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48화
따지고 보면 련이 처음 그녀에게 해 준 충고부터 그랬다. 견위운은 마음속에 기록된 단목련 항목에 ‘이 애가 진짜 선인이라 하더라도 놀라지 말 것.’이라는 한 줄을 적어 넣은 지 오래였다.
그러니까 청련수의 배합비, 백약청의 제조법 이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다른 모든 것들보다 이 아이가 제일 중요했다.
청련수와 백약청으로 세가를 일으킬 자산을 만들고, 자신을 만송상단의 후계자로 떠밀 수 있는 아이라면…….
물론 이런 이야기를 소리 내 하면 비웃음이나 살 것이 뻔했기에 마음속으로만 품고 있지만.
“거기다 운하를 타고 올라간다지? 이번엔 위학을 만나기 어렵겠구나. 녀석이 많이 서운해하겠어.”
“저도요.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는 별다른 일 없으면 운하를 타지 않고 느긋하게 내려올까 해요. 그때 위학 숙부도 만나 뵈려고요!”
“그렇다면 제일 좋겠구나.”
“올 때 선물 사 올게요. 북해에는 여기랑은 다른 신기한 게 많겠죠?”
련이 그렇게 말하며 눈을 반짝이자 눈동자 위로 보석 같은 별빛이 떠올라 빛났다. 그 천진난만한 모습이 딱 그 또래로 보였다.
견위운은 잠깐 어려움을 느낀 듯이 입술을 달싹이다가 ‘선물 기대하고 있을게.’라고 작게 말했다. 양친에게도 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 * *
단목세가가 소유한 유성표국의 표국주 양금보는 주위 사람 눈치를 많이 보고 다소 소심한 것이 단점인 사람이었는데, 달리 말하면 주변 파악이 기민하고 신중하다는 뜻이었다.
표사들과 일거리가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유성 표국을 어떻게든 그 겉껍데기만이라도 유지하고 있는 것도 다 그의 공이었다.
“아, 아니, 이게 무슨, 정말로…… 잠시, 잠시만요. 아이고, 부당주님. 잠시만 부탁드립니다. ……각주, 설 각주!”
‘잠시만요’까지는 한껏 후덕하게 웃는 얼굴로 말했던 양금보였으나, 절세미남을 방에 내버려 두고 뛰쳐나왔을 때는 거의 야차와도 같은 표정이었다.
“왜, 왜?”
빠른 걸음으로 도망치다시피 걸어가던 재경각주 설관희는 덜미를 잡혀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외당주님 부군을 장궤로 써먹으라는 게 뭔 소리냐?”
양금보가 저승사자와도 같이 음산하게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조금 전까지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상대는 바로 단목현요의 남편 석반안이었다.
표국 소유주 일가의 한 사람이 표국주도 아니고 표국의 신입 장궤로 일하고 싶다며 찾아온 것이다.
보통 한 조직에서 금전과 관련된 업무를 전담하는 것이 장궤인데, 중요한 업무인 것에 비해 대우는 박하고 온갖 잡무까지 도맡아야 했다.
그래서 견언조의 딸 견위운이 상단에서 장궤 일부터 시작했던 것이 사람들 입방아에 올랐던 것이다.
그런 일을 외당주 남편이 하겠다고 찾아왔으니!
“단목세가에서 날 국주 자리에서 내려오라 하는 거면 그냥 말로 하시오!”
“아이고, 그런 것 아니네. 련 아가씨는…… 아니, 태상가주님께서는 국주로서 자네의 역량에 만족하고 계시네. 부당주께서는 정말 순수하게 장궤 일을 해 보려고 하시는 것이고. 그냥 일반 장궤로 대우하면 돼.”
“아 그래? 그럼 장궤 일을 하려면 금전 다루고 기록하는 법부터 배워야 하니 재경각에서 먼저 배운 뒤에 보내 주시면 되겠구만.”
“그건 또. 그분이 저쪽 풍림 전장 출신 아닌가? 기본은 다 하고 오셨으니 장궤로 바로 쓸 수 있을 것이야.”
양금보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얼굴로 설관희를 쳐다보았다. 설관희가 빙긋 웃었다.
비명을 지를 일은 사실 재경각에서 먼저 일어났다.
외당의 부당주인 남편이 표국 밑바닥에서부터 일하겠다고 했으니 단목현요가 가만 있었겠나.
— 련아야! 이게 무슨 일이냐! 그이가 갑자기 장궤, 표국에서 장궤를, 아니 며칠 전에는 밤을 새워 뭔가 쓴다 싶었더라니 세상에! 갑자기 장궤 일을 하겠다고!
재경각까지 달려와서 거의 울 것처럼 눈 끝을 떨며 하소연을 하는데 재경각이 쓸려가는 줄 알았다.
물론 잘 마무리되었다. 한바탕 하소연을 늘어놓은 단목현요는 단목련이 조곤조곤 하는 말을 귀담아듣더니, 끝내는 눈물을 훔쳐내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큰 결심을 하고는 재경각을 떠났다.
남편이 하고 싶은 대로 해 주기로 한 것이다.
‘그때는 진짜 무슨…… 아기씨가 무슨 목소리로 기문진법이라도 펼치는 줄 알았는데.’
그냥 다들 아는 말, 맞는 말, 도리와 이치에 들어맞는 뻔한 말만 늘어놓을 뿐이었는데 단목현요는 어느 고승에게 조언을 들은 듯이 눈물을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모부에게는 고모부의 행복이 있다는 말 한마디가 그렇게나 대단한 얘기였던가? 그렇게 홀린 듯이 납득하고 돌아갈 정도로?
“아랫사람으로 부리다가 그분 기분이 상하시면 나는 뭐 염라대왕과 인사라도 하고?”
“그럼 윗사람으로 부려. 윗사람한테 풍림전장의 표국 일을 좀 배운다고 생각하고.”
‘윗사람’과 ‘부린다’는 말이 공존할 수 있냐고 투덜거리던 양금보였으나 더는 거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나 그래도 맘에 걸리는 바가 있었다.
“그런데 일이야 그렇다 쳐도……. 너무 부담스러운 얼굴 아니냐.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해?”
“…….”
그 부분만은 설관희도 혀를 매끄럽게 놀리지 못하고 잠시 침묵했다.
단목세가가 한때 위태로운 와중에서도 세가로서의 위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부분 중 하나가 바로 단목현요 부부의 외양이었다.
옷만 근사하게 입혀 내보내면 잘 모르는 자들은 선계의 선인들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외모들 아닌가.
“그래도 그 부분은 자네가 걱정할 일 없을 걸세.”
“뭐? 어떻게?”
“무슨 일이 생겨도, 그때 자넨 북해에 있을 테니까.”
“뭐?”
“표국의 세를 완전히 확장하기 전에 이번 표사들도 함께 북해로 가기로 했다. 세가에서 정식으로 의뢰하여 가는 것이니 자금 걱정은 할 것 없고.”
양금보는 입을 떡 벌렸다. 장거리 여행은 고되지만 그만큼 큰 경험이다.
일정 거리 이상 가는 표행의 경우 경험이 없으면 아예 맡을 수도 없는 게 태반이었다.
그런데 이 표국의 절반 이상이 저 먼 새외까지 오간 경험이 있다면?
“현재 진행 중인 표행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원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북해로 보낼 준비를 해 주게.”
“신입 표사 모집 일정이 말도 못하게 빡빡하더니 이것 때문에?”
“아기씨의 생각이셨네.”
“허흠…….”
양금보가 무안한 표정으로 연신 헛기침했다.
신입 표사를 뽑고 증원하는 일정이 생각보다 빠듯하여,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냐며 생각으로는 할 말 못 할 말을 다 하였는데…….
“아니, 그럼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얼른 짐을 챙겨야지! 이 사람아, 그런 일이 있었으면 빨리빨리 언질이라도 주지 그랬어!”
양금보가 이마를 철썩 내리치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 길을 떠나야 하니만큼 챙겨야 할 것이 많았다.
장거리 여행에 준비할 것들과 그 경험으로 앞으로 따낼 수 있는 일들을 중얼거리며 달려 나가는 양금보의 얼굴에 조금 전과 달리 반짝이는 빛이 깃들어 있어서, 설관희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가라앉는 배에서 필사적으로 물을 퍼내는 일은,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절박해 다른 일을 할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양금보는 그저 자리를 보전하는 데나 관심이 있는 인물이 아니었음을, 다만 그때는 그것밖에 할 수 없었음을…….
* * *
련은 어머니 위지청과 나란히 앉아서 도라지를 손질했다.
약당주 단목현우는 위지청이 도라지를 손에 쥔 걸 보고선 몸 둘 바를 모르다 못해 거의 기절할 것처럼 굴다가, 부당주 풍소강에게 이끌려 약당 밖으로 반쯤 쫓겨났다.
— 아이고, 당주님. 도라지는 솔직히 저희보단 아가씨가 훨씬 더 낫지 않습니까.
— 그건 그렇지만 내당주님께서도, 어어, 형수님까지 저리 하고 계시면 나도…… 응? 문영 아니냐? 왜 그러느냐.
— 당주님, 부당주님을 뵙습니다. 저, 당주님. 남궁세가에서 급히 사람을 보내왔는데 확인을 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 남궁세가에서……?
— 그쪽 경무 도련님께서 감쪽같이 모습을 감추셨다는데 혹시 아시는 바가 있는지 다급히 여쭙는 것 같았습니다.
— 아, 아이고? 그런 일이. 그런데 나는 무슨 일인지, 어, 무슨 일인지를 모르겠…… 는데……. 서신 전한 사람 표정이 많이 안 좋던?
—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세 사람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멀어졌다.
련은 킥킥거리며 위지청과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이건 만들어서 할머니 드리려고요.”
“이 어미도 부족하지만 한 손 보태련다. 이번에 뵙진 못하겠지만 좋아하셨으면 좋겠는데…….”
위지청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한창때의 무인이 가진 내공을 태워 어린아이를 도왔으니 그가 당장 영단을 쓸 수 없는 상황이라 해도 한시바삐 보은하는 것이 도리라, 북해빙궁에서 보내온 한련서리단(寒蓮暑鯉團)을 얼른 화산으로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그 일을 위지청이 맡은 것이다. 북해까지 가기는 아직 너무 어려 세가에 남기로 했던 단목비도 위지청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