 이런 데서 그냥 뿌리는 건 마구 받는다?”

“……이건 그냥 받을 만했잖아요. 같이 고생하고 가진 건 다 탔으니까 준다는 거 그냥 받은 거죠.”

“우리 집에서도 같이 부대끼고 살면서 가족끼리 옷 한 벌 해 줄 수도 있잖아.”

“이거 있으니까 됐어요.”

“넌 죽순처럼 자라니까 옷도 곧 작아질걸?”

“그럼 그때요.”

련은 그런 화륜을 슬그머니 노려보다가 련이 들고 있는 부채로 고개를 돌렸다.

“매번 더위만 타더니 부채가 그렇게 좋아요?”

“필요해서 어쩔 수 없이 그런 거야.”

련은 그렇게 말하며 작게 부채를 펼쳤다.

우화륜

특성 : 천마파순 / 일부 동기화에 실패했습니다.

낙성십이검 : 3성 (1성▲)

일부 동기화에 실패했습니다.

자질과 오성 : 일부 동기화에 실패했습니다.

고민 : 일부 동기화에 실패했습니다.

‘그래…… 처음부터 기대도 안 했다.’

천마파순이라는 특성이 사라질 거라고도 믿지 않았고 다른 뭔가가 뜰 것 같지도 않았다.

다만 그 와중에도 화륜이 익힌 낙성십이검의 성취가 조용히 1성 올라 있는 것만이, 오히려 그녀를 상심하게 했다.

‘뭐 연습하는 거 보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성취가 부쩍부쩍 늘지?’

“또 뭐라고 하려고요. 무슨 심통을 부리려고 그런 얼굴로 쳐다봐요?”

“내가 심통만 부리는 사람이니?”

“뭐…… 그래도 상관없지만.”

“또 정 없는 소리 하려고 그러지?”

“아니, 정말이라고요.”

화륜은 억울한 표정으로 뭔가 말을 하려고 했다가 도로 다물었다.

마음껏 심통 부려도 괜찮다니까요, 라는 말이 왜인지 낯간지럽게 느껴져서였다.

련은 몇 번 더 화륜이 하려다 만 말을 추궁하려고 했지만, 화륜은 끝까지 대답해 주지 않았다.

* * *

모용세가에서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했던 영단은 만장일치로 단목세가가 가져가게 되었다.

수업을 진행한 가주들이 모두 동의하고 수업을 같이 들은 아이들도 동의한 일이었다.

배후를 캐는 일은 그다지 순조롭지 않은 눈치였지만, 어른들 중 혈라곡과의 전투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큰 기대는 하지 않은 눈치였다.

“아버지 말씀으론 다시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고만 하셨어.”

“준비?”

“아무래도 혈라곡이 완전히 멸절한 것 같지 않대. 완전히 부활한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제 우리가 상대하게 될 수도 있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경항운련이 마무리되었다. 원래 하기로 했던 강연 몇 개가 취소되었지만 다들 개의치 않았다.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은 각자 세가로 돌아가 이 사실을 전하고 정비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마지막 밤이라 아이들은 지난 일주일간 해 온 것처럼, 거처의 마당에 등롱을 세워 두고—큰 화재 직후라 모닥불은 허락받지 못했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예상했던 것보단 좀 빠르지만…….”

련의 대꾸에, 지금껏 곁에서 기죽은 듯 말을 걸어온 남궁서건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넌 예상을…… 했어?”

“지금 말고. 10년쯤 뒤에는 이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그랬구나.”

련은 슬쩍 선물받은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어 선경을 띄웠다.

남궁서건

특성 : 표리부동 / 자부심 / 목에 부목 / 작학관보(雀學觀步)

자질과 오성 : 중-하

창궁무애검(蒼穹無涯劍) : 4성 (1성▲)

창궁대연신공(蒼穹大衍神功) : 1성

천풍신법(天風身法) : 3성 (1성▲)

고민 : 난 아무것도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구나.

도움말 : 자신을 직시하는 것은 때론 아프지만 도움이 됩니다.

‘도움말이 제일 아픈 것 같은데…….’

처음 혈라곡 혈귀들과 마주했을 때도 남궁서건은 동생들을 지키는 역할이었고 그 뒤에도 일행을 뒤따라가기만 했으니, 본인 생각에는 아무래도 자기 자신이 그저 무능력하게만 느껴진 것 같았다.

“왜? 나보다 늦게 안 것 같아서 자존심 상해?”

“그, 그런 생각 하지 않았다.”

남궁서건이 얼굴까지 붉히며 부정했다. 련은 남궁서건의 말에 침묵으로 응했다.

련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남궁서건은 한참이나 민망해하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냥 다들 똑똑하고, 제몫을 하고, 강한데……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제멋대로 말하고 다니는데도 련과 친구가 되고 아무에게도 미움받지 않는 모용설호가 부러웠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가 재능으로 충만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래 중에 그 누구보다도 명석한 련의 말을 단숨에 이해할 수 있고, 압도적으로 강하고, 노력까지 게을리 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소년 소녀들은 그를 동경하는 마음 탓에 그를 미워할 수가 없다. 그가 틀린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남궁서건 그에게는 요원한 일이었다. 남궁서건은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난 그런 상상 한 적 있어.”

“무슨 상상?”

“피곤하니까 나한테 말 걸지 마! 라고 말해 보는 상상…….”

남궁서건은 괜히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니까 어땠어?”

자신이 그런 나쁜 말, 혹은 남에게 우쭐대는 말을 하는 걸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그런 상상을 한 날은 꼭 악몽을 꿨다.

주변 사람들이 ‘네깟 게 대체 뭐라고 그딴 소리를 해?’라고 말하는 꿈.

남을 괄시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굳이 말과 단어를 고르고 골라서 잘 보이려고 애쓰지 않는 건 어떤 기분일지 생각해 보고 싶었던 것뿐이었는데도 그렇게 됐다.

“그냥 나쁜 꿈만 꿨어……. 아마 내가 제몫을 다하는 사람이었으면 그렇진 않았겠지? 그런 말을 해도…… 다들 참아 줬겠지?”

“그렇진 않을걸.”

“…….”

“서진이만 해도 설호랑 거의 견원지간이잖아.”

이 모임에서 아마도 가장 재능이 출중할 두 소년이었으나 둘의 사이는 살갑지 않았다.

나이 차이도 있거니와, 서진은 자신의 형에게 심한 말도 서슴지 않는 설호라면 싫어 죽겠단 표정으로 노려보곤 했던 것이다.

그 유순한 남궁서진이!

“그건…… 그렇긴 한데. 그건 서진이가 내 동생이니까…….”

“누군가가 한정 없이 이해와 지지를 받는 것 같다면 그건 그 사람이 유능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사랑받기 때문이야.”

“그게 그 말 아니야?”

“전혀 다르지! 내가 벌모세수 받은 건 알지?”

“아…… 어, 어어…….”

남궁서건이 급격히 눈치를 살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나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누워 있기만 하는 애였는데 왜 세가에서 벌모세수를 해 줬겠어?”

“어…… 그건…….”

“그건 할아버지하고 어머니가 날 사랑하니까.”

“…….”

“내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어린애여도 나를 사랑하니까 다른 가능성을 쥐여 줄 수 있는 거라면, 뭐라도 해 주려고 하신 거지…….”

그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 한 구석이 메이곤 한다.

두고 온 미래는 이제 없어졌는데도…….

“유능해지고 싶으면 뭐 어쩔 수 없잖아. 노력해. 힘들 수는 있겠지만…….”

남궁서건이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난.”

“사랑받고 싶은 거면, 넌 이미 잘 하고 있잖아.”

“난…… 뭐?”

“서진이가 널 그렇게 좋아하잖아. 너희 아버지가 나한테 무조건적인 지지를 해 주겠다고 한 건 너희 형제를 구해 줬기 때문이고.”

“아버진, 할아버지는 아마 나보다 서진이를 조금 더…….”

련은 손가락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잘 봐 봐. 너랑 서진이랑 3살 차이 나지.”

“어? 어어…….”

“그럼 넌 살면서 3년간 네 아버지의 사랑을 10할 전부 독차지한 시간이 있는 거야.”

“아……. 하지만 서진이가 태어나고 나서부터는.”

“서진이가 아무리 관심을 많이 받았어도, 서진이랑 너랑 6대 4나 음…… 7대 3 정도 아니야?”

“……6대 4는 됐을 거야…….”

“그러니까 말이야. 서진이는 부모님 관심을 완벽하게 독차지한 시간이 없잖아. 그 뒤는 좀 너도 참고 나눠 가져라. 네가 무슨 일을 하든 서진이가 널 많이 도와줄 텐데.”

“그냥 내가 잘하고 싶어.”

남궁서건이 말했다.

“내가 그냥…… 잘해서 다른 사람 도움 같은 것 없이, 스스로 잘하고…….”

“너도 소림사 가려고 그래?”

“뭐?”

“깨달음을 얻어서 득도하고 싶다는 거 아니야? 우화등선? 아, 이건 소림사 쪽이 아닌가? 화산으로 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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