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31화
“이렇게 귀한 물건을 받아도 될지 모르겠어요.”
“설호를 구해 주었는데 네 편이 되어 줄 거라는 말 한마디로 얼버무릴 수야 없는 일이지.”
무려 가주들이 한 얘기였으니 말 한마디로 얼버무린다고 표현할 수 없겠으나 모용취려는 빙긋 미소를 그렸다.
“그리고 곧 북해로 갈 거라는 얘기를 들었느니라.”
“네! 할머니를 뵈려고요.”
“설언이 아주 기뻐할 것이다. 그녀가 첫 만남에 행여나 매섭게 대하더라도 굴하지 말거라. 오래도록 가족을 못 보고 고생을 했으니 그 몸에 심술이 오죽 가득 찼겠느냐?”
처음으로 만나는 조모와의 재회에 거친 갈등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염려하는 다정한 목소리에 련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근처까지 오거든 모용세가에 한번 들르고.”
“벗의 집인데 당연히 가야죠. 안 가면 설호가 토라질 것 같아요.”
“허허. 그놈이…….”
모용취려는 뭐라고 말을 하려다 말았다. ‘그놈이 남한테 그러는 놈이 아닌데.’라는 말을 굳이 하긴 민망했다.
모용취려의 목적은 북쪽으로 올 때 세가에 들르라는 말과 묵옥 노리개를 전해 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더는 미적거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앞뜰까지 배웅을 나온 련은 떠나가려던 모용취려를 살짝 붙잡았다.
“응? 왜 그러느냐?”
련은 잠깐 망설임 끝에 말했다.
“엊그제 가르쳐 주셨던 것 있잖아요…….”
“어…… 어어. 그게…… 왜……?”
모용취려가 움찔했다. 왜인지 조금 전 바둑판에서 손도 못 쓰고 쓸려 가던 때와 흡사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련은 멋쩍은 듯 웃고는, 잠시 바람결을 느끼다가 손을 움직였다.
그 기묘한 손짓을 따라 봄의 밤바람, 섬세한 미풍이 련의 손끝에서 가볍게 부딪혀 그대로 모용취려의 머리카락을 흔들고 흩어졌다.
모용취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지난번에 알려 주셨던 걸 이번에 써 봤거든요. 그 덕분에 살았어요. 그때 상황이 너무 급박해서 이런 방식으로 조금 변형해 봤는데 보시기엔 어떨지…….”
모용취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련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지금, 지금 뭘…… 무슨…… 뭘…….”
“괜찮을까요?”
“이게, 이게 그 말로 지금……. 너는 대체 그건 또 어떻게…….”
사실 이 방식이 조금 더 낫다는 걸 알면서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반응이 어떨지 걱정됐는데, 모용취려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한껏 가벼워졌다.
“밤공기가 좋네요. 어르신하고는 밤에만 이렇게 대화를 하는 것 같아요.”
“네 덕분에 난 이 나이 먹고 야밤이 무서워지게 생겼느니라!”
모용취려는 한껏 엄살을 부리다가, 련이 그녀에게 보여 준 동작을 그대로 되새기며 천천히 따라 했다.
손날 끝에 닿았던 봄바람에 실린 꽃향기가 반대 방향으로 되돌아나갔다.
그 순간 그녀에게 내리꽂히는 벼락같은 깨달음이란!
* 모용취려의 깨달음 *
현재 행운 수치 : 행운 수치 : 69 / 120 (13▲)
모용취려
특성 : 수어지교(水魚之交) / 쾌속 / 표리일체 / 유연한 /
자질과 오성 : 상-하
건공무적공(乾坤無敵功) : 12성
건곤백절검해(乾坤百絶劍解) : 12성
유성지(流星指) : 11성
일엽락(一葉落) : 11성
두전성이(斗轉星移) : 10성(1성▲)
모용취려는 잠시간 선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자신이 느낀 바를 되짚으려 애썼다.
자신의 앞에서 오가던 향기의 흐름, 그 흐름을 변하게 했던 움직임이 품고 있는 묘리, 자신을 한 단계 위로 끌어올리는 그 신기막측한 이치를.
그사이 련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가,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기뻐했다.
‘세상에! 그냥 아주 조금 고쳐 본 건데!’
창조하는 것보다는 고치는 것이 훨씬 쉽다. 잘 배워서 조금 개량해 봤을 뿐인데 행운 수치가 이렇게나 차오르다니!
모용취려는 자신의 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고 련을 쳐다보았다.
련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르신?”
“너는…….”
모용취려의 목소리가 쉰 듯이 옅게 갈라졌다.
나의 성취와 깨달음이 어찌 그리 기쁘기만 할 수 있느냐?
세가 사이의 조용하지만 치열한 경쟁을 명석한 너라면 모를 리 없을 텐데, 모용취려는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침음성을 삼켰다.
세가 사이의 그 어떤 경쟁도, 이 소녀에게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경쟁을 해서 무엇한단 말인가? 승자는 정해졌는데.
세상에 어떻게 이런 것이 있을 수 있나? 모용취려는 잠깐 섬뜩함을 느꼈으나 이윽고 그 두려움을 씻어냈다.
“……빚이 쌓이기만 하는구나.”
“빚이라고 드린 게 아닌데…….”
“그럼 내가 설호의 조모라 이리 베풀어 준 게야?”
“그런 걸로 치면, 사실 저희 할머니의 벗이셔서요.”
련은 눈을 접고 웃었다. 그녀의 할머니는 멀리서, 본 적도 없는 손녀가 병으로 진 빚을 갚기 위해 정신을 차리자마자 영단을 보내온 사람이었다.
그런 할머니의 오랜 벗이라면, 할머니를 위해 일가의 가주이면서도 심부름꾼 노릇마저 개의치 않고 감내한 사람이라면 작은 도움쯤은 주고 싶었다.
모용취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북해에 갈 적엔 꼭 모용세가에 들러야 한다. 남의 앞마당에서는 뭘 갚으려 해도 마땅치가 않으니.”
“그럼요. 꼭 갈게요! 같이 바둑 둬요.”
련이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둑 두자는 말에 모용취려가 흠칫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작별의 밤, 청년들의 자리는 좀 더 흥겨웠다. 독하지는 않지만 흥을 돋을 술과 요리가 깔린 연회장은 왁자지껄했다. 가인(哥人)들은 없었으나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사람들이 현을 튕겼다.
조금 전까지 모든 사람의 이목을 끈 건 단목현우였다. 그의 품에 안긴 조그만 비파가 한순간에 모두의 이목을 사로잡았다가, 연주를 끝낸 단목현우가 웃는 소리에 긴장이 깨졌다.
“경무, 어때? 배워 보는 거 말이야.”
이번 혈라곡 사건에서 크게 활약을 한 단목현우에게 말을 붙여 오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는 적당히 응하고는 가장 끄트머리에 앉아 있는 남궁경무 옆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남궁경무는 괜히 어깨를 움찔하며 잔을 홀짝였다.
“무리라니까.”
“왜? 넌 정말 잘할 거야.”
“글쎄…….”
남궁경무는 부정의 뜻으로 말끝을 흐렸는데, 씩 웃은 단목현우가 술잔에 술을 거칠게 따르곤 그걸 띄워 남궁경무에게 가볍게 던졌다.
술잔이 짧은 호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그 안에 든 술이 한 박자 늦게 곡선을 따라 그렸다.
그리고 황급히 잔을 낚아챈 남궁경무의 손이 매끄럽게 움직여 마지막 술 한 방울까지 담아냈을 때, 잔 속의 술은 그저 평온하게 담겨 있기만 했다. 마치 처음부터 탁상 위에 놓인 것처럼.
“그것 봐. 너는 손으로 하는 거라면 뭐든 잘한다니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무공을 잘하질 못하니 꽝이로군.”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된 건 그래도 단목현우와 함께 혈라곡 혈귀들을 상대하면서 거리가 많이 가까워졌기 때문이었다.
그를 물끄러미 쳐다본 단목현우가 물었다.
“세가의 장원이 많이 답답해?”
남궁경무는 어깨를 또 움찔했다. 가슴이 뜨끔했다.
“그렇게까지…… 조금은…… 조금은 그래.”
그렇지는 않다는 변명은 나오려다가 말았다. 단목현우에게는 거짓말을 하기 어려웠다.
대신 주위의 시선이 뜸해진 틈을 타 조금 솔직하게 대답했다.
“사실 난…… 너처럼 조카들을 아끼는 것도 아니야. 세가도…….”
세가에서 그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퍼부어 주었는지, 자신이 누린 혜택이 얼마나 많은지도 잘 알지만 남궁경무는 그렇게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것들 중에서 자신이 정말로 원했던 게 하나라도 있었던가?
그가 원했던 것은 딱 하나, 키우는 새 ‘정토’뿐이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단목현우는 술잔의 향기만 맡으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에 대한 대답치고는 허무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럴 때면 좀 떨어져 보는 것도 좋대.”
“뭐? 누가?”
“우리 누이가. 우리 누이도 성격이 보통이 아니잖아. 그래서 한동안 나가 살았어. 나는 나대로 폐관 수련하고. 몇 년 찢어져 있으면 저절로 애틋해지더라고.”
단목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작게 웃었다.
남궁경무는 조금 놀랐다. 자신이 겪었던 비극을 그렇게 승화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불타는 천화당 앞에서 거의 미치려고 했던 단목현우를 본 남궁경무였기에 그의 웃음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떨어져 있으려면, 그럼…… 나도 폐관 수련을……?”
“뭐 아예 밖으로 나가도 되지 않아? 이참에 여행도 좀 하고. 네가 아무리 못한다 못한다 해도 길거리에서 객사할 정도는 아니잖아.”
“그래도 곧 있으면 용봉지회에 참석해야 할 텐데…….”
“그런 거 다 하라는 대로 하는 거면 가출이 아니지.”
“가, 가출? 나 가출하라고?”
“하라는 말은 아닌데.”
하지만 단목현우는 이윽고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