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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45)화 (145/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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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45화

남은 것은 이제 재료뿐인데 그녀에게는 이 무림 최고의 약초꾼이 있다. 약여청에게 부탁한 차였다. 북해에 갔다 돌아올 즈음이면 약여청이 약초를 산더미같이 쌓아 두고 련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세가의 무공에 대한 것이라면 하루 종일 서고의 책을 읽고, 단목천기에게 직접 부딪혀 가며 배우고, 밤에는 선경을 통해 논검으로 분석하며 방계 아이들을 위한 맞춤 참고서인 작은 책자 열 부를 다 쓴 차였다.

그리고 집필이 얼추 마무리되자마자, 단목천기는 이걸 필사해서 세가의 서고에 보존해야겠다는 강력한 뜻을 피력하곤 원본을 가지고 갔다. 아마 직접 필사를 할 요량인 듯했다.

“흐아아아.”

련은 눈가에 묵직한 따뜻함이 번지는 걸 느끼며 앓는 소리를 흘렸다.

련이 애쓰는 걸 보며 속상해하던 유모 장 씨가 곡물 주머니를 만들어서 데워다 눈에 올려 주었지만, 그녀도 북해로 보낼 짐을 챙기느라 바빠 오래 자리를 지키진 못했다.

대신 화륜이 침상에 드러누운 련의 곁에 앉아서 곡물 주머니 끝자락을 슬쩍 매만지며 물었다.

“이렇게까지 급하게 할 거 있어요? 천천히 해도 되잖아요.”

련은 어둠으로 가려진 따뜻한 시야에 잠겨 눈동자만 되록되록 굴리며 대답했다.

“나도 겸사겸사 공부하고, 북해 가기 전에 애들한테 주고 가려고.”

“……그러니까요. 갔다 와서 줘도 되잖아요.”

눈을 곡물 주머니로 덮고 있으니 화륜의 얼굴도 보이지 않지만 왠지 투덜거리는 그 얼굴이 선했다.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이 제법 걸릴 테니까 그사이에 도움이 되면 좋잖아.”

련은 그렇게 말하며 내심 탄식했다.

경항운련에서 그간 영문도 모르고 차곡차곡 쌓아 둔 행운 수치가 아니었으면 누군가를 잃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그 일이 있고 나서 행운 지수를 아주 많이 되돌려받긴 했지만, 무엇이든 다다익선 아니겠는가?

자신이 두고 간 걸로 아이들이 공부를 하면 그동안에도 행운 수치가 착실히 쌓일 것이다.

‘불 한번 난 걸로 쌓아 뒀던 행운 수치를 다 태웠는데…… 이번 여행에 다른 큰일이 한 번이라도 있으면?’

남궁세가에서는 말 그대로 행운 수치를 태웠다고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아니면 녹였다고 할까, 증발시켰다고 할까?

‘내가 혈귀와 맞상대했을 때 행운 수치를 좀 덜 썼으면 좋았을 텐데.’

그때 행운으로 보정되는 것만 믿고 아무렇게나 휘두르다 까먹은 행운 수치가 뒤늦게 뼈아팠다.

그 부분은 자신이 보다 적확하게 검을 휘두를 수 있다면, 운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완벽하게 방어하고 매섭게 반격하고 치명적으로 공격할 수 있다면 보완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거기에 자신의 몸에서 솟아나는 이 영기를 가지고 내공을 쌓을 수 있다면 정말 완벽했을 테지만 안 되는 데 매달릴 수는 없었다.

련은 남궁환이 필사해 준 책을 떠올리며 솟구치는 아쉬움을 갈무리했다. 자신이 내공을 쌓지 못하는 이유는 이미 알고 있다. 이 휘몰아치는 영기를 가지고 육신을 유지하기도 버겁기 때문이다.

남궁환의 책에 적힌 여러 가지 방법들이 참고가 되긴 했지만 당장 련의 상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나도 미리미리 공부하는 게 도움이 돼.”

련이 책에서 읽었던 내용과 단목천기가 가르쳐 준 초식들을 머릿속에서 복기하며 손끝을 까딱거리려는데 화륜이 홱 그 손을 잡아채 내리눌렀다.

“가만히 있어요.”

“아, 알았어.”

괜히 혼이라도 난 것처럼 련은 얼른 몸을 움츠렸다.

곧 얇은 천 같은 것이 어설프게 몸 위에 덮이는 것이 느껴졌다. 화륜이 담요를 가져온 것 같았다.

“……너무 걱정할 거 없어요.”

“내가 무슨 걱정을 해?”

련이 웃으며 물었다.

“내 걱정은 륜아 너밖에 없는데.”

“거짓말.”

“내가 널 걱정하지 그럼 뭘 또 걱정하는데?”

“……혈라곡 말이에요.”

련은 잠깐 숨을 멈췄다가, 눈을 덮고 있는 곡물 주머니를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부드러운 손이 그녀를 도로 내리눌렀다. 곡물 주머니도 여전히 눈을 덮은 채였다.

“……어떻게든 될 거예요. 그렇게 누이가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러나 련은 전에 없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건 어떻게든 안 돼. 그러니까 내가 뭐라도 해야 돼.”

어쩌면 자신이 못 본 미래에는 정말 어떻게든 됐을 수도 있지만, 그전까지는 그렇지 않았다.

가족들은 다치거나 울거나 죽었고, 무림은 휩쓸려 갔다.

그 모든 비극 이후에 어련히 알아서 잘 처리되길 바라는 게 아니었다. 그 전에, 모든 걸 잃기 전에, 소중한 사람들이 다치기 전에 어떻게 하고 싶은 것이다.

“누군가 뭔가 한다면 누이가 아니라 어른들이 해야죠.”

“넌 모르겠지만 이 누이는 벌써 어른이란다.”

“네, 네. 알 것 같아요.”

“안다는 녀석이 맨날 기어오르려고 해?”

“저도 다 컸거든요?”

이번에야말로 련은 벌떡 일어났다.

“이 쪼끄만 게.”

화륜의 정수리를 콩 쥐어박자, 화륜은 한 손으로 정수리를 문지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떨어지는 곡물 주머니를 낚아채며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련을 쳐다보았다.

“혈귀 상대할 때보다 더 날랜 거 아니에요?”

“그게 다 공부의 성과다, 꼬맹아.”

“제가 누이보다 더 크다고요. 진짜.”

“키 좀 빨리 컸다고 전부가 아냐. 사람이 마음도 커야지 어른이란다.”

“하. 누구 덕분에 마음도 완전 컸거든요. 덕분에 사람이 생전 안 하던 짓을 하고 있는데.”

“무슨 짓? 너 어디 가서 뭐 했어?”

“아 가긴 어딜 가고 하긴 뭘 해요! 옆에서 이렇게 수발을 들고 있잖아요!”

화륜은 버럭 투덜거리곤 련을 다시 침상에 눕히고, 곡물 주머니를 대강 흔들어 다시 련의 눈 위에 덮어 주었다.

“어? 다시 따뜻해졌다…….”

련이 흐물흐물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따뜻한 어둠 속에 파묻힌 련은 화륜이 크게 한숨 쉬는 시늉을 하면서 남몰래 웃은 것은 보지 못했다.

* * *

남유평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품 안의 보따리를 보물처럼 싸 들고서 세가 안쪽으로 발을 디뎠다.

일평생을 보석 세공 장인으로 살다가 항주에서는 완전히 내쳐져, 근근이 밥그릇 수리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던 그였다.

단목세가에서 장손께서 쓰실 장신구를 구매하기 위해 장인과 상인을 불러 모은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남유평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세공했던 상아 구슬을 떠올렸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구슬을 겉에서부터 세공해, 안쪽에 다시 작은 상아 구슬이 들어간 형태로 만든 5층 다층구(多層球).

그러나 자신이 기웃거려 본들 단목세가에서는 그를 얼씬도 못 하게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항주 거리에서 내쳐진 건 다름이 아니라, 의뢰받은 물건을 상하게 했기 때문이었으므로.

가명이라도 만들어 볼까 했으나 이 바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란 결국 빤한지라 숨길 수가 없었다.

그런데 문지기는 그의 이름을 듣고도 세가 안에 들어갈 수 있게 허락해 준 것이다.

“쯧쯧…… 무림 세가를 등쳐 먹으려 들면 살아남지 못할 텐데, 겁도 없이.”

그때 누군가 그의 등을 툭 치고 지나가면서 중얼거렸다.

남유평은 화들짝 놀라 몸을 움츠리면서도 행여나 자신의 상아 다층구가 상할까 두려워 고개도 들지 못했다.

“그…… 그런 적 없소.”

작게 웅얼거렸지만 아무도 그의 대꾸를 들어 주지 않았다.

“사기꾼까지 들여놓다니. 단목세가가 참으로 관대한가 봅니다.”

“저치가 세공 실력은 좋았으니…….”

“정작 귀중한 옥비녀를 분질러 먹었는데 어찌 세공 실력이 좋다 하겠습니까?”

“무슨 보석도 바꿔치기했다지 않습니까?”

모두 누명이었다.

지부대인 사촌이 수리를 부탁했던 옥비녀는 그가 손을 대기도 전부터 금으로 감싸인 부분이 부러져 있었고, 그걸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그가 부정하고 분노할수록 일은 꼬였다. 나중에는 다른 장식의 보석을 가짜 보석으로 바꿔치기한 게 분명하다는 소문까지 얽혀 아무도 그에게 세공을 의뢰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가 만든 물건을 사지 않았다.

이번에 단목세가에서 장인들을 불러모으는 자리에 온 것은 그의 마지막 용기였다.

그가 하루에 한두 끼만 먹으며 모은 돈으로 어렵사리 구한 상아를 깎아 만든 이 구슬을 제값을 받고 팔 수만 있다면 혼백이 불타 재가 되어도 좋았다.

어깨를 움츠린 남유평이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그들이 모인 공간의 상석에 불쑥 나타난 작은 소녀가 털썩 앉았다. 옆에는 소녀보다 조금 더 키가 큰 소년이 서 있었는데, 유려한 이목구비로 좌중을 죽 훑어보는 눈길에 묘하게 주눅이 들었다.

그 뒤로 몇몇 사람들이 소녀를 보좌하듯 서 있었는데, 남자들 쪽은 모두 모르는 이들이었으나 근사한 차림새를 한 여자는 그도 알아보았다.

‘만송상단의 견 장궤님?’

상단주의 둘째 딸이 말단 장궤에서부터 시작해 마침내 장자를 제치고 후계자가 된 건 놀라운 일인 데다가 견위운은 종종 직접 상점가 거리를 둘러보곤 하기에, 상점가 사람들치고 그녀의 얼굴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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