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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33)화 (133/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33화

‘절맥에 따라 축기가 불가능한 증상을 해소한 방법…… 실패했으나 효과는 있었던 것들…… 산공독에 의한 내공 영구 소실 부작용…….’

“……!”

련이 황급히 고개를 들자 남궁환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 세월을 거쳐 남궁세가의 의각에서 정리해 둔 것이다. 단목세가에도 있겠으나 이런 정보는 내보내는 법이 없으니 아마 서로 상이한 것도 있을 터.”

거기까지 말한 남궁환은 잠깐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네가 아직 심법 공부에 몰두하지 않은 듯해 그 이유를 생각해 보다 알게 되었느니라. 아마 여기서도 그 사실을 알아챈 건 나나 백룡신검뿐일 테니 심려치 말거라.”

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책을 갈무리했다. 그 동작에서 련의 미약한 의문을 알아챘는지 남궁환이 빙그레 웃었다.

“갚지 못한 은혜는 뒤통수에 매달린 추와 같다. 심지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무거워지고, 죽을 때까지 제대로 떼어내지 못하면 역사가 그것을 비난하는 법이다.”

때문에 손자들을 구해 준 은혜를 갚기 위해 동분서주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서책 한 권으로 어찌 조손을 구해 준 빚을, 이 세가의 기둥을 온존해 주고 그들과 날 눈 뜨게 해 준 빚을 다 갚았다고 하랴? 경해가 했던 말은 응당 지켜질 것인즉.”

“감사합니다, 어르신…….”

련이 연신 얼떨떨한 표정을 짓자 남궁환이 주름진 눈을 접고 미소를 그렸다. 명석하고 침착하던 소녀가 어린애 같은 얼굴을 한 것이 도리어 마음이 놓인 탓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가슴 한구석이 무거워졌다.

압도적인 재능을 선보여 사랑하는 가족과 갓 사귄 어린 벗들에게 찬사를 받는 것은 기쁜 일이겠으나, 이 아이의 삶에 그게 얼마나 이어질 수 있을까.

지나치게 날카롭고 뛰어난 저 안목을 모든 무가에서 환영하지는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 소녀에게 자신의 무공을 보이는 걸 꺼릴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나란히 서는 것조차 싫어할지도 모른다.

“련아야.”

“네?”

동그란 눈동자 속에 별빛처럼 반짝이는 빛무리가 그를 응시했다.

“너의 재능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타인이 자신을 다 꿰뚫어 본다는 건 두려운 일이니까.”

소녀가 눈을 깜빡깜빡했다.

“그냥 보이는 걸 어찌하랴? 그러나 네가 본 것을 입 밖으로 내지 않는 것이 더 나을 때도 있을 터.”

세상에 백도 사람이라고 모두 마음이 넓고 정의로울 리 없고 받은 은혜를 셈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며 도리어 왜 들추어보았냐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을 게 분명했다.

련이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이 눈매를 접고 웃었다.

“다 보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남궁환은 잠깐 멍했다가, 기분 좋은 소름이 일어나 껄껄 웃기만 했다.

* * *

단목련을 처소까지 배웅하기 위해 무애단의 무사들을 보낸 남궁환은 우두커니 서서 련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 사과를 하시면……?

타고난 눈부신 재능과 출신, 그리고 의지를 가진 남궁환은 이지가 생긴 그 순간부터 남궁세가의 후계자로 살았고 가주가 된 이후로는 남궁세가 그 자체로 살았다.

그에게 가주라는 건 사과를 해선 안 되는, 누구에게도 굽혀서는 안 되는 자리였다.

그러려면 결코 실수해선 안 된다. 실수도 잘못도 사과도 존재해선 안 되는 삶이었다.

하지만 해도 된다면? 그냥 사과를 하면 된다면.

‘그래, 하면 되는 일이지!’

사과 한 번에 무너질 연약한 존엄이라면 없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나?

그걸 깨달은 순간 갑자기 얼음물을 한 사발이나 마신 것처럼 가슴이 시리고 상쾌했다.

‘어쩐지 단목천기 그 위인의 성취가 그리 좋더니마는.’

단목세가는 가풍이 그런 것인가, 아니면 그 아이가 특별한 것인가?

거기까지 생각하던 남궁환은 련 곁의 하인을 생각하며 이맛살을 살짝 모았다.

‘그놈도 자질이 범상치 않아 보였는데…… 단목세가에 복이 걸어들어오는 것인가?’

한 아이의 인물됨은 많은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작게는 표정이나 걸음걸이에서부터 눈빛이나 언행, 어떤 사건에 대한 식견 등등.

그 생김새에 대해 떠올리자면 묘하게 흐릿하여, 이목구비가 빼어나다는 느낌 정도만 남았지만 자신을 슬쩍 돌아보던 눈빛이 다소 인상적이었다.

‘제 주인을 오라 가라 한 것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나? 허허.’

그 아이에게는 단목련이 하늘과도 같은 눈치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저 귀엽기만 할 뿐이다.

오래 지나지 않아 련을 배웅한 남궁혜민이 돌아왔다.

“그래, 련아는 잘 들어갔고?”

“예, 서책을 살펴보시는 눈치였습니다.”

남궁혜민이 부복하고 대답했다. 남궁환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그러나 웃음은 잠시였고, 이윽고 남궁환의 얼굴에 차가운 서리가 앉았다.

“대체 그놈들이 우리가 만든 영단을 어찌 알았을까.”

“……세가 안에 배신자가 있으리라…… 여기십니까?”

남궁혜민이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남궁환은 고개를 내저었다.

“혈라곡 놈들에게 찬동하는 자들이야 어딘가에는 숨어 있을 테고 때가 되면 고개를 들겠으나 아직은 아니다. 그들이 이 정도의 정보를 입수할 정도로 기세를 회복하지도 못했고.”

그런데 대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것일까?

“그자들이 나중에는 천화당으로 향했으나 처음에는 접객당에 몰려들지 않았습니까? 모용세가에서 가져왔다는 빙궁의 영단을 보고 왔을 가능성도…….”

“……그 얘기 역시 몇 번 하긴 했지만…….”

그렇다면 혈라곡의 눈이 모용세가, 어쩌면 그 너머의 새외에까지 닿았다는 말이었다.

그들이 그 정도로 기세를 회복했다면 이미 중원이 혈라곡 문제로 골머리를 앓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때 남궁환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들에게 영단을 찾을 수 있는 특수한 방도가 있는 듯하구나.”

“특수한 방도라 하시면…….”

“나침반으로 남쪽을 찾아가듯 그들도 영단의 영험한 힘을 감지할 방법을 가진 듯하다는 말이다.”

그들의 처음 목적은 천화당이 아니었다. 마치 그들 자신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산발적이었다가 마치 뒤따르듯, 뭔가를 뒤늦게 알기라도 한 것처럼 천화당으로 달려갔다지 않았나.

“그래, 그래서 천화당으로…….”

거기까지 뇌까리던 남궁환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상한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 때…… 아이들과 혈귀들이 마주했을 때 혈귀들의 행태가 이상했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예.”

남궁혜민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곤 살짝 소름이 돋은 채, 그 일을 다시 고했다.

“그놈들 광증이야 중원에서 제일이다만, 서로를 공격했단 말이야? 정확히는 서로만을?”

“예, 저희가 등을 노려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자멸했단 말이지…….”

남궁환이 턱을 쓸며 중얼거렸다.

“이쪽에서 상대한 혈귀놈들 중에는 그런 놈이 없었는데.”

혈라곡이 다시 준동할 조짐을 보인 이상 기이한 행태는 단서 하나도 놓칠 수 없었다.

“혈라곡의 혈귀들이 서로를 공격하다가 자멸했다…… 어디서 들어본 얘기 같지 않으냐?”

“예?”

남궁환의 말에 남궁혜민이 눈을 크게 떴다. 이런 정신 나간 얘기를 또 어디서 들어봤단 말인가?

“분명 이런 일이 언젠가 한 번은…….”

남궁환이 좌우로 빠르게 오가며 중얼거리다가 그대로 자신의 서고로 달려갔다.

그동안 남겨 두었던 방대한 양의 기록들이 빼곡히 들어찬 서가의 가장 안쪽에 이르러, 남궁환은 몇 권을 뽑아다 훑었다.

그리고 마침내 한 대목에 멈추어 섰다.

“……약선문!”

약선문을 급습했던 혈라곡은 그들을 괴멸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결국 그 자리에서 모두 미쳐서 서로가 서로를 죽이며 끝이 났다.

그리고 그런 괴이한 사건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남궁환이 자신의 기록물을 훑어보고 나서야 알아챌 정도로.

‘그런 일이 왜 여기에서?’

남궁환의 눈빛이 깊이 침잠해 들어갔다.

* * *

마지막 밤이 완전히 저물기 전, 남궁환에게서 받은 서책을 펼쳐 보던 련은 바깥에서 들린 어색한 헛기침 소리에 웃음을 머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으로 나가자 침의 위에 얇은 피풍의 하나를 걸친 단목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원의 정원수와 돌담 곳곳에 단목세가의 방계 소년소녀들의 기척도 함께 느껴졌다.

“성아야?”

“짐은 다 챙겼어?”

“응, 그거야 여기 하인들이 다 해 줬어. 너도 다 챙겼어?”

“으응…… 어머니가 해 주셨어.”

그러곤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 단목성이 터무니없는 맹세를 한다거나 혼자만의 기묘한 약속 같은 걸 한다는 걸 련이 퍼뜩 떠올린 순간.

“다른 세가 사람들이 다 은혜를 갚겠다고 했다는 거 알아.”

“어? 어어. 아니, 그건 강호 어른들이 그런 거 좋아하니까…….”

“네 도움을 받은 건 똑같은데 같은 세가 사람이라는 이유로 당연하게 여기면 안 되지.”

“아니…….”

‘제발’이라는 말이 튀어나오기도 전에 단목성이 다가와서는 련의 양손을 꽉 붙잡았다.

“내가 나만 믿으라고 했었는데 너한테 아무 도움이 안 됐지.”

“아니, 됐어! 너는 존재 자체로 도움이 됐어.”

“앞으로 내가 더 강해져서…… 그리고 강해지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최선을 다해서…….”

단목성은 말을 하면서도 제대로 끝맺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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