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40화
* * *
단목한소가 현우가 들고 있는 것이나 이 외출의 목적에 대해 묻지 않은 덕분에 그들은 조용히 서호 구석에 다다를 수 있었다.
원체 풍경이 아름다운 호수다 보니 전각이 없는 곳을 찾기가 까다로웠는데, 그래도 비가 온 덕에 평소보다는 사람이 적었다.
련은 화륜이 씌워 주는 우산 아래에서 호숫가의 풀숲을 헤치며 장소를 모색했다.
부슬비 정도인데도 풀이 길게 자라고 나뭇가지가 길게 드리워진 호숫가를 걸어가려니 시야가 흐릿했다.
“아무래도 날을 잘못 잡은 것 같은데요.”
“에잇.”
“그런데 비 오는 날이 길하다고 누가 그랬어요?”
련은 문득 화륜의 목소리에서 스산함을 느꼈다. 내리는 비 탓만은 아니었다.
‘왜지? 옆에 사특한 얘기를 지껄이는 사람이 있으면 죽여 버리겠다는 느낌인데.’
그냥 느낌…… 이겠지?
련은 우산을 쥔 화륜을 흘끗 돌아보며, 젖은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 내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왜……? 많이 힘들어서 그래?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래?”
“아뇨, 그냥 궁금해서요. 그런 얘길 하는 사람은 또 언제 만났나 싶긴 하네요.”
“아니, 그 천비궁에 갔을 때 말이야. 거기에서…….”
화륜의 얼굴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천비궁 같은 건 다 가짜인데 그런 걸 믿느냐고 벼락이라도 칠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런 화륜이 뭐라고 말하기 전에 얼른 련이 선수를 쳤다.
“그리고 난 비 좋아해서 그런 거야. 너무 좋아해서 시도 지었잖아. 기억나지?”
화륜은 눈을 가늘게 뜨고 련을 바라보면서 그 시구를 읊조렸다.
“……소조우야대우래(蕭條雨夜待雨來)?”
비 내리는 쓸쓸한 밤, 그 비가 오기를 기다리네.
순간 련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자신이 지었던 시를 다른 사람이 읊는 걸 듣고 있자니 스스로 읊는 것 이상으로 부끄러웠다.
련은 얼른 말을 돌렸다.
“그, 그걸 다 외웠어?”
“몇 자나 된다고 그걸 못 외워요?”
“하, 하여간 비가 오는데도 비가 오는 걸 기다릴 정도로 좋아한다니까.”
“그렇다고…….”
자신의 성씨가 된 시를 다시 들은 화륜이 말끝을 흐린 사이 때마침 딱 적당한 뭍이 나타났다.
“아! 저기면 되겠다.”
련은 얼른 말을 돌렸다. 물이 얕게 흩어지며 멀리 갈수록 깊어지는 호숫가라 홍린을 놓아주기에 딱이었다.
정영과 단목한소는 세 사람이 할 일을 편히 할 수 있도록 멀찍이 자리를 비켜 주었다.
“홍린이 앞으로 이 넓은 호수에서 더 행복하게 잘 살 수 있겠지…….”
단목현우가 대야 안에 꽉 찬 한 마리 잉어를 내려다보며 아련하게 중얼거렸다.
련은 문득 그 말에 이유 모를 불안함이 들었으나, 비가 완전히 그치기 전에 호숫가로 가느라 더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대야를 여기서 이렇게 엎으면 되나? 애한테 상처가 나진 않겠지? 아니면 대야를 아예 물에 담글까? 그런데 연못물이 생각보다 탁한 듯한데…….”
연못가를 쭉 따라서 주루와 높은 고층 전각들이 있어서인지 생각만큼 맑고 청명한 느낌은 아니었다.
“이 애는 맑은 물에서 귀한 것만 먹고 자랐는데 이런 데서 살아갈 수 있을까……?”
단목현우가 걱정으로 머뭇거리는 사이에 얼른 련이 연못물에 손을 담그고 잽싸게 휘저었다.
“아니, 아니! 숙부, 이것 봐요! 맑은 것 같은데요?!”
“어? 그런가? 그런…… 그런 듯도 하구나. 그런데 물고기 키우는 물을 바꿀 때는 물맞춤이라는 것도 한다던데…….”
련은 손으로 호수 물을 퍼와 대야에 넣고 휘저었다. 홍린이 반가운 듯이 활기차게 움직였다. 대야에 꽉 찬지라 빗속에서 물방울만 튀기는 정도였지만.
그 가벼운 물벼락에 단목현우가 미소 지었다.
“녀석, 씩씩하기는. 련아가 잘 돌봐 준 덕분이니 꼭 잘 자라 은혜를 갚아야 한다. 알겠느냐?”
순간 련은 흠칫했다.
“아,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어도 되니까 저 멀리 가서 건강하게만 살아 주면…… 어디 잡아먹히지 말고…… 다른 애들 괴롭히지도 말고…….”
흑월이 가기 전까지 주변 닭들 기를 다 죽여 놓았던 게 떠올라 덧붙인 말이었다.
“잘 가, 홍린. 그리울 거야.”
련은 대야 속에 손을 넣고 가볍게 흔들었다. 홍린의 반짝이는 등지느러미가 사르르 스쳐 지나갔다.
단목현우가 대야를 호수 물에 천천히 힘주어 밀어 넣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홍린이 호수로 뛰어들었다.
그 바람에 반짝이는 것 하나가 튀어 련의 눈으로 들어갔다.
“앗!”
“뭐야, 괜찮아요? 눈 비비지 마요.”
련이 손등으로 눈을 문지르려고 하자 화륜이 얼른 그 손을 잡아 내렸다.
련이 눈을 꾹 감았다 떴다. 화륜이 얼굴을 가까이하고 련의 눈동자를 살펴보았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지금도 아파요?”
“지금은 괜찮은 것 같아. 아까는 엄청 따끔했는데……. 비늘 같은 게 스쳤나 봐.”
“그러네요. 지금은 그냥 반짝거…….”
화륜은 뭔가 말하려고 했다가 황급히 멈추고는 련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곤 말을 돌렸다.
“지난번에도 비슷한 일 있지 않았어요?”
한껏 목소리를 죽여 속삭이는 화륜 덕분에 련도 덩달아 목소리를 죽였다.
“지난번에?”
“흑월이 떠날 때도 깃털에…….”
“……!”
련이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눈을 다시 비볐다.
“아니, 비비지 말라니까.”
“힝. 넌 눈에 뭐 안 들어갔어? 괜찮아?”
“저도 따끔 하는 거 같더라니 지금은 괜찮아요.”
단목현우는 련과 화륜이 붙어서는 종알거리고 있는 모양새를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갑자기 부슬비가 폭우로 바뀌는 걸 느끼곤 황급히 아이들을 챙겼다.
서호 저 멀리서 커다란 형체가 펄떡여 물방울이 튀는 모습이 보였지만 그게 홍린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너무 먼 곳의 일렁임을 본 련은 순간 퍼뜩 떠오른 생각에 이마를 꽉 눌렀다.
“왜 그래요? 머리 아파요?”
“홍린이…… 서호에만 있지 않으면 어떡하지?”
“뭐 어디론가 가겠죠?”
“대운하를 타고 위로, 위로 가서 황하로 가면 어떡해?”
“갈 수도 있겠죠. 우리보다 먼저 강호에 나가네요.”
“그런 문제가 아니라니까. 거기에…… 황하 위쪽엔 등용문(登龍門)이 있잖아! 용이 되기라도 하면 어떡해…….”
정확히 ‘용문’은 황하 상류에 있다. 물살이 너무 강해 배는 물론이거니와 물고기들도 급류를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는 곳인데, 그래서 오르기만 하면 용이 될 수 있다 하여 등용문이라 하는 것이었다.
“……!”
화륜도 움찔하며 홱 서호를 돌아보았으나 홍린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용이…… 설마 용이…… 거기서 용이 되면 좋죠.”
“좋아?”
“일단 등용문은 머니까요.”
“아.”
“항주에서 용을 만들었는데 거기까지 보내서 승천시켰다곤 생각 안 하겠죠.”
“그도…… 그런가? 그럼 괜찮나?”
“그리고 설마 정말로 용이 되려고요.”
“그렇겠지? 괜찮겠…….”
그 순간 화륜이 정색했다.
“안 괜찮죠. 또 뭐 만들면 안 돼요.”
“내가 만들려고 한 게 아니라니까…….”
“불쌍해도 내버려 두라고요. 예뻐해 주지 말고.”
“안 예뻐했어.”
“이름까지 지어 줬잖아요.”
“그건 숙부가 지어 줬어.”
“누이가 빨강이로 지으려고 하니까 그랬죠. 아무거나 주워서 키우지 말고, 이름 붙이지 말고, 밥 주지 마세요.”
화륜이 눈을 세모나게 뜨고 말했다. 련은 입술만 삐죽거리며 서호의 저 끝자락을 쳐다보았다.
등용문 같은 얘길 하긴 했지만, 설마 정말 그러는 일이 있기야 하겠는가?
* * *
폭우를 뚫고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련은 연신 눈을 비비며 차창 밖을 보려고 애썼다.
“뭔가 새롭게 보이지는 않는데.”
련의 말에 화륜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도 손에 깃털 떨어졌지만 그렇다고 손에서 장풍 쏘진 않았잖아요.”
“그도 그러네…….”
그건 장풍을 내보내진 못했지만 화염으로부터 그녀를 지켜 주었다.
이것도 무언가 다른 효과가 있는 거려나, 하고 중얼거리던 련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면 장풍은 어떤 원리로 나가는 거지?”
“격공장(隔空掌)이나 벽공장(劈空掌) 같은 거요?”
장법의 여러 가지 수법 중에서도 격공장과 벽공장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장력을 터뜨리는 공부인데, 둘 다 어지간한 내공으로는 꿈도 못 꾸는 경지였다.
“장법을 배운 적이 없어서 모르겠네.”
련이 손을 한 바퀴 돌려서 앞으로 탁 뻗어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가 약간 쑥스러워하며 배시시 웃었다.
그때 마차 구석에 앉아 있던—폭우가 쏟아지니 돌아갈 때 말을 모는 건 정영이 하게 되었다— 단목한소가 반색을 하고 가까이 다가왔다.
“아가씨, 장법 공부를 하시려고요?”
“아, 아니. 여긴 마차고, 나는…… 장법까진 생각 안 해 봤는데.”
“우리 세가는 검에 집중하다 보니 권법, 장법은 조금 공부가 약하지요. 세가의 서고에서 무보를 보셨을지 모르겠지만 파군장(破軍掌)이라는 장법이 있습니다. 무한보에 맞추어서 손을 짧은 검이라고 생각하며 움직이는 건데, 경지에 이르면 단검을 던지는 것처럼 격공장을 펼칠 수 있지요.”
“손을 짧은 검으로?”
련은 낙성십이검을 생각하며 손을 슬그머니 움직여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