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50화
단목천기는 고집스레 입을 꾹 다물기만 했다. 굳이 손녀가 좋게 좋게 해 주는 말에 반박하고 싶지는 않지만 썩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단목성이 조부와 완전히 똑같은 표정으로 련을 쳐다보았다.
련이 황급히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까 이 산에도 무슨 사당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운하에서 사람들이 그랬잖아요. 지나가다가 보이면 한번 들를까요?”
오래된 사원에 들르면 무슨 말이라도 한마디 더 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 천비궁에 들렀을 때도 그런 이유로 들었으니까.
“아이고, 련아야! 그건 사당이 아니라…….”
앞서 달려 나가서는 표국주와 표두에게 실컷 장난을 치고 다시 말을 몰고 돌아온 단목현우가 팔을 뻗어 련의 뺨을 쓸어올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사당이 아니라 산채.”
“산채요?”
련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산채라는 말의 의미를 몰라 그러는 것인 줄 안 단목현우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어렸다.
그사이 련은 고개를 흘끗 들어 단목천기의 표정을 살폈다. 왜인지 단목천기의 표정에 번뇌와 쓴웃음, 그리움과…… 실낱같은 증오와도 같은 게 서려 있어서였다.
“그래, 녹림칠십이채라고 들어 보았느냐? 흑천련의 십삼천 중 제삼천이 녹림맹이지. 그들은 보통 이렇게 지나가는 여행객들을…….”
그리고 그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우아아아아!”
멀리서부터 병장기 소리가 나며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나름 통일된 복장을 갖추기는 했으되 군대처럼 규율이 잡혀 있지는 않았고 인상들이 다들 몹시도 험악했다.
그와 동시에 얼른 단목현우가 련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흔들었다.
“이렇게 찾아온단다! 아이고, 무서워라! 우리 련아가 이 숙부 지켜 줄 테야?”
련은 그만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녹림채가 몇이나 나타난다 한들 단목천기가 있는데 두려울 게 무어 있으며, 어른들은 이미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산적들의 기척을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너는 어린 조카한테 못 하는 말이 없니!”
그러기가 무섭게 단목현요가 다가와 꾸중했다. 단목현우가 입술을 삐죽거릴 때 단목성이 말했다.
“련아는 제가 지켜 줄 테니 어머니는 숙부를 지켜 주세요.”
“아이고, 우리 딸!”
“서, 성아야…….”
단목현우가 창피해하고 단목현요는 웃는 와중에 누구도 두려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리고 그사이 표국주 양금보와 표두 팽자광, 곽소전이 말을 몰고 다가왔다.
“어르신!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일대는 저희 곽 표두가 훤히 꿰고 있으니 지금 일도 금방 해결할 것입니다. 이 무도한 자들이 감히 단목세가 앞에 나타나다니요.”
사실 표국주 양금보는 여태 여러 가지로 면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아무리 단목세가 소유의 표국이라곤 해도 지금은 ‘유성표국’으로서 단목세가의 의뢰를 받아 수행하고 있는 것인데, 북쪽 끝자락에 내려설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다가오는 자들은 그저 단목천기를 흠모하는 자들이고, 부유해 보이는 행렬을 보고 어리석게도 삿된 생각을 품은 자들은 단목천기의 눈빛 한 번에 떨어져 나갔다.
그 과정에서 표사들은 자신들이 무능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짐꾼과 길 안내로밖에 쓸모가 없는데, 사실 절강성에서 여기까지 먼 길을 가 본 사람이 없으니 그 길 안내도 썩 야무지지 않았다.
그나마 산서성 출신인 곽소전이 활약을 하고 있어 별다른 탈 없이 여기까지 왔지만…….
그 사이사이 오히려 고용주 쪽에서 헤매지 않게 눈치껏 길을 알려 주거나, 갑자기 쏟아지려는 소나기 같은 걸 알려 주곤 했다.
아무리 이번 여행이 표국 입장에서는 장거리 여행의 경험을 쌓기 위해 가는 것이라곤 해도 그렇지!
양금보는 자신이 엄청나게 유능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무능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그게 틀렸나 하는 자괴감에 휩싸여 잠 못 이루던 차였다.
이래서야 세가에서 이런 무능한 표국을 계속 끌어안고 운용할 것이 아니라 없애 버리자고 해도 할 말이 없지 않나.
‘이 녹림채 놈들이라도 시원하게 쫓아내면!’
그러면 표사로서의 쓸모를 증명할 수 있을 터다. 양금보의 어깨에 힘이 딱 들어갔다.
그렇다고 굳이 피를 보면서까지 일을 해결할 생각은 아니었다.
일단은 가장 선두에 나타난 채주부터가 범상치가 않았다. 산중호걸이라는 말을 사람으로 빚어 놓은 것 같은 인상이었다.
거기다 산채가 들어선 곳에는 으레 관례가 있기 마련이니 그를 따라 부드럽게, 그러나 저것들이 감히 단목세가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이 앞에 산적 패거리를 끌고 온 것에 대해서는 적절한 대가를 치르도록…….
그러나 양금보는 말을 몰고 몇 보 앞으로 가지도 못하고 멈춰 서고 말았다.
“멸! 라!”
“행! 협!”
“……?”
온 산적들이 한데 모여 우렁차게 외치는 소리에 산새들이 놀라서 요란하게 날아갔다. 공기마저 찌르르 울렸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스르르 갈라지며 한 남자가 나타났다.
험악한 얼굴, 누가 봐도 ‘산적’이라고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는 그 남자가 저벅저벅 다가와서는 먼저 말에서 내리기까지 한 것이다.
이제는 아무도 외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구호는 과거의 영웅이었던 단목천기를 기리는 뜻이 분명했다.
주위가 고요해지자 남자는 단목천기 앞에서 포권지례했다.
“무림 말학이 무월검 어르신을 뵙습니다!”
“자네는…….”
단목천기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산적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이 야트막한 언덕에 집을 짓고 살고 있는 황추혼이라고 합니다.”
언덕이라고 말했으나 실상 이곳, 무령산은 험한 산이었고 여기에 집을 짓고 살고 있으니 녹림이라는 말을 에둘러 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양금보는 그 이름에 놀랐다.
‘황추혼? ……패천일도 황추혼!’
흑천련의 십삼천 중 하나, 제삼천의 천주이자 녹림맹 맹주가 될 수도 있었던 걸물이었다.
그가 왜 그 영광을 포기하고 무령산에 눌러앉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으나 북부에 그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그 얘기에 표사들이 긴장감 어린 표정으로 병장기에 손을 가져다 대는데도 황추혼은 아랑곳없이 말을 이었다.
“이리 나선 것은 다름이 아니라 곧 비가 쏟아질 듯한데, 어르신의 행렬이 지나가는 걸 보고 도움을 드릴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뭐……?”
“비?”
산을 넘어가는 길인데 예고 없는 비가 쏟아진다면 치명적이었다.
단목천기의 눈길이 양금보에게 향했다. 양금보 곁의 곽소전이 작게 소곤거렸다.
“먼 하늘에서부터 비구름이 커지고 있긴 합니다. 한 시진이 지나기 전에 비를 만날 수도 있겠습니다.”
작은 목소리였으나 단목천기가 듣지 못했을 리도 없었다. 양금보도 표정이 흐려졌다.
“빗길에 대한 대비가 부족한 것은 아니오나…….”
먼 길을 떠나며 궂은 날 하나 대비하지 않았으랴마는, 아무리 대비를 한다 한들 처마 아래서 쉬는 것과 같을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러나 여전히 단목천기가 아무 말이 없자 황추혼이 입을 열었다.
“북해로 가시는 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단목세가의 긴 여행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강호에 이미 파다했으므로 북쪽의 유명 산채까지 그 소식을 들은 게 썩 놀랍지는 않았다.
그러나 황추혼의 다음 말에는 모두 놀랐다.
“수십 년 전 그 난리 통일 때, 철담빙혼께서 멸문할 뻔했던 저희 산채를 구해 주셨지요.”
철담빙혼 빙설언.
단목천기는 아주 오랜만에 들은 아내의 별호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황추혼의 깊은 시선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알고 있네.”
저 먼 새외의 빙궁에서 가질 수 있었던 모든 걸 두고 그의 곁으로 왔던 빙설언은, 그와는 꼭 결이 맞는 사람이었다.
가진 힘으로 남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아들이 혈라곡과 맞붙었다는 소리를 듣고 달려가는 길에도, 그 거대한 악에게 휩쓸리는 약한 것들을 두고 보지 못했다.
이 길목이 바로 그 길이었다.
혈라곡에게 당해 죽어 가는 산채 사람들을 두고 보지 못했던 빙설언은 그들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이 자리에서 혈라곡과 맞상대했다.
그리고 그 길 끝에, 이 산의 중턱에 있을 작은 사당 앞에서 쓰러진 아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전쟁은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혈라곡과 백도맹이 일시에 격돌했던 자리였고 빙설언이 늦었듯 마천교 역시 늦었다.
빙설언은 아들을 구하러 가기까지 걸음을 멈췄던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다만 거기에 발목잡혀야 했던 자신의 약함을 증오하고 한탄했다.
자신이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조금만 더 힘이 있었더라면, 차라리 자신이 빙궁주였다면…….
그 자해에 가까운 자책과 한탄을 단목천기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북해빙궁으로 돌아가는 그날까지 끝없이 했던 후회였다.
아들이 그날의 부상을 끝내 이겨 내지 못하고 낙화하였기에.
단목천기의 늙은 심장이 찌르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