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39화
“무슨 얘길 해도 화내지 않으마.”
“……제가 풍림전장에서는 표국도 같이 운영했다고 들었거든요.”
표국?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얘기에 석반안은 눈을 크게 떴다.
단목련이 하도 겁을 주기에 단목성과 관련된 온갖 얘기들을 상상하고 있었는데…….
“어…… 그래, 그러긴 했지. 아무래도 전장이다 보니 금괴나 은괴며 전표들을 이리저리 옮겨야 해서 말이다.”
산서성 출신 상인들은 주로 화폐를 유통하는 전장 일을 많이들 했고, 그러다 보니 보안이 중요하여 전장 내에서 표국을 운영했다.
말하자면 표국의 시초가 산서성에 있는 셈이었다.
석반안의 친가인 풍림전장 역시 산서성에서 이름이 높은 전장이었으니 그도 바로 곁에서 전장 운영뿐만 아니라 표국 일도 보며 자랐다.
“그 표국 운영을 어떻게 했는지 궁금해서요. 물론 남쪽이랑은 많이 다를 수 있겠지만요.”
“표국 운영?”
“이번에 세가에서 표사들을 좀 더 뽑기로 했거든요.”
“그건…… 좋은 일이다만…….”
“그런데 제대로 운영해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해서요. 만송상단하고 친하긴 하지만 그분들도 표국을 운영하는 건 아니고요.”
예상치 못한 화제에 얼떨떨하게 있던 석반안이 고개를 기울였다.
“어, 내가 집안일에 썩 관심을 둔 건 아니라 자세히 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정리해…… 보마. 그거면 되는 거니?”
“네!”
“그걸 그렇게 어렵게 얘기했어? 이게 뭐라고.”
“업계의 비밀 같은 건 함부로 유출하면 안 되잖아요…… 집안일이면 더욱.”
사람을 운용하는, 문서화되지 않은 그들만의 미묘한 방법을 알아내고자 하는 게 련의 뜻이었다.
그러니 그걸 물어보는 게 조심스러울 수밖에.
석반안이 눈을 접고 웃었다.
“겉으로 보자면 남들도 다 볼 수 있는 걸 가지고 무얼 그리 걱정했느냐? 염려 말아라. 나도 이 집안사람이니 보탬이 되어야지.”
빙그레 미소를 그리는 석반안의 모습이 든든했다. 그러다 잠깐의 침묵 뒤에 석반안이 작게 헛기침하곤 요즘 단목성과는 무얼 하고 노는지 물었다.
련은 오늘 챙겨 온 비단 머리 끈 세 개를 품에서 꺼내 보여 주었다.
“조금 있다가 성아한테 주려고요. 성아는 머리를 하나로 높이 올려 묶으니까 하나, 저는 양쪽으로 나눠 묶으니까 두 개 해서 성아랑 짝을 맞출 거예요.”
“아마 성아가 너무 좋아 어쩔 줄 모를 것 같구나. 그 애는 너무 기쁘면 오히려 웃지도 않고 표정을 굳히곤 했지.”
석반안은 매일매일 저 끈으로 머리를 묶다가 비단 끈이 오염되면 밤에 잠도 못 들고 심란해할 딸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아니에요.”
련이 부정해서 석반안은 조금 놀랐다.
“무어가……?”
“성아도 기쁘면 엄청 웃어요. 활짝이요. 그러면 같이 빙당호로 먹으러 가려고요.”
석반안은 눈을 크게 떴다가, 깊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석반안에게 중요한 부탁을 하고 돌아온 련은 단목현우의 연못 앞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잉어 홍린의 성장세가 심상치 않아 서호에 놓아주어야 할 것 같다는 얘기를 했을 때, 단목현우는 당황했지만 이윽고 나란히 잉어의 상태를 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서호에 갈 거지?’라고 묻는 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잉어란.
그렇게 비 오는 날 잉어를 데리고 나가자고 서로 약속을 하기가 무섭게 그날부터 날이 화창했다.
화륜도 련의 곁에 나란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비 올 것 같아요?”
“하아, 오늘은 정말 올 것 같았는데…….”
‘선경에 일기예보는 안 뜨나?’
련은 남궁세가에서 선물받은 부채를 펼쳐 놓고 노려보았지만 선경의 그 어디에도 일기예보가 뜨진 않았다.
보통 어르신들 관절이 쑤실 때 비가 온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무림 세가에서는 그런 걸로 날씨를 알아채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로 맑았으면 비가 올 때도 됐지. 내일일 거야, 내일. 믿어 보겠어.”
“가뭄이란 거 알아요? 계속 비가 안 오는 거요.”
“정 없는 소리 자꾸 할 거야?”
련이 쏘아보자 화륜은 어깨만 으쓱했다. 련은 요즘 부쩍 다른 생각이 많아진 것 같은 화륜을 돌아보았다.
남궁세가의 천화당이 다 불타는 사고가 있고 나서부터였다.
‘얘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무공을 배우고 싶다면 배우게 해 주려 했고, 가족이 되고 싶다면 성씨를 주려고 했다.
싫다고 한 건 화륜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걸 원하는 걸까?
‘금은보화에도 시큰둥, 좋은 옷도 시큰둥.’
뭘 줘도 투덜거리기만 하고 받지 않으려고 한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니구나. 사춘기가 오면 그땐 어떡하지? 아니, 설마 지금이 사춘기 같은 건가?’
조숙한 애들은 사춘기도 빨리 온다는데…….
이렇게 자라다가 점점 더 서먹해지고 멀어지게 되는 걸까?
처음에는 분명 재능 넘치는, 장래의 마천교 소교주라고 생각해서 붙잡았는데 이제는 그런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하하 호호 잘 지내다가, 즐겁게 나이 들어서 백발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면 좋겠는데.’
“혼자 또 이상한 생각을 저기 끝까지 하는 표정인데요.”
“너…… 내 제사는 지내 줄 거지?”
뜬금없는 소리에 화륜이 뜨악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미치겠네 진짜. 이상한 생각을 대체 어디까지 한 거예요?”
“안 지내 줄 거야?”
“아니 벌써 무슨 제사 얘길 하냐고요. 살날이 구만리 같은데.”
“그러니까 그 구만리 지난 뒤에 나 죽고 나면 제사 지내 줄 거지?”
“아 몰라요. 그런 소리 좀 하지 마요.”
“안 지내 줄 거야?”
“나보곤 가뭄 얘기 했다고 눈을 이렇게 뜨고 노려봤으면서 자기는 제사 얘기 하시네요.”
이번에는 련이 눈을 동그랗게 만들고 깜박거리다가 얼마 안 가 사르르 웃고 말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련이 죽는다는 얘길 하는 게 싫은 것이다. 살날이 구만리 지난 뒤에 하는 제사 얘기라도.
“으이구, 우리 찹쌀 경단. 이 누이가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알까 몰라.”
구만리가 지날 때까지 같이 있을 거란 얘기인 줄 모르겠지?
“하나도 모르겠는데요.”
“그러니까 아직 아기…… 어? 비다!”
이마에 톡 하고 차가운 무언가가 떨어졌다. 련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조금 전까지는 맑았는데, 어느새 비구름이 들어차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이윽고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주룩주룩 들리기 시작하자 멀리서부터 단목현우가 뛰어왔다.
련과 했던 약속, 잉어 홍린을 방생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왜 꼭 비 오는 날로 정한 거예요?”
단목현우가 둥근 대야에 연못물과 잉어를 옮겨 담는 사이에 화륜이 뒤에 서서 조용히 물었다.
“서호에 사람이 없어서요?”
아무래도 비가 오면 외출하는 사람이 줄기 마련이다. 그러나 련은 고개를 흔들었다.
“비 오는 날이 길하댔어.”
“……네?”
“비 오는 날이 길하다고 했어.”
“지금 미신 믿는 거 아니죠?”
“아니, 네가 미신이라고 하면…….”
련은 불만 어린 눈으로 화륜을 쳐다보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어쨌든 비 오는 날이 좋다고 하니까……. 기왕 가는 거 좋은 날이 좋겠지.”
잉어는 좁은 대야에서 어떻게든 몸을 말아 넣었다.
련은 홍린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대야에 슬쩍 손을 집어넣었다. 홍린의 등지느러미가 살짝 금빛으로 반짝거렸다.
“아무래도 이게 있으니 마차를 타고 나가야겠구나.”
“영이 마차 몰아 주기로 했어요.”
단목세가에서 용이 승천했다는 괜한 소문이라도 날까 봐 련은 마차도 준비해 둔 차였다.
잉어가 든 대야를 챙겨 든 련과 화륜, 그리고 단목현우는 은밀하게 세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리저리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마차 앞에 도착했을 때.
“아, 아, 아니…… 영은 어디 가고…… 단장께서.”
단목한소가 마부의 허름한 차림새를 한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단목한소의 뒤에서 정영이 죽고 싶다는 표정으로 나타났다.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단장님께서 제가 어딜 가는지 꼭 따라오겠다고 하셔서.”
“단장님, 바쁘지 않으세요? 세가 방비 체계 교체한다면서요…….”
혈라곡이 나타날 기미를 보였으니 여기도 가만히 있어서 될 일이 아니다.
해서 단목천기가 유성십팔숙의 무사들을 중심으로 세가 방비 체계를 싹 점검할 예정이었던 것이다.
“그거야 잠도 안 자고 열심히 하고 있으니 너무 염려치 마시지요. 그리고 아가씨 외출을 돕는 일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지요.”
“그렇다고 단장님한테 마부 노릇을 맡길 수는…….”
“제가 소싯적에 마차 끌기로는 따를 자가 없었답니다. 서호 구경 가신다고 하셨지요? 그리로 모시겠습니다.”
‘대체 왜?!’
그가 자신의 벌모세수를 거들어 주고 금종하와의 비무 때도 도와줬는데, 그때부터 단목한소는 련에게 언제나 기묘한 태도를 취했다.
묘하게 극진하면서 이상하게 련의 사소한 일까지 어떻게든 끼어들고 싶어 하는 눈치라고나 할까. 마치 조카의 관심을 끌고 싶어서 안달하는 숙부처럼 행동했다.
결국 죽고 싶다는 얼굴의 정영과 묘하게 신이 난 단목한소, 품 안의 잉어가 걱정이 되는 단목현우와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중얼거리는 련, 그리고 아무 감흥이 없는 얼굴의 화륜이 나란히 단목세가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