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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53)화 (153/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53화

“나, 나는 패천일도의 무…… 무남…….”

뒤에서 하인이 작게 ‘무남독녀요.’라고 일러주었다.

“무남독녀 외동딸이니까! 상대가 누구든 난 내가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해!”

그러나 대꾸한 건 련이 아니라 화륜이었다. 팔짱을 끼고 선 화륜이 차가운 표정으로 황규온을 쳐다보았다.

“자기가 어디 왕부의 공주라도 되는 줄 아나.”

“뭐, 뭐라고?”

“륜아야.”

련이 얼른 화륜을 잡아당겼다. 화륜은 금방 어깨를 으쓱했다. 마치 ‘제가 무슨 말이라도 했어요, 누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야! 너 뭐라고 했어!”

황규온이 빽 소리쳤다. 화륜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왕부의 공주라도 이따위로 굴면 죽…….”

“우화륜!”

련은 화들짝 놀라서 화륜의 말을 막았다.

화륜이 성심이 고운 아이임을 온 힘을 다해 믿고 있지만, 그 믿음에 온 힘을 다해야 하는 점에서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네, 누이.”

화륜은 대답하며 고개를 갸웃하기도 했다. 마치 련이 왜 자신을 부르는지 전혀 모르겠지만, 친애하는 누이의 부름이니 응당 대꾸한다는 듯 천연덕스러운 표정이었다.

련은 이마를 꾹 짚었다 떼고는 얼른 황규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 사촌 언니도 없어?”

화륜에게 뭐라고 외치려 했던 황규온은 무엇부터 해결할지 갈등하다가 결국 련의 말에 먼저 대답하기로 했다.

“어…… 없는데.”

“사촌 언니한테는 존대하는 거야.”

옆에서 화륜이 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단목성이 한 달 생일이 빠른데도 맞먹고 있는 련을 생각하니 그건 또 웃긴 모양이었다.

‘얘는 진짜 종잡을 수가 없다.’

자긴 련을 보고 비웃어도 되지만 남들은 반말하는 것도 두고 보지 않고 쥐 잡듯 잡으려 드는 것이.

그사이 황규온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언니는 내 사촌 아니잖아!”

“너희 아버지가 우리 할머니를 친어머니처럼 모시겠다고 했으니까 너희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 동생이나 마찬가지지. 그러면 사촌 맞지?”

“……!”

황규온의 눈동자가 커졌다.

“언니가…… 단목련이야?”

“어? 내 이름을 알아?”

“알아…….”

황규온이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그리고 한참이나 쳐다보기만 하다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텄다.

“언니는…… 여기에 무슨…… 용무로 오셨나이까……?”

“푸흡.”

련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금지옥엽으로 자라서 남들에게 존대 한 번 안 해 본 모양이었다.

“왜? 난 여기 오면 안 돼?”

“난 황규온이니까 응당 알아야 하는 권리…… 권리가 있어. 있사옵니다…….”

황규온이 턱을 세우고 대꾸했다. 그 얼굴에 처음으로 혈색이 돌아 새빨갰다.

“그런데 언니, 저 애는 누구이옵니까?”

그러면서도 손을 홱 치켜들고 화륜을 적대적으로 가리키는 것도 잊지 않는다.

“얘는 내 동생 우화륜.”

“동생이면서 왜 언니는 단목련이고 얘는 우화륜이옵니까?”

“어른의 사정이 있어. 너는 여기서 뭐 하는데?”

황규온은 뭔가 이게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련의 질문에 생각을 이어 가지 못하고 무심결에 대답했다.

“자다가 깼는데 손님 왔다고 해서 구경하려고…… 여기 안에는 누구, 음, 누가 있사옵니까?”

“안에 있는 건 내 사촌 자매야. 그런데 너는 벌써 자고 있었어?”

련이 한 걸음 다가가서 황규온의 이마를 쓸어 넘겼다. 다정한 손길이었다. 옆에서 화륜이 가볍게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옆에서 황규온의 하인이 어쩔 줄 모르는 목소리로 설명하려고 했다. ‘저희 아가씨께서 몸이 많이 좋지 않으셔서요…….’

그러나 황규온이 그런 하인을 밀쳐내며 직접 말했다.

“저 원래 많이 자옵니다. 하루 종일 잘 때도 있사옵니다. 어떨 때는 일주일 내내! 그런데 언니는 동생들이랑 놀러 오셨사옵니까?”

거의 숨이 넘어갈 것처럼, 달리기를 하듯 말을 하던 황규온이 겨우 숨을 골랐다.

“다른 가족을 만나러 가는 길이야. 많이 멀리 계시거든.”

“멀리 어디?”

“북해빙궁.”

“북해? 북해는 어디에 있사옵니까?”

“천 밤 자야 갈 수 있는 곳.”

“하루에 십 리. 하면 천 밤이면 만 리. 만 리 너머에 계시옵니까?”

옆에서 또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화륜이 웃는 모양이었다. 련은 괜히 화륜을 한번 쏘아보곤 고개를 흔들었다.

“말 타고 가면 훨씬 빨리 갈 수 있어. 그보다 온아는 방이 어디니? 가서 일찍…….”

“언니는 어디 가시옵니까?”

황규온이 대뜸 말을 끊고 물었다.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인데 아닌 척하느라 애쓰는 듯했다.

“어? 나는 여기 사당에 인사 한번 올리러 가 볼까 하고…….”

“아! 그 귀신 사당?”

“……!”

련은 눈을 번쩍 떴다.

‘귀신 사당이라고? 그 정도로 영험하단 거야?’

“제가 가는 길 알아! 아옵니다! 구경시켜 줄게!”

“아이고, 아가씨!”

황규온이 그렇게 말하기가 무섭게 하인이 혼비백산했다. 여기까지 나온 것만 해도 큰일이라는 눈치였다.

련도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저렇게 창백한 안색에 호화로운 차림새. 아마도 황추혼의 사랑과 걱정을 한 몸에 받고 있을 터였다.

황규온이 하인과 티격태격하는 사이 화륜은 련의 얼굴을 빤히 쳐다만 보다가 말했다.

“누이는 얼굴에 무슨 꿀이라도 바르고 다니는 거예요?”

“가, 갑자기 무슨 소리야.”

“어디를 가도 어린애들이 족족 꼬이니까.”

“…….”

련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가까스로 속삭였다.

“저 앤 채주 딸인데 아프니까 산채 안에서는 친구가 없었나 봐. 또래 친구를 처음 봐서 그러는 거지…….”

“저 채소 국수 보면 백미밥도 가만있지 않을걸요.”

“……온아가 채소 국수야?”

“밥은 아니고. 비실비실하니까.”

“채소도…… 맛있고…… 힘 있고…… 튼튼해…….”

그사이에 하인을 제압하는 데 성공한 황규온이 당차게 다가왔다.

“가옵시다!”

“어, 지금은 비도 오니까.”

“지금은 괜찮사옵니다. 언니랑 있으면 하나도 안 아파.”

“그래도 안 돼. 얼른 침실로 돌아가야지. 오늘은 비도 오고 시간도 늦었으니까.”

“언니는 사당이 어딘지도 모르…….”

그때 황규온이 비틀거렸다. 하인이 거의 비명을 지르고픈 얼굴로 황규온을 부축했다.

“이거 놔! 나 알아서 갈 수 있다니, 있다니까……!”

황규온의 눈동자가 번뜩였지만 이윽고 힘없이 사그라들었다. 잠깐이나마 상기되었던 얼굴에 핏기가 싹 빠져나가고 거의 거뭇하게 죽어 갔다.

“어, 얼른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련 아가씨, 무례,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저희 아가씨가…….”

그때 련이 하인과 황규온을 붙잡았다.

“잠깐만!”

“아, 아가씨.”

“잠시면 돼. 잠깐만…….”

이 애가 ‘혈루’와 싸우고 있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련이 힘을 보태 주면 도움이 될 거라는 것도.

련이 지금 가진 힘은 영기뿐이었다.

련은 황규온의 옷에 매달린 장신구들을 빠르게 훑다가, 그 허리춤에 매달린 노리개 중 하나를 뚝 낚아챘다.

“아, 아가씨?!”

“잠깐만.”

황규온이 달고 있는 노리개는 한두 개가 아니었다.

장수를 기원하는 거북과 천도(天桃), 악귀를 쫓는다는 호랑이 발톱, 오복을 상징하는 박쥐, 사악함을 쫓고 복을 부르는 방울까지.

아마도 황규온의 부친 황추혼이 온 마음을 다해 달아 놓은 것일 테다.

그중에 련이 고른 건 방울이었다.

장인이 주조한 섬세한 방울 : 영력 용적 11

지금 영기를 담으실 수 있습니다.

여기에 올라오며 영기가 넘쳐난 차다. 한껏 힘을 집어넣자 방울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서렸다가 방울 안으로 스며들었다.

련은 얼른 그 방울을 황규온의 손에 쥐여 주었다.

“온아야, 이거 매일 하고 다녀야 해. 이 소리 나는 방울, 알았지?”

“언니…….”

황규온이 련을 쳐다보다가 방울을 꼭 움켜쥐었다.

바로 조금 전 휘청거릴 때보다 훨씬 안색이 좋아졌지만 하인은 품에서 떼 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먼저 자고 있겠사옵니다…….”

“그래, 그래. 얼른 들어가.”

“사당은…….”

황규온은 련의 귓가에 대고 무어라 속삭여 주고는 하인의 품에 머리를 톡 기댔다.

하인은 당황한 표정으로 황규온이 왜 아픈지 아무도 병명조차 몰라 기도만 할 따름이니 양해해 달라는 말을 읊조렸다.

련은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개의치 않으니 걱정 말라는 뜻이었다. 하인이 고개를 꾸벅하곤 황급히 자리를 떴다.

* * *

“그 애가 사당 위치도 알려 줬으니 거기 구경이나 가죠.”

— 야옹!

하인과 황규온이 사라지고 련이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화륜이 불쑥 말했다.

황규온이 련의 귀에 속삭인 말은 사당까지 가는 길이었다.

북동쪽으로 쉰아홉 걸음, 거기서 나뭇가지를 하나 지나 한 보 옆으로 다시 일흔 걸음, 거기서 서쪽으로 꺾인 담벼락을 따라 서른 걸음.

그러면 등불을 켜 놓은 낡은 사당이 보일 거라는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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