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55화
“알고…… 계시는군요.”
“그림자 속에 있다 한들 빛을 보지 못하겠나.”
그 말에 황추혼이 무겁게 침을 삼켰다.
“그렇습니다. 제 의제 소강이 어르신께서 어린 아기씨들을 대동하고 북해로 간다 알려 주었습니다. ……굳이 이 산길로, 이 산채로 저와 함께 올라오신 것도 그 때문입니까?”
단목천기가 무겁게 말을 이었다.
“악의 창궐은 피할 수 없는 미래라. 모른 척한들 오지 않으랴, 믿고 싶지 않다 한들 우리를 비껴가랴…….”
“…….”
“황 채주께서도 경항운련에 대해 알고 있겠지.”
“들은 바 있습니다.”
“이번 남궁세가에 모인 모든 세가와 무가들은 잠정적으로 인정했네. 그들은 다시 돌아와, 어둠 속에서 우리 목줄기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
“하면 우리 역시 대비해야 하네.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으니. ……자네는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었지. 자네 역시 알고서 나를 마중 나온 것 아니었나.”
황추혼은 잠깐 침묵하다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무림맹이라는 이름 아래 흑천련과 마천교, 백도맹이 한데 묶인 지도 삼십 년쯤 되었지요.”
“그리되었지.”
“혈라곡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강호가 세 갈래로 나뉜 역사는 길고 깊었다.
처음엔 깊은 산 속에서 도를 닦기 위해 무공을 연마한 자들이 있었다. 또한 일신의 안녕과 가문의 영달을 위해 무공을 익힌 이들이 세력을 형성했다.
그와 동시에 드높은 이상이나 고귀한 혈통을 가지지 못한 자들도 나섰다. 주인에게 얻어맞던 객잔의 점소이들, 깊은 산속으로 도망치거나 버려진 자들, 쉼 없이 강물을 거슬러 노를 젓는 뱃사공들은 적을 부수고 스스로를 지킬 힘을 원했다.
그리고 어느샌가 이 강호의 서쪽 끝, 이 드넓은 중원에서도 발붙일 곳 찾지 못한 자들과 험한 산세에도 지지 않은 자들이 자리 잡았다.
그러나 힘은 사람을 취하게 하는 법.
도를 깨치겠다 하였던 자들마저 강맹한 무공을 손에 넣으면 힘을 휘두르려 했으니 사적인 영달과 세상에 대한 적의로 무공을 익힌 자들은 오죽했겠는가.
정수불범하수(井水不犯河水)라 하여 우물물은 강물을 침범하지 않는다, 즉 ‘관무불가침(官武不可侵)’이 암묵적으로 자리 잡기까지도 긴 세월과 피바다가 소모되었다.
드넓은 중원 대륙 구석구석까지 손을 뻗을 수 없었던 관부와 각자의 구역에서 힘을 가진 무림 세력의 이 기묘한 줄타기가 완전히 합의점에 다다른 건 무공을 익히지 않은 백성들을 사이에 두고서였다.
무림인들끼리 치고 박되 무고한 양민들은 건드리지 말 것, 그러는 자들이 있다면 무림인 스스로 징치(懲治)할 것.
그리하여 무림은 관부와 황실의 일에 손 뻗지 않고, 관은 무림의 일에 관여하지 않을 것인즉!
하여 무림 안에서 누가 누굴 벌하고 다스릴지를 결정하며 그들은 자연히 패를 이루었다.
역사와 전통을 가진 자들이 모여 제자를 키우고 스승을 받들며 무림세가와 문파를 이루고 백도맹을 결성했다.
가진 바 없이 세상에서 내쳐졌던 자들은 제자가 아니라 같은 뜻을 가진 자들을 모아 의기투합하며 흑천련을 결성했다.
그리고 스승과 제자, 의형과 의제가 아니라 교주와 소교주의 절대적인 힘과 천상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따르는 자들이 중원대륙의 서쪽 끝에 마천교로 자리 잡았으니!
그렇게 오랜 시간, 서로가 물과 기름처럼 달라 결코 인정하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던 이들이 오로지 거악(巨惡)을 상대하기 위하여 족쇄를 차고 손을 맞잡았다.
“그 혈라곡이…… 강산이 두 번은 변할 시간 동안 나타나지 않았으니, 이제 슬슬 이런 허울과 족쇄를 벗어던지려는 목소리 또한 커지고 있지요.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이 말입니다.”
단목천기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시간이 흘렀고 거악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져, 함께 손잡을 이유 또한 흐릿해진 셈이다.
흑천련에서 강호의 어둠을 제멋대로 헤집어 빛을 집어삼키려 하듯, 백도맹에서는 강호의 빛을 발아래에 두고 싶어 했다. 어둠까지 가루로 마모시킬 빛을. 그리고 마천교는 그 빛과 어둠 모두 곧 제 것이 될 것이라는 듯이 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혈라곡은 다시 고개를 들었고 어쩌면 몇십 년 전의 재앙이 재현될지도 모른다.
백도맹만의 힘으로는, 흑천련만의 힘으로는, 마천교만의 힘으로는 완전히 상대할 수 없었기에 세 힘을 한데 모으고자 하지 않았던가.
그러고도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믿지 못하고 손잡지 못한 채 혈라곡과 싸웠다. 혈라곡의 씨앗이 남은 것은 어쩌면 그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자네가 나와 주었나.”
적어도 흑천련과 백도맹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손을 잡고 있음을 보이기 위해서.
“자네의 이런 행보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자들도 많을 터인데. 자네의 산채 안에서도.”
빙설언이 이 산채를 구해 주고도 이십여 년이 지났다. 그 일을 전혀 겪지 않은 산채 식구들도 있을 터였다.
그 말에 황추혼이 껄껄 웃었다.
“어르신, 녹림채는 말로 하지 않기에 흑천련 소속인 것입니다. 말랑말랑한 백도맹과는 다르지요.”
말로 하지 않으니 주먹으로 하는 것이다. 은근슬쩍 백도맹을 놀리는 황추혼의 말에 단목천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호랑이도 이리 떼에 쫓겨 쓰러지는 법.”
“그러나 이리가 떼로 모인들 이리를 보고 산중의 왕이라 하지는 않습니다.”
“하하, 자네 말도 옳다.”
단목천기가 낮게 웃었다. 그가 술잔을 기울일 때, 황추혼이 물었다.
“또다시…… 나서려 하십니까?”
맑은 술이 단목천기의 목을 축였다. 단목천기는 평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게 힘이 있고 저편에 악이 있는 한.”
“억울하진 않으십니까? 아무도 원망치 않으십니까?”
한때 무림을 구원한 영웅에게 하기에는 너무나 옹졸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단목천기는 황추혼을 탓하지 않고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는 자네는…… ‘차라리 죽게 내버려 두지’라는 생각을 한 적 없던가?”
순간 황추혼의 표정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단목천기가 조용히, 재차 물었다.
“설언을…… 그녀를 원망하는 마음이 아주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는, 저희는…….”
황추혼이 차마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저는…….”
황추혼의 고개가 천천히 땅으로 떨어졌다.
자신과 산채의 사람들을 구한 대가로 설언이 그녀의 첫째아들이자 전 무림이 떠받들던 천고의 기재를 구할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차라리 자신을 죽게 두고 가지 그랬냐는 생각을 어찌하지 않을 수 있었겠나.
무지렁이 백을 살릴 것이 아니라 용(龍) 하나를 살려야 하지 않았나, 그 생각을 어찌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설령 자신이 그 무지렁이 백 중에 하나라고 해도.
“저는…… 철담빙혼 어르신께서 계산을 잘못하시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빙설언이 무슨 선택을 한 것인지 알았을 때, 황추혼은 자신들이 그 용과 같은 저울에 올랐다는 사실에 도리어 수치심을 느꼈다.
자신은, 자신들은 결코 그의 몫만큼 할 수 없을 터인데.
그녀가 자랑스러워하는 아들이 될 수도 없고 세상이 추종하는 기재가 될 수도 없는데 어쩌자고, 어떡하려고…….
단목천기가 그런 황추혼을 보며 말했다.
“그녀에게는 그런 ‘사람 저울’이 없네.”
“아…….”
빙설언에게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값지고 그렇지 않고를 정하는 저울이 있었다면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 자네를 비난하던가? 단목현성 대신에 살아난 놈이 그보다 부족하다고.”
“그런 사람은 없었습니다. 누가 그러겠습니까, 제 면전에서? 그 일이 어찌 된 것인지는 알지도 못하는 자들이 태반인데…….”
빙설언은 자신이 산채 하나를 혈라곡 손에서 구하느라 아들에게 제때 닿지 못했다는 얘기를 그 어디에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틀림없이 흑천련을, 이 산채를 비방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와 그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는 것은 단목천기와 빙설언, 그리고 이 산채 사람들뿐이었다.
“아무도 자네에게 그러지 않았는데 왜 혼자 그리 마음을 쓰는가.”
“아무도 입 밖으로 내진 않아도, 다들 마음속으로는…….”
“남의 마음은 남의 것이네. 거기다 자네 산채의 식구들도 자네를 미워하는 마음이 이 할은 있을 것인데, 어찌 생판 남의 있지도 않은 마음까지 좌지우지하려 하는가.”
“……크흠, 그게 있어도 이 할이나 있겠습니까?”
“내 딸과 아들도 남몰래 나를 미워하는 마음이 이 할은 있을 것인즉.”
“…….”
“왜 허상의 고통을 만들어 실존하는 자네 자신을 괴롭히나.”
황추혼이 울컥하여 단목천기를 쳐다보았다.
“어르신께선 제가…… 밉지 않으십니까?”
단목천기가 설핏 웃었다.
“하하……. 자네가 우리 아들을 해치려고 그 길목에서 혈라곡의 혈귀들에게 얻어맞고 있었나?”
“…….”
“내 아들을 해친 건 자네가 아니라 혈라곡일세.”
“……하면 세상이 원망스럽진 않으십니까?”
황추혼이 그에게 다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