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32)화 (132/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32화

“저쪽 제갈세가에도 한번 가서 콧대 콱 눌러 주고. 우리도 진법 잘한다! 하고.”

바로 일전에 그네들이 떠들던 바로 그 얘기였다. 남궁경무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실례고 민폐지, 양가에 다…….”

“그런가? 그러면 얼굴을 가리고 가면 되겠네. 요즘 신식 인피면구(人皮面具) 같은 거 잘 나오지 않아?”

옛날에는 아무래도 범법자나 쓰는 것이라는 인식이 있고—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자기 얼굴을 대체 왜 감추겠는가?—, 만드는 방식도 몹시 잔혹하여—사람의 얼굴을…….— 음지에서나 거래되는 물건이었으나, 최근에는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인피면구를 구할 수가 있었다.

“그런 건 엄청나게 비싸잖아.”

“그런가? 그럼…… 아! 아예 역용술을 익히면 되겠다. 너 진짜 잘할 것 같다. 손이 섬세하잖아.”

“역용술?”

남궁경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역용술이란 얼굴의 근골을 움직여 생김새를 바꾸는 기술로 손끝이 세심하지 않으면 익히기 어려웠다.

“얼굴 위에 진법을 펼치는 거랑 비슷한 거 아닌가? 자네 특기겠네.”

“말은 쉽지…….”

남궁경무는 손을 내저었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어느새 빛이 깃들어 있었다.

둘의 대화에 잠시 침묵이 어린 사이, 단목현우는 금세 지난 혈라곡의 침입 때 했던 활약에 대해 묻는 사람들에게 응해야 했다.

“아니, 뭘 그런 걸 또…… 이미 한 얘기잖나.”

그때 단목현우가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했는지 알고 있는 남궁경무가 만류했으나…….

“이 친구는 소심해서 잘 모르는군. 엄청난 무용담에 관한 거라면 듣고 또 들어도 여전히 흥미진진하다고!”

단목현우는 그네들이 귀 기울여 묻는 말에 뺨을 긁적이며 대답해 주기는 했으나, 남궁경무는 그 목소리가 자신과 대화를 나누거나 조카 얘기를 할 때보다 미세하게 더 건조하다는 걸 알아챘다.

사람에게는 제각기 그림자가 있고, 어떤 사람은 그걸 남에게 보이지 않는 것 같다고 남궁경무는 생각했다.

자신도 그림자를 굳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의 눈길이 저 멀리, 남궁세가의 장원 밖으로 향했다.

* * *

‘오늘 밤손님이 많은데?’

련은 돌아온 거처 앞에 서 있는 무애단 부단주 남궁혜민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모용취려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사이에 나타난 걸 보면 그녀와의 만남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준 눈치였다.

“아가씨.”

남궁혜민 곁에 선 화륜이 몹시 밉살맞은 표정으로 짝다리를 짚고 서서는 팔짱까지 끼고 있는 걸 보아하니 아마도 그가 싫어할 만한 용건인 모양이었다.

“설마 남궁환 어르신도 보자고 하세요?”

“네? 그, 그걸 어떻게…….”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옆에서 화륜이 슬그머니 중얼거렸다. 남궁혜민의 표정이 복잡하게 난처해졌다.

하늘같이 모시는 대가주가 비난받는 상황이 몹시 낯설지만 ‘지금 시간이 몇 신데’라는 이 어린 하인의 말에 동의하는 바였기 때문이었다.

화륜이 불만 어린 표정으로 남궁혜민을 흘끗 쳐다보며 미간을 모으고 툭 뱉었다.

“이때 안 자면 키 안 큰다는데.”

“륜아야, 넌 자고 있을래?”

“누…… 아기씨 같으면 잠이 오겠어요? 혼자 보내 놓고? 여기서 또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그건 그렇지만…… 밤에 잘 안 자면 키 안 큰다는 거 맞는 말이야.”

“제 키 말고요. 누이 키요.”

“나는 괜찮아. 너도 더 커야지.”

“더요? 언제는 빨리 큰다고 뭐라 했으면서.”

남궁혜민이 황급히 덧붙였다.

“경항운련 마지막 날이라 때가 여의치 않은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조금 전까지 기다리고 계셨는데, 혹시 용건이 끝나셨다면…… 대가주님께 안내해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련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혈라곡에서 찾으러 왔다는 영단이 북해에서 보낸 그 영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남아 있는 탓이었다. 그렇다면 이쪽이 빚을 진 셈이니.

전각은 등나무로 휘감겨 있었는데, 엷은 보랏빛 꽃이 만개하여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련아야.”

련이 등나무꽃을 올려다보는 사이에 남궁환이 나타났다. 주위를 살펴보자 남궁혜민과 화륜은 멀찍한 곳에 남았다.

화륜을 바라보는 남궁혜민은 다소 머쓱한 표정이었는데 아무래도 화륜에게 말을 걸었다가 그의 서늘한 눈길에 머쓱해진 듯했다.

‘륜아한테 어른들 그렇게 대하면 안 된다고 알려 줘야 하나?’

련이 잠깐 고민하는 사이에 남궁환이 련을 전각 안쪽으로 안내했다.

안에는 달콤하게 만든 과자들과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련을 위해 마련한 듯했다.

‘그런데 왜 보자고 하셨지?’

련은 고개를 갸웃했다.

모용취려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모용설호가 크게 배워 가는 게 있는 데다가 북쪽으로 가면 다시 만날 약속을 잡을 기회였으니.

하지만 남궁경해도 아니고 남궁환이 자신을 불러 할 말은 무엇일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련아야, 무인이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네?”

“검만 휘두르는 목각인형은 무인이 아니다. 너도 그리 생각하지 않느냐?”

“네?”

“자못 무인이란 머릿속에 든 것이 있어야 검 한 번을 휘둘러도 제대로 휘두르는 법이지!”

“네?”

그와 동시에 남궁환이 어딘가에 감춰 뒀던 서책을 턱 하고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어른 손으로도 한 뼘은 되지 싶은 높이로 쌓인 책들이었다.

그 뒤로도 남궁환은 눈을 동그랗게 뜬 련을 앉혀 두고 빠르게 강연을 이어 나갔다.

주된 내용은 무림인들이 책을 안 읽어서 머리에 든 게 없으니 무식하기 짝이 없다는 비난이었다.

“그래서 했던 실수를 하고 또 하고 했던 잘못을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남궁환은 말을 하다가 혼자 열이 올랐는지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그러다가 비로소 창피해졌는지 얼굴을 붉히고 입을 다물었다.

남궁환의 열의에 찬 강연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련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르신도 했던 잘못을 또 하신 게 있으세요?”

남궁환의 표정이 착잡하게 가라앉았다.

“……두 번은 없을 줄 알았는데 같은 실수를 하고 또 하게 되더구나. 그렇게 많은 책을 읽었는데도.”

첫째와 둘째 사이의 갈등과 불화를 알고 있었는데도 어련히 나이가 차면 해결되겠거니 여겼다.

그 갈등과 불화는 한쪽을 잃으며 자연히 해결되었다. 해결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런데 다시 손자들 사이에 그와 흡사한 갈등을 보았을 때 남궁세가의 모두는 모르는 척했다.

남궁서건이 열심히 하니까 어련히 해결될 거라고 믿으면서, 차라리 서건이 둘째였으면 낫지 않았겠냐고 속으로 아쉬워하면서, 그 얘기를 정말 둘째였던 남궁경해에게는 하지 못하면서, 이제야 둘째가 된 남궁경무에게도 하지 못하면서…….

“재능 있는 자가 재능 없는 자를 이해할 수 있다는 건 기만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지. 이해하지를 못하는데 뭘 해 줄 수 있었겠느냐.”

막연하고 피상적인 생각만으로, 무얼 어떻게.

남궁환은 련이 그의 마음에 완벽히 동감하리라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남들과는 격이 다른 명석함을 가진 련 또한 그들과의 차이 속에서 한 번쯤은 망연히 길을 잃었으리라고 믿는.

“음, 그냥 남을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기만 아닐까요?”

하지만 련은 남궁환이 넘겨준 책을 들춰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으니까……. 자기 자신도 잘 모른다고 하잖아요. 완전히 도움이 되지도 못하겠지만, 사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서 완벽한 도움을 바라면 안 될 것 같아요. 완벽한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도 안 되고.”

“완벽한 도움…….”

“그냥 마음이 좀 안 맞아도 얘기 좀 들어 주고, 티격태격도 하고…… 그런 거면 되지 않을까요?”

“그러다가 손자 마음에 상처라도 주면…….”

“사과를 하시면……?”

“……!”

남궁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엄청난 깨달음을 얻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남궁환의 발상의 전환 *

행운 수치 : 74 /120 (5▲)

‘뭐? 이게 뭐라고 행운 수치를 5나 주는 거지?’

련도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남궁환은 그런 련의 표정이 전혀 보이지 않는지 멍하니 허공만 올려다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이마를 팍 두드리며 정신을 차렸다.

“아니, 이러려고 너를 부른 게 아닌데…… 물론 서책도 전해 줄 것이다마는, 그 책만 주려 한 것은 아니다.”

남궁환은 조금 허둥지둥하며 다른 서책 한 권을 꺼냈다.

이제 갓 만든 책인 듯 표지부터 매끈하고 반듯했다.

“세가 안의 원본은 반출할 수 없는 것이라 내가 직접 필사하였다. 네게 도움이 됐으면 하는구나.”

“네?”

‘반출금지인 원본을 직접 필사까지 해서 유출하신다는 건가요!’

련이 화들짝 놀라서 서책을 밀어내려는데 남궁환이 엄한 표정으로 힘을 주었다.

“이, 이게 뭔데요?”

“한번 펼쳐 보거라.”

“…….”

련은 불안한 마음을 다잡고 슬쩍 책을 펼쳤다가, 처음에는 달필에 놀라고 그다음에는 책의 내용에 더 놀랐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