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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42)화 (142/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42화

“성아가 정말 열심히 하네요.”

“넌 아직 쉬엄쉬엄하렴. 제대로 낫지도 않았는데 남궁세가에서 출발한 바람에…….”

하지만 거기서 더 지체했다간 아마 위지청이 먼저 졸도했을지도 모른다.

“이제 다 나았어요! 그때도 너무 긴장해서 그랬던 거예요.”

“넌 긴장하면 사흘이나 기절해 있고 그러나 보구나.”

한참 어린, 심지어 자신의 딸보다도 몇 달은 늦게 태어난 조카와 할 만한 대화는 아니었으나 단목현요는 쏘아붙이고 말았다.

“네 어머니 생각을 좀 해 보렴. 같이 가지도 못했는데 딸이 객지에서 쓰러졌단 얘길 들었으니 그 마음이 어땠겠어?”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아니, 내가 걱정했단 얘기가 아니라.”

단목현요는 거기까지 말했다가 뺨을 붉히고는 말하길 관두었다. 이 조카와 대화해서는 본전을 찾는 일이 드물었다.

“……표사 모집 공고를 쓰는 건 그이가…… 네 고모부가 하기로 했다. 널 돕는 일이 즐거운가 보더구나.”

“고모한테 도움이 되니까 행복하신 거 아닐까요?”

“이 일이 어떻게 나한테 도움이 되니?”

모든 건 이 어린 조카가 배후에서 주도했는데. 단목현요의 투덜거림에 련은 눈을 둥글게 뜨고 말했다.

“고모는 항상 세가를 더 살리고 싶어 하셨잖아요. 고모가 바라던 바로 그런 일이니까 고모부도 도움이 되고 싶으셔서…….”

“…….”

단목현요는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닫았다. 그러곤 미간을 찡그렸다. 그대로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어린 게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어른의 마음을 지레짐작하고.”

“죄송해요.”

그러나 단목현요의 눈가가 조금 촉촉했다. 련은 놀라서 눈만 깜빡였다.

“고모?”

퍼뜩 정신을 차린 단목현요가 얼른 말을 돌렸다.

“네…… 네 하인이나 비아는 어디 갔어?”

“비아는 숙부하고 있고, 륜아는 잠깐 심부름 갔어요.”

“무슨 심부름?”

“요즘 항주에 유행하는 장난감이 있다고 해서 사 오라고 했어요.”

“그런 건 총관한테 시키면 알아서 할 텐데.”

“당장 가지고 싶어서…….”

최근 련은 청련수와 백약청 다음 행보를 고민하고 있었다.

삼원 숙부 덕에 정말 큰돈을 얻긴 했으나 안주하고 있을 틈이 없다.

장원의 내부 수리나 증축, 다 팔았던 과수원과 논밭 수복, 빠르면 내년이나 내후년에 있을 제자 모집, 지금 모집해 둔 방계 아이들에게 새 옷도 지어 주어야 한다.

연약해진 유성십팔숙도 다시 살찌우고 싶고, 남궁세가가 정원을 진법으로 꾸며 놓은 것처럼 단목세가도 그렇게 하고 싶고, 그러려면 필연적으로 돈이 더 필요했다.

그래서 이번에 련은 여러 가지 안을 구상 중이었는데, 그게 섬유와 향(香)이었다.

처음엔 천잠사 대량생산의 꿈을 꾸었으나 양잠이라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닌 데다가, 비단을 뽑기 위해 누에고치를 삶는다는 얘기를 듣고서는 그 꿈을 접은 련이었다.

‘홍린이 토해 준 내단도 어쩌질 못했는데, 내가 키운 누에를 어떻게 삶을 수가 있겠냐고.’

그래서 일단 천잠사는 제쳐 두고 향에 골몰하는 터였다.

해서 련이 ‘향을 어떻게 만들면 좋을까?’라고 고민을 하고 있으려니 시중에 나와 있는 걸 먼저 맡아 보는 게 우선 아니겠냐고 제안해 준 게 화륜이었다.

그러곤 곧장 사오겠다며 달려 나갔다.

‘이럴 때 보면 세가 안에만 있어서 답답한가 싶기도 하고…….’

련이 화륜 생각을 하는 사이에, 단목현요는 련이 그렇게 급하게 장난감을 가지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곱씹으며 작게 웃다가 얼른 정색했다.

“장난감이라면 성아도 가지고 있는 게 많으니까 성아에게 달라고 하렴. 그 앤 네 일이라면…….”

단목현요는 ‘네 일이라면 맨발로 불 위를 걷겠다고 맹세했다.’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장난감 같은 거야 달라는 대로 줄 테니까.”

“그럼 달라고 할 수가 없는데요…….”

“성아한텐 내가 또 사 주면…… 아니 그냥, 원하는 장난감이 생기면 이 고모한테 말하면 되잖니. 애들이 나가서 뭘 사 봤자 얼마나 제대로 된 물건을 사 오겠어?”

“네! 알겠습니다.”

련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수련이 끝난 단목성이 땀으로 젖은 이마를 닦다가 둘을 발견하고는 뛰듯이 다가왔다.

고된 수련으로 상기된 얼굴 위에는 보기 드물었던 웃음기가 어려 있어서, 단목현요 역시 허물어지듯 웃고 말았다.

웃는 일이 적은 딸을 웃게 하는 아이가 자신의 조카라면야…….

* * *

“이…… 이게 다, 가게가 몇 군데나 되는데요?”

“그야 나는 모르지.”

백의명은 화륜이 내민 전낭의 생김새가 몹시 낯익다고 멍하니 생각했다.

“그게…… 향료는 보통 귀한 집안에서나 많이들 사는 건데. 제가 사려고 한다고 살 수 있을까요?”

“그럼 내가 가서 사 오리?”

“아니 그게…….”

무표정한 얼굴로 눈꼬리만 치켜올려 쳐다보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열이면 열 어느 집안의 귀한 도련님이 놀러 나왔다고 여기곤 물건을 내놓을 것 같긴 했다.

“아…… 알겠습니다. 지금 사 올까요?”

화륜의 눈동자가 냉엄했다.

‘지금 아니면 내세에 사 오게?’

백의명은 만두 찾는 노인네들에게 붙잡히기 전에 얼른 가는 편이 강호 무림의 안녕을 기원하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가 어렵사리 항주에서 유명하다는 고급 향료들을 사 들고 왔을 때, 화륜은 그의 침상에 팔자 좋게 드러누워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인기척은 조금도 내지 않고 들어왔다고 여겼는데 침상 앞에 서기가 무섭게 소년이 번쩍 눈을 떴다.

나쁜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는데 심장부터 덜컥했다.

“어, 어르신. 기침…… 하셨습니까? 저,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향들은 다 어디에 쓰시게요?”

‘설마 이제 와서 본인이 묻어 놓은 자들을 애도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그러고도 불지옥은 안 가고 등선하려고……?’

그러나 화륜은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다른 질문으로 응했다.

“너 여기 계속 있을 거야?”

“나…… 나갈까요?”

‘여긴 내 방이지만…….’

어쩌겠는가?

상대는 그에게 추궁과혈을 해 주고 내공이라는 꿈을 되찾아 주었다. 그가 나가라면 나가고 기라면 길 참이었다.

“너는 정말 눈치가 약에 쓸래도 없구나. 쯧쯧.”

“아, 아니…… 갑자기 왜 그러시는데요…….”

“누가 이 다락방 말했냐? 계속 항주에 있을 거냐고.”

‘그래도 교룡 객잔에서는 나름 괜찮은 방인데!’

“항주에 안 있으면요? 헉! 어르신, 어디, 어디 가십니까?”

화륜은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또 혀를 찼다.

“이걸 데리고 내가 뭘 하겠냐마는…….”

“어…… 어디로 가시는데요? 가신다면야 제가 진짜…… 진짜…… 진짜 어디든 가긴 할 건데요, 제가 진짜 혹시나 해서 여쭙는 건데 혹시 혈라곡은 아니시…….”

따아아악!

백의명은 잠시 바닥에 웅크리고 엎드린 채 뒤통수를 감싸 쥐었다.

자신의 머리뼈가 호두인 것 같았다. 누군가 지금 그걸 깨서 안에 든 걸 꺼내려고 한 것이다. 그것도 망치질 딱 한 방으로…….

“우냐?”

“아…… 안 웁니다, 울긴요…….”

“그러게 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서.”

잠깐 웅크리고 있던 백의명은 겨우 몸을 일으켰다. 눈가가 촉촉하고 현기증이 났다.

“……대체 어떻게 때리신 건데요?”

“기초적인 장법인데.”

“무슨 장법이 이렇게…….”

“이름은…… 흠, 우하장(雨荷掌)인 걸로.”

‘우하장인 걸로 하겠다고? 왜 꼭 지금 아무렇게나 지은 것 같지?’

가벼운 손짓 한 번으로 정수리가 깨질 것 같은 아픔을 주는 위대한 장법인데, 화륜의 말을 들어 보면 이름조차 지어 주지 않았던 것 같았다.

“비 맞는 연꽃 장법……? 굉장히…… 고상한 이름이네요…….”

“배우기 싫으면 말고.”

“아니, 아니, 배우고 싶습니다, 어르신.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그건 뭐 날 따라올 때 얘기고.”

“어디로 가면 될까요. 저 연옥 끝까지라도 저는 자신 있습니다.”

“혈라곡은 아니고?”

“……혈라곡 아니…… 시죠? 아닌 거 맞죠?”

백의명은 다시 바닥에 웅크리고 엎드려 뒤통수만 싸매고 양옆으로 한참이나 구르다 겨우 일어났다.

“아니라니까 자꾸 말하게 하네.”

“말…… 안 하셨잖아요. 그냥…… 그냥 냅다 패셨잖아요…….”

화륜의 체구는 분명 자신의 반만 한데, 대체 언제 그렇게 귀신같이 움직여 자신을 두들겨 팬 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좀 멀리 가야 해.”

“멀리요…….”

“그런데 같이 가는 건 아니고. 알아서 거기까지 올 거면 오고.”

그러니까 화륜의 말만 믿고 먼 타지까지 알아서 가야 한다는 그런 얘기였다.

“네가 안 와도…….”

화륜은 거기까지 말하다가 불현듯 입을 다물었다. 그걸 반쯤 협박하는 것으로 알아들었는지 백의명이 얼른 말을 받았다.

“어, 어, 어디든 가겠습니다! 제가 어르신 아니면 어디서…….”

그 순간 백의명의 숙소 문이 벌컥 열리며, 머리카락이 새하얀 노인네와 새카만 노인네가 기세등등하게 들이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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