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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30화
“무…… 무슨 소리야.”
“득도해서 신선이 되거나 깨달음을 얻어서 부처가 되거나 할 게 아니면, 서로 다 도우면서 살아야 한다고.”
“…….”
“그러니까 너희 아버지가 날 도와주겠다고 하신 거야. 내가 너흴 구할 수 있을 정도로 똑똑하고, 제 몫을 다한다고 해도, 그래도 언젠가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날이 올 테니까.”
순간 련의 눈앞에 빛이 번쩍 번졌다.
* 남궁서건의 깨달음 *
* 남궁서건의 심정적 변화 *
행운 수치 : 56 / 120 (9▲)
잠깐 멍하게 있던 련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옆에서 나란히 멍하게 있던 남궁서건이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또 왜 웃는데? 나 아무 말도 안 했잖아.”
“가만 보면 넌 남들한텐 다 잘하면서 나한테는 은근히 툭툭대.”
“넌…….”
뭐라고 말하려던 남궁서건이 발끝으로 흙바닥을 툭툭 문지르고는 고개를 돌렸다.
“몰라, 너랑은 처음부터 잘 안 맞았잖아.”
“네가 듣고 싶은 소리 안 해 줬다고 그래?”
“그래.”
남궁서건이 툴툴거리듯 대답했지만 정말로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련은 또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홀린 듯 고개를 돌린 남궁서건은 등롱의 빛이 비쳐 금빛 선을 그리는 작은 소녀의 옆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얼른 정면으로 눈을 돌렸다.
“……이제 내일이면 떠나겠네.”
“응, 서진이 괴롭히지 말고 잘 해 줘.”
“알았다고…….”
남궁서건이 살짝 투덜거리며 바닥을 툭 찼지만 흙먼지도 일어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 너…….”
“그리고 혈라곡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남궁환 어르신이 수업에 했던 말도 다시 생각해 보고 또…… 무슨 말 하려고 했어?”
“아니, 아니다. 열심히 할게.”
“그래, 그래.”
련의 흐뭇한 미소를 본 남궁서건은 크게 한숨만 내쉬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
“아! 애들이 부른다. 가 보자.”
“알았어.”
다른 아이가 옆에 있었다면 밤이라 어두우니까 발걸음을 조심하라는 말이라도 한 마디 덧붙였을 텐데, 이상하게 련에게는 그런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남궁서건은 그냥 한숨만 푹 쉬고 련의 뒤를 따라갔다.
어린 시절에는 하룻밤 사이에도 절친한 친구가 되기 마련인데 하물며 일주일 내내 부대끼며, 마지막에는 극적인 사건까지 겪었던 아이들은 급기야 등롱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둘러앉아 훌쩍이기까지 했다.
“서신…… 보낼게…… 훌쩍.”
“꼭 답장해 줘야 해. 기다린다 나. 답장 올 때까지…….”
가장 눈물을 찔끔거리는 건 악소형이었다. 불티가 눈에 들어가서 그런 거라며 변명하긴 했지만.
그리고 가장 우쭐거리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건, 련과 함께 항주로 돌아갈 금종하였다.
금종하와 악소형이 매섭게 눈싸움을 하는 사이에 남궁서진은 련의 옷깃을 붙잡고 품에 폭 파묻혀 대성통곡을 해서 단목비의 기분을 불쾌하게 했다.
“야! 그만 울어.”
“흐어엉, 하지만…… 이제 가시면, 히끅…….”
“그럴 거면 너희 형한테 가서 울어.”
“우리 형님은, 히끅, 매일 보니까.”
꼬마들이 티격태격하는 사이에 팽주란이 조금 붉어진 눈매로, 그러나 의젓하게 말을 붙였다.
“항주까지 조심해서 가. 다음에 볼 때는 고구마 구워 먹자. 꿀은 내가 가져올게.”
“내, 내가 수유 가져올게!”
다들 열심히 ‘우리 집 주방에서 쓴다는 고급 숯을 가져오겠다’, ‘구이용 철판을 구해 오겠다’ 하며 외쳤다.
‘아무도 고구마를 가져오진 않을 건가?’
그런 련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모용설호가 불쑥 말했다.
“고구마를 챙겨 오는 사람이 있어야 할 거 아니냐?”
“아…….”
“내가 가져올게.”
“아니, 내가 고구마까지 가져올게!”
“나도, 나도!”
아이들이 또 서로 고구마까지 가져오겠다며 난리법석을 피웠다. 모용설호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평생 고구마만 먹을 셈인가…….”
* * *
등불의 연료도 다 타들어 가고 아이들 모두 보호자의 손에 이끌려 처소로 돌아갈 때, 련은 마당 끝자락에 고요히 서 있는 한 인기척을 잡아냈다.
련은 아이들을 먼저 보냈다. 단목성은 련만 두고 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모용취려라는 걸 알아보고는 물러섰다.
“아이들과 어울려 주는 것도 할 만하더냐?”
주위가 조용해지자 모용취려가 조용히 물었다. 나직한 목소리에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저도 아이인데요?”
련이 일부러 받아치자 모용취려는 또 웃었다.
모용세가의 다른 사람들이 보았다면 놀랐을 만한 장면이었다. 모용취려는 손자 모용설호 앞이 아니면 그다지 웃음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네가 바둑을 배웠다는 얘길 들었다. 이 할미와 한 판 두겠느냐?”
모용취려는 ‘어떻게 아셨어요?’라면서 눈이 동그래지는 련을 보며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간에 힘을 주어야 했다.
“……한 수 물러드릴까요?”
“아니! 아니! 잠깐. 잠깐만 기다리거라.”
모용취려가 얼른 손을 들어 련의 움직임을 저지했다. 련이 눈을 접고 작게 웃었다.
그 접은 눈매 사이로 별빛이 흩어졌다.
그러나 장고 끝에 악수 둔다고 누가 그랬던가?
“내 일평생 바둑을 두었는데…….”
모용취려가 절망 가득한 목소리로 반상 위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대단히 기가 막힌 신묘한 수였던 것도 아니고 서로 주거니 받거니 잘 두고 있다고 여겼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반상의 백돌들은 휩쓸려간 뒤였다.
모용취려는 잠깐 미간에 손을 짚었다.
“네 어미가 그리 바둑을 잘 두는 것은 내 익히 알고 있었다만…….”
“알고…… 계셨어요?”
“알다마다. 현성은 내 벗의 아들이니 조카와도 같다. 그 아이가 혼인을 할 적에 내 아들이 혼인하는 것처럼 기뻐했었지.”
모용취려는 패배의 쓴맛을 애써 희석시키며 대답했다.
“그의 딸이 설마하니 이렇게 잘 자라서 나를 무릎 꿇릴 줄이야.”
“아니, 그 정도는 아닌데.”
“그 정도이니라. ……이렇게 뒀다면……?”
“그럼 제가 흑돌을 여기에 두고, 그다음엔 어르신이 여기에 두실 테고, 다시…….”
모용취려의 눈동자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 그럼 이쪽은…….”
“제가 여기에…….”
“…….”
모용취려는 잠시 떨리는 눈으로 반상 위를 노려보다가 심호흡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나를 이겼으니 응당 상을 받아야지.”
“그러실 필요까지는…….”
“왜? 나와 붙을 때마다 이겨서 내 가산을 거덜 낼까 그러느냐?”
“음, 그게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이 노인네에게도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느니. 다음에는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요.”
련이 방긋방긋 웃자 모용취려는 미련이 남은 눈으로 반상을 내려다보다가 한숨과 함께 품 안에 챙겨 온 것을 내밀었다.
“네가 어려도 안목이 좋은 듯해 신경 써서 골라 봤느니라.”
“어…… 이건…….”
엷은 색의 비단에 감싸인 조그만 상자였다. 련은 비단 매듭을 천천히 풀어 보다가 안에 든 걸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오문주가 직접 제작을 의뢰하여 장인이 만든 묵옥(墨玉) 노리개. 청(晴) 자가 새겨져 있다 : 영력 용적 15
지금 영기를 담으실 수 있습니다.
“하오문의……?”
새까맣고 윤이 나는 옥노리개는 영력 용적이 15나 되었다. 그건 이 노리개가 보석으로서의 가치도 빼어나다는 뜻일 테고 련이 언제나 보석을 보며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것도 그것이었으나, 지금만은 달랐다.
‘하오문주가 직접 제작을 의뢰한 노리개라고? 그럼…….’
그리고 놀라기로는 모용취려 역시 깜짝 놀란 차였다.
“어찌…… 아니, 아니지. 네가 뭔들 못 알아챌까.”
“예? 아녜요, 그 정도는…….”
련이 황급히 손을 내젓고는 묵옥을 매만졌다.
하오문이라면 흑천련의 십삼천 중에서도 말석이었으나, 엄밀히 말하면 하오문을 십삼천 중에 어디에 둘지 몰라서 그리된 것이라고 봐야 했다.
흑천련주 무영신투 본인조차 모르는 비동(秘洞)의 위치를 하오문주는 알고 있다던가.
“내가 하오문주의 물건을 가지고 있어 의아하느냐?”
아무리 무림맹으로 마천교와 흑천련, 백도맹이 한데 얽혔다 해도 그들 사이의 골은 뿌리 깊다.
여전히 그들은 세 갈래로 갈라져 있기에 남궁환이 그렇게 염려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오문주가 아직 하오문주가 되기 전에 그와 인연이 생긴 적이 있느니라.”
“그 사람이 하오문주가 되게 도와주신 거예요?”
“정확히는 뜯어말렸지. 하오문과는 연도 없던 녀석이 뜬금없이 하오문주가 되겠다니,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느냐? 그러나 뭐…… 젊은것들이 언제는 늙은이 마음대로 해 주었는지…….”
“아.”
련은 거기까지 듣고 노리개를 다시 돌려주려고 했지만 모용취려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그와 내가 벗이라는 증표 같은 게 아니다. 그의 힘을 빌어 쓸 수 있다는 증표일 뿐.”
모용취려는 묘한 얼굴로 그 묵옥 노리개를 쳐다보다가 허리를 세우고 말했다.
“이것이 있으면 언젠가 그들이 필요할 때, 어렵지 않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아.”
“그들은 셈이 매섭고 술수가 더럽다고 사람들에게 지탄받곤 하지만…….”
모용취려가 련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인생이란 비단을 깔아 놓은 길 위로 갈 수만은 없다는 걸, 어린 련이 이해하고 있을 거라고 믿는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