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56)화 (156/204)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56화

단목천기는 빗방울이 떨어지는 밤공기 저 너머, 어두운 숲을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내 희생에 대한 보답이 이것인가?

첫째를 잃었고 둘째는 떠났으며 셋째는 심마의 어두운 악몽 속을 헤매는 이것이 보답인가.

장손은 이지를 잃고 자신은 힘을 잃어 가는 이것이, 세가의 힘이 손아귀 속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것이 이 희생에 대한 보답이었나.

세상을 구한 대가가 몰락이라는 것을 누가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오래도록 그 생각에 매몰되어 있었다. 이제는 하지 않는다.

그를 깨어나게 해 준 이가 있었으므로.

“다들 내게 한 번씩 그런 질문을 하는 것 같군. 흑천련에서도 내가 무림에서 가장 억울하고 원통하리라 생각하는가?”

“……어르신 같은 이가 세상천지에 또 있겠나이까.”

황추혼이 다소 울컥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하제일인이라는 영광을 손에 쥐고 있었던 그가, 무림을 구하기 위해 앞장섰다가 그 모든 걸 잃었다.

눈부시게 빛나던 세가도, 아내와 아들도, 심지어 장손마저 병들어 앓던 것이 얼마 전 아닌가.

그저 남들을 돕고 지키고자 했기에, 무림인으로서 의와 협을 행하고자 했기에, 남들보다 한 보 앞장섰기에.

그렇게 모든 걸 다 잃은 그를 누가 돌아보았나?

하물며 자신마저도 이 무령산을 떠나 항주로 향하지 않았다. 그저 여기서 기다렸을 뿐.

단목천기는 그것을 가만히 보더니 흉과 주름으로 얼룩진 얼굴을 한껏 끌어올려 웃었다.

“세상에 나보다 억울한 사람이 어찌 없겠나. 자네도 식구를 몇이나 잃었겠지. 자네나 나는 그나마 살아남아 그 억울함이나마 누리는 것 아니겠나.”

그러나 황추혼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단목천기가 다시 끌끌 웃었다.

“그런가. 그러면, 그런 내가 나서서 더는 우리끼리 다툼 말고 혈귀들과 싸우라 하면…… 사람들이 따르겠는가?”

세상에서 가장 많은 것을 희생한 사람이 다시 일어서서 또, 한 번 더, 다시, 다시 얘기한다면.

염치가 있는 인간이라면 그의 말에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따르지 않는다면 무림맹의 맹도라 할 수 없고, 맹도가 아니면 창궐한 혈라곡의 혈귀인 셈 아닌가.

“……!”

“자네도 아마 잘 알겠지만 세상사에는 돌이킬 수 없는 일들도 있는 듯하네. 그러나 그 일들에도 다…… 모두, 어디선가 의미가 있지 아니한가 싶네.”

펼쳐진 화선지에 뿌려진 먹물은 돌이킬 수가 없으나 그걸 얼룩으로 둘지 그림의 한 자락으로 바꿀지는 뒤이은 붓질에 달려 있을 터였다.

그 붓을 쥔 자가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가 ‘우리’여야 했네. 하지만 그러지 못했지. 이제는…… 이제야 그럴 수 있으리라 믿네. 오로지 혈라곡을 상대하기 위해서만이라도, 그 이후엔 다시 흩어질지라도.”

* * *

련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사당을 둘러보았다.

‘여기에 오기만 했는데 심안 성취가 올랐어?’

그동안은 자신의 웬만한 능력들이 다 정체기였다.

깨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할아버지나 화륜을 보기만 한 걸로도 성취가 올랐지만.

‘그러고 보니…….’

“왜, 왜 또 그렇게 보는데요?”

“우화륜.”

“저 잘못한 거 없다니까요.”

보기만 해도 심안이 오를 정도의 재능을 가졌다는 걸 상기하면 역시 아깝기는 했다.

‘얘만 있어도 혈라곡에 대해서는 한시름 놓을 것 같은데.’

“알았어요. 잘못했어요.”

“뭘 잘못했는데?”

“누이 키가 좀 작다고 생각한…… 악!”

화륜이 정수리를 감싸 쥐고 련을 흘겨보았다. 련은 엄한 얼굴로 고개를 한번 내젓고는 다시 사당 안쪽으로 눈을 돌렸다.

화륜과 대거리 한번 하고 났더니 그래도 심장의 두근거림이 조금 가라앉은 것도 같았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치고 박고 싸웠겠죠.”

“누가 싸웠을까?”

싸웠다면 왜 싸웠을까?

“마천교에서도 여기까지 왔었을까?”

련의 질문에 화륜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마천교에서 여기까지요……?”

“으응. 너희…… 크흠, 아니 마천교는 구천현녀 모신다며.”

련은 눈짓으로 커다란 구천현녀의 조각상을 가리켰다.

련은 마천교(摩天敎)가 백도맹이나 흑천련과 마찰이 없지 않았다 해도 사악한 마교(麻敎) 취급 받지 않고 무림맹으로 함께할 수 있었던 건, 첫 번째로 진짜 제정신이 아닌 혈라곡의 존재가 비교군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가 저 구천현녀를 모신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보통 사이비(似而非) 종교들이 교주를 신으로 받들어 모신다는 걸 생각해 봤을 때 말이다.

화륜은 팔짱을 낀 채 조금 더 떨떠름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펴보았다.

“우…… 아니, 마천교만 구천현녀 모시는 건 아니죠. 화산파나 무당파나 도교 문파 가면 다들 구천현녀 사당이야 한둘씩 끼고 있을 텐데.”

“……그도 그렇긴 하다.”

“제일 이상한 건 이 사당이 녹림 산채에 있다는 거죠. 천지신명이 아니라 자기네 의형과 채주를 모신다는 놈들이…….”

세상과 하늘에게 버림받아 믿을 건 형님 누님밖에 없다는 놈들이 흑천련인데, 그 산채에 웬 구천현녀의 사당이냐며 화륜이 투덜거렸다.

“그건 아마 여기에서…….”

련은 화륜의 말이 일리 있다고 여기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할머니는 왜 이 산채의 아래쪽 길목에서 사람들을 구해 주게 된 것일까?

당시엔 항주에 있었을 할머니가 여기까지 온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왜 이 산채의 채주는 할머니를 어머니처럼 스승님처럼 모시겠다는 얘길 했을까?

단목천기와 빙설언에게 구명받은 사람들이 모두 다 그들을 부모처럼 스승처럼 모시겠다고 했으면 세상이 단목세가의 아이들로 가득 찼을 게 아닌가.

왜 황 채주만이 그런 얘기를 했을까?

왜 여기가 ‘근원’이라고까지 불렸을까?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중요한 곳이었다면 누군가가 지켰을 것이다. 누군가가…….

아버지가?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이었다.

순간 련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어둠 속에서 흰 빛으로 선경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 심안을 통해 과거의 흔적을 확인하시겠습니까?

선경이 떠오른 건 아마도 자신이 생각을 했기 때문에.

“누이? 괜찮아요?”

“어? 어어…… 괜찮아.”

련은 눈을 꾹 감았다 떴지만 선경은 흐려지지 않았다.

다가온 화륜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련은 그런 화륜의 손을 꼭 붙잡았다. 화륜이 붙잡힌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이 왜 이렇게 차가워요?”

“난…….”

그리고 그 순간 련의 눈앞에 풍경이 펼쳐졌다.

어둡고 비가 오는 낡은 사당에서 환한 빛이 드는 대낮으로.

발치에 쓰러진 사람들, 비명 소리, 칼과 칼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쇳소리, 살기가 범람하는 풍경으로.

그리고 련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움직이는 부친의 모습을 보았다.

“아버…… 아버지!”

사당 앞을 지키고 선 단목현성이었다. 찡그린 눈썹 끝을 타고 핏줄기가 흘러내린다.

련의 목소리는 물속에서 울려 퍼지는 것처럼 뭉개졌고 단목현성 역시 전혀 들리지 않는 듯 전방을 주시하기만 했다.

주위에 버티고 있는 건 이제 더는 없어, 그와 달려드는 혈라곡의 혈귀들뿐.

그러나 그의 상태도 더는 버틸 수 없을 만치 몰려 있었다. 마침내 단목현성은 무언가를 결심한 것 같았다. 그가 달려드는 혈귀를 밀쳐내곤 사당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구천현녀의 조각상은 지금도 오른손엔 아무것도 없었지만, 왼손에는 무엇인가 들려 있었다.

‘태극패?’

그리고 단목현성은 망설임 없이 그 태극패에 칼을 던져 꽂아 넣었다.

— 콰아아앙!

그 순간 태극패가 도저히 작은 목패가 부서지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소리를 내며 산산이 쪼개졌다.

그 파편이 사방으로 쏘아지듯 날아간다. 그중 일부는 단목현성의 몸에, 또 일부가 련의 뺨을 스쳤지만 아무런 영향도 남기지 못하고 뒤쪽 벽에 박혔다.

련은 멍한 얼굴로 그 모든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태극패를 부수었지만 혈라곡의 혈귀들은 멈출 줄을 몰랐다. 오히려 그 전보다 격렬하게 날뛰었다. 단목현성은 씁쓸함 한 줄 없이, 근처의 혈귀가 떨어뜨린 검을 주워 들고 다시 싸웠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을 모두 물리쳤을 때, 남은 것은 오로지 그 하나였다.

단목현성은 칼로 바닥을 짚고 서려 했으나 격렬한 전투로 망가진 칼이 부러지고 말았다. 단목현성이 검병을 내던졌다. 쓰러지듯 그의 무릎이 꺾이고, 곧 그가 바닥에 드러누웠다.

단목현성은 숨을 쉬는 것이 고작인 것 같았다. 그나마도 얕은 호흡이 점점 가늘어진다.

“아, 아버지!”

련은 들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황급히 단목현성에게 다가갔다.

단목현성은 그냥 누워 있기만 했다. 저물어 가는 해를 보면서, 떠오르는 별을 보면서.

련은 안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가진 영기를 불어넣고, 피가 흐르는 그의 폐부를 지혈하려고 하고, 그의 눈을 따갑게 하는 핏줄기를 닦아 내려고 애썼다.

“흐윽, 왜, 왜 안 되는 거야…….”

손은 허무하게 단목현성을 스쳐 지나갔고 련의 눈물조차 바닥에 떨어지지 않았다. 허공에서 스러질 뿐.

“아버지, 아버지. 제발, 아버지…….”

심장이 불쾌하게 쿵쿵 뛰기만 했다. 별과 달마저 저물어 간다. 또다시 아침 해가 떠올랐다. 련은 어떻게든 단목현성을 붙잡아 보려 애썼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