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49화
‘내가 가는 게 맞지 않나 했지만…….’
련의 외숙부인 청윤진인이 아직까지 폐관 수련 중인지라 련은 북해에 들렀다 돌아오는 길에 화산을 방문하기로 했다.
그렇게 결심한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할머니 장례식이…… 머지않았었어.’
지난 생에는 앓아누워 있느라 바빠 세상사 돌아가는 형국을 전혀 알지 못했지만, 겨울이 접어들 무렵 집안사람들이 급히 북쪽으로 떠났던 것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자신이 깨어나 단목세가 안에서 많은 걸 바꾸고 얻었지만, 그 여파가 북해에까지 퍼져 아프던 사람이 갑자기 쾌차할 리도 없었다.
귀한 한련서리단을 둘이나 보내 준 것도 마음에 걸렸다. 병든 채 귀향한 사람이 무슨 재산이 있어서 그런 걸 마련하여 보냈을까?
북해에서 물려받은 마지막 유산을 전부 끌어모은 것은 아니었을까?
자신이 가면 뭔가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위지청이 련의 뺨을 쓸어내렸다.
“북쪽에도 금목서가 피면 좋을 텐데, 아쉽구나. 몇 그루 보내 드리고 싶었는데. 우리 련아가 이렇게 가꾼 거라고…….”
약당에서 도라지 손보기 직전까지, 련과 위지청은 세가의 화단을 돌며 아직 푸르기만 한 금목서 나무들을 다듬었던 차였다.
“다음번에는 금목서로 향유를 만들어서 선물해 드릴까요? 이번 가을에 꽃이 피면요.”
“그거 좋겠구나! 아니면 련아가 향을 만들어서 보내 드리면 어떨까?”
“……네?”
“얼마 전에 네가 륜아와 향을 만들어 보려고 하지 않았니?”
련은 뜨끔한 표정으로 눈동자만 굴렸다. 그 향 만들기는 대차게 실패한 바람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련의 표정만 보고도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챈 위지청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가 이윽고 눈꼬리까지 접고 미소 지었다.
벌모세수를 받기 전까지, 딸아이는 이름을 불러도 돌아보지 않고, 웃지도 울지도 않고 그저 당기면 끌려오고 밀면 밀려나는 인형 같기만 했다.
그러다가 눈에 빛이 되돌아오고 의식을 차렸을 때, 그 이후로는 그전의 모습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영민하고 명랑해졌다.
그렇게 정신을 차린 아이는 실수와 실패를 몰랐다. 눈부시게 빛나는 재능과 신중하면서도 대범한 성정, 다정한 마음씨를 가지고서 모든 일을 척척 해내기만 했다.
완벽한 아이가 되어 주길 한 번도 바란 적이 없었는데 마치 그간에 민폐를 끼쳤다고 여기는 것처럼, 꼭 그걸 다 갚으려는 것처럼 그랬다.
그런 딸이 이번에 실수를 하고서는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어떻게 됐길래 우리 딸이 이런 표정일까?”
“어, 어머니. 그게요…….”
련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더듬더듬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했다.
향을 만들어서 태워 보기까지 했는데, 분명 잘 만들었다고 생각한 향에서 시커멓게 연기가 난 바람에 눈물 콧물을 흘렸다는 얘기였다.
위지청은 빙긋 웃으며, 지금은 말끔한 딸의 눈가와 코끝을 닦아 내듯 쓸어 보았다.
딸이 하는 이런 실수마저도 자신을 위해 그래 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건 잘하니까요!”
민망한지 련이 도라지 한 뿌리를 얼른 집어 들며 배시시 웃었다. 위지청도 조그만 도라지를 나란히 손질하면서 빙긋 웃었다.
“이 어미도 열심히 했는데 보기에 어떠니?”
“최고예요!”
“이러고 있으니 마음 편하고 좋구나. 우리 딸하고 같이 있어서 그런가?”
아닌 게 아니라 위지청은 약초 향이 익숙한 듯, 무척 편안한 손길로 손질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지막 단지까지 밀봉하여 밀랍을 발라 여미고 약당을 나섰다.
날씨는 완연히 풀려 여름에 다가가고 있었다. 련은 자신의 처소 앞에 새로 생긴 연못에 다다랐을 때, 어머니 위지청 몰래 다소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거북이, 자라, 심지어 달팽이도 다 쫓아내곤 있는데…….’
여기에 연못이 생긴 건 단목현요 때문이었다.
련이 단목현우의 처소에 있는 연못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는데 어느 날 그 잉어가 감쪽같이 사라지지 않았는가?
그 이후로 련이 상심했을 거라고 생각한 단목현요가 대뜸 련의 처소 앞에 작은 못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단목현요는 요즘 부쩍 성취가 빨라진 단목현우가 보양을 위해 조카 몰래 잉어를 잡아다 고아먹었다고 여기는 눈치였다.
— 아무리 네 잉어 네 마음대로 하는 거라지만 조카가 그렇게 아껴 줬는데!
단목현우는 차마 다 같이 가서 서호에 방생해 주고 왔다고 말하지 못하고, 련 역시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그저 등딱지 비슷한 거라도 가지고 있는 것들은 다 쫓아내고 있는 터였다.
잉어가 잘못되면, 아니, 잘되면 용이 될지도 모른다. 주작은 이미 만들었다. 백호까지는 사실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최선을 다해 모르는 척하는 중이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하나다.
괜히 등딱지가 붙은 걸 잘못 키워서 현무라도 되면…….
‘륜아 그게 날 잡아먹으려고 들 텐데.’
오골계에 잉어로도 부족했냐며 눈에 불을 켜고 쪼아댈 게 뻔했다.
련은 연못의 작은 연잎 틈새에도 조그만 거북이가 숨어들진 않았는지 살펴보곤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안심하며 허리를 폈다.
“외당주님께 감사드려야겠다.”
“네?”
“우리 딸이 이렇게 연못 돌보는 걸 좋아하는데 이렇게 만들어 주셨으니까.”
“아…….”
련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위지청은 그런 련과 정자에 앉아, 딸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내당 말고 약당에서 일하겠다고 할까? 안 그래도 약당주가 부러웠는데.”
“숙부가요?”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련은 놀라서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러면서 약당 쪽을 쳐다보기도 했다.
위지청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약당주께선 우리 딸하고 매일같이 함께 있잖니.”
“이제 제가 내당 일도 공부할게요!”
“약속했다?”
그렇게 소곤거리던 위지청은 해맑은 딸의 얼굴을 가만히 살펴보다 꼭 끌어안고서 문득 중얼거렸다.
“……태양은 행복할까?”
“네?”
온기와 빛을 주고 곡식을 영글게 하는 태양은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지만, 그 환한 빛은 그 자체로 희망이고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지만…….
태양은 그러고 싶은 것일까?
그것이 태양에게도 행복이고 기쁨일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란다. 북해까지는 먼 길이니 조심히 다녀와야 해, 우리 딸.”
“걱정 마세요.”
“갔다 오면 금목서가 한창일 텐데 옆에 꽂아 두고 바둑을 두면 즐겁겠지?”
“그럼요.”
아마 옆에 꽂아 두지 않아도, 단목세가의 정원과 화단에 지천으로 심어 둔 금목서에서 달콤한 향기가 흐드러질 터였으나 련은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리고 며칠 뒤.
단목세가에서 사람들이 길을 나누어 출발했다. 한쪽은 새외의 북해로, 한쪽은 화산이 있는 섬서로 출발했다.
외당의 부당주이자 이제는 유성표국의 막내 장궤가 된 석반안이 그들을 배웅했다.
그리고 북해로 가는 일행의 뒤로, 아주 희미한 흑백 그림자가 따라붙었다.
* * *
이번 행렬은 지난번 경항운련 때와는 많이 달랐다.
우선 긴 거리를 떠나는 것이니만큼 준비할 것도 많았고, 사람도 더 많았다. 그리고…….
“그런데 할아버지, 왜 천비궁에는 안 들렀어요?”
련은 말 위에 탄 채, 등 뒤의 조부 단목천기에게 질문했다. 이번 여행길에 겸사겸사 승마를 배우기로 하여 단목천기가 자신의 앞에 손녀를 태운 차였다.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느냐고 하면, 산길에 접어들면서 련이 마차에서 멀미를 심하게 하기 시작한 게 문제였다.
정확히는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리고 식은땀이 나면서 영기가 급속도로 차오르는 복합적인 문제가 생겼지만, 영기는 온몸에 감고 온 장신구에 욱여넣고 두근거림과 식은땀을 멀미로 얼버무린 차였다.
‘산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북쪽이라서? 여기가 좀 더 영험한 건가?’
자연과 벗 삼은 곳으로 가면 갈수록 영기가 빨리 차오르는 것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가슴이 쿵쿵거리는 건 또 처음이었다.
괜히 화륜이 걱정할까 염려되어 바깥바람 쐬고 싶다고 나왔다가 조부의 승마 강습이 시작되고 만 것이다.
갑자기 바람을 쐬겠다는 련의 얘기에 화륜은 몹시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지만.
옆에는 이미 승마가 능숙한 단목성이 나란히 말을 몰면서 승마의 안전한 자세에 대해 이런저런 참견을 하다가, 련과 함께 나란히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조부를 올려다보았다.
련은 갑자기 천비궁에 대한 게 떠올라 질문을 했을 뿐이었는데 옆에서 호쾌하게 말을 몰던 단목현우가 큰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지난번에 기껏 거기까지 갔다 왔는데, 아무 효과가 없었던 것 같으니 다신 안 가신 거죠?”
“시끄럽다! 그리 장성해서 어찌 웃음이 이리 경박해.”
단목천기가 버럭 외쳤지만 단목현우는 조금도 기죽지 않고서 말을 몰고 도망치듯 앞으로 향했다.
선두에서 일행을 이끌고 있는 유성표국의 국주와 새로 고용된 표두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단목현우를 맞이했다.
“효과요? 아…….”
련은 그제야 남궁세가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 일로 어른들은 거의 기절할 뻔했지 않은가.
“효과가 있어서 아무도 안 다치고 나왔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