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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58)화 (158/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58화

“아, 미안, 내가 계속…….”

사당에 와서는 줄곧 ‘응? 아니? 괜찮아?’만 반복할 뿐 제대로 된 대화도 하지 못하고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으니 화륜이 화가 날 법도 했다.

그러나 화륜의 표정은 련의 생각과 달랐다.

“또 뭔가 한 거예요?”

“뭐…… 뭔가라니?”

련의 마음이 괜히 철렁했는데, 화륜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이죽거렸다.

“보살 납셨다 진짜. 산적들의 정체모를 사당까지…….”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그래도 이렇게 착한 일 하면 다…… 나한테도 좋게 돌아오니까.”

‘정말이야…….’

당장은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해도 어쨌거나 조언은 들었고, 자신이 정확히 뭘 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이곳을 정화하면서 정화도 1성이 올랐고, 어쨌거나 그 결과 행운 수치도 대폭 상승했으니 밤비 맞으며 나올 만했다.

그때 련이 중얼거리다가 휘청했다.

“누이!”

“어, 어어…….”

련은 화륜의 팔을 붙잡고 섰다. 급히 련의 뺨을 쓸어 보고 안색을 살피던 화륜의 눈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가늘어졌다.

“누이…… 졸아요?”

“어? 이게…… 진짜 엄청 졸리네…….”

갑자기 어마어마하게 졸음이 쏟아지며 눈꺼풀이 무거웠다. 당장 쓰러져서 잠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울다가 웃다가 이젠 졸려 죽겠다고요? 내가 미치지.”

화륜이 기막히다는 듯이 혀를 찼다. 련은 그런 화륜을 흘겨보려고 애썼지만 눈이 가물거리는 게 먼저였다.

“일찍 자야 키가 크니까 일단, 내려, 하암, 내려가자…… 나 좋은 것도 생각났어. 이거 성아한테도 한번 해 줘야 하고…… 온아도…….”

“업어 줄게요.”

“안 돼. 우리 아기 찹쌀떡 납작호떡 된다…….”

“찹쌀경단이거든요.”

“어어, 우리 경단…….”

련은 감기는 눈을 비비며 우산을 펼쳐 들려 애썼지만 손에서 헛돌기만 했다. 화륜이 우산을 홱 낚아챘다.

“안 업힐 거면 우산 저 줘요. 가요.”

“으응…….”

화륜이 련의 손을 쥐고 잡아당겼다. 련은 화륜의 손에 이끌려 가면서 사당을 돌아보았다.

올라올 때까지 느꼈던 섬찟한 느낌은 온데간데없고, 빗속에 피어오른 물안개가 한밤에 덮은 솜이불처럼 포근해 보였다.

* * *

화륜은 거의 기절하듯 잠에 빠진 련을 바라보며 미간에 힘을 주었다. 엎어진 련의 신발을 벗겨 주고 이불도 덮어 주었는데 그동안 련은 뒤척이지도 않았다.

“도대체 커서는 어쩌려고.”

꼼짝도 않고 자는 것이 무섭기까지 해서, 화륜은 한참이나 련의 호흡을 세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련이 단지 깊은 잠에 빠진 것뿐이라는 결론을 내리고서야 인상을 와락 쓰고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다고 잠든 련이 일어날 리도 없다. 련을 쏘아보듯 쳐다보던 화륜은 문득 고개를 들고 창밖을 흘끗 바라보았다가, 우산을 챙겨 들고 침소를 나왔다.

화륜이 처마 밑에 다다라 빗방울이 떨어졌을 때, 그의 위로 길고 풍채 좋은 그림자가 어둑하게 졌다.

“흠, 련아, 성아는 잠들었더냐?”

“……예, 조금 전에요.”

화륜은 조용히 대답했다.

상대는 황추혼과의 술자리를 파하고 돌아온 단목천기였다.

단목천기는 한쪽 어깨만 흠뻑 젖은 화륜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평소엔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련의 하인 소년이었다.

“흠…….”

한 산채의 주인인 황추혼은 물론이고 단목천기 자신도 보통 험악하게 생긴 얼굴이 아닌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련의 하인은 채주의 앞에서나 그의 앞에서나 한 번도 두려워하는 기색을 비친 적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뚜렷하게 보이는 자세, 근골, 그리고 저 눈빛까지. 장손이 애지중지 아끼는 아이라더니 그럴만하다 싶었다.

“련아가 산책이라도 했더냐?”

“예.”

그러곤 더 말이 없었다. 보통 어디까지 갔다 왔다고 고할 법도 했는데.

“어딜 갔다 왔느냐?”

“요 앞에요.”

진짜 ‘요 앞에’ 다녀온 정도가 아니라 행선지를 말하고 싶지 않은 눈치다.

단목천기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앞에 서 있는 아이가 아이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삶이 고달픈 어린아이들은 그 진창 속에 지쳐 일찍 철이 들기 마련이라, 이 아이 역시 그런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묘한 눈이로다.’

진창 속에서 태어났으되 그 진창을 이미 불사른 사람의 눈빛이었다.

어둠도 심려도 두려움도 없는 눈. 아니, 있었을지도 모르는 그것들을 이미 아주 먼 곳에 남겨 둔 사람만의…….

“아버지! 여기 계셨어요? 혹시 얘기 들으셨어요? 성아가 힘들어하는 걸 련아가 어떻게 알았는지 일부러 백약청 하나를 뜯어다 먹였다고……엇, 흐흠.”

품에는 작은 단지 하나를 안고서, 뒤에는 산채 사람들을 줄줄이 달고 나타난 단목현요였다.

단목천기 맞은편에 서 있는 것이 산채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 편하게 말을 잇던 단목현요는 우산을 접다가 화륜의 얼굴을 알아보곤 조금 멈칫하며 눈을 돌렸다.

“련아가 그랬다더냐?”

“아이들끼리 놀고 싶어서 나간 줄 알았더니…… 아니었더라고요.”

“생각이 깊은 아이니라.”

“저도 잘 안다고요. 새언니 딸인데 어련하겠어요? 그도 그런데 이 댁 딸아이도 몸이 별로 좋지 않다는 얘기 들으셨어요?”

“들었다.”

“성아 먹이려고 뜯은 백약청이 있으니 그걸 이 댁 아이도 좀 먹이면 어떨까 해서요.”

“병마다 쓸 수 있는 약이 다 다른 법이거늘…… 약을 써도 된다 하더냐?”

단목현요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 부채주가 백약청을 보고 어떻게 한 술이라도 구해 보고픈 눈치였노라 말했다.

“집안에 아픈 애가 있으면 사람이 잠도 안 오는 법인데…… 오죽하겠, 아니, 흠흠.”

화륜을 흘낏거린 단목현요가 얼른 단목천기에게 인사를 올리고는 바삐 걸음을 옮겼다.

산채 사람들도 그런 단목현요 뒤를 졸졸 따라가는 틈을 타, 화륜 역시 빠르게 고개를 꾸벅하고는 시간이 늦었다며 도망치듯 등을 돌려 숙소 건물로 쏙 들어갔다.

단목천기가 그 족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비에 흠뻑 젖은 흙길에 일부러 남긴 듯이 뚜렷하고 선명한 발자국, 그 주위로 튀긴 흙탕물은 완전히 균일한 형태였다가 빗물에 스르르 쓸려 사라졌다.

* * *

“그래서가 새로운 채소 국수라고?”

련은 놀라서 단목성을 돌아보았다.

‘륜아랑 똑같은 얘길 하네.’

“아니…… 그게 말이야.”

련이 눈을 뜬 건 해가 뜨기 전의 새벽이었다. 자신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 단목성과 눈을 마주치곤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가 둘이 나란히 이마를 박았다.

그러곤 이마를 문지르며 함께 황규온을 보러 온 차였다. 정확히는 황규온의 상태를 보고 싶어 한 련을 단목성이 따라왔다.

“얘도 좀 아프다고 하더라고. 어제 만났을 때도…….”

“그래서 네가 고쳐 줬어?”

“어?”

련은 흠칫 놀라서 단목성을 돌아보았는데, 단목성은 황규온의 잠든 얼굴만 내려다볼 따름이었다.

“아, 아니…… 내가 뭔가 하진 않았는데…….”

“그랬어?”

그렇게 대꾸하는 단목성의 목소리는 련의 그 말을 그다지 믿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련은 뺨을 긁적였다.

“그래도 이 채소 국수 엄청 아픈 것 같지는 않은데.”

단목성은 그렇게 말하며 련을 흘끗 쳐다보았다. 마치 련의 상태와 비교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너는 이것보다 훨씬 더…… 아냐, 아무것도.”

단목성은 말끝을 흐렸다. 괜히 어린애가 엄살 부린다고 비난하는 어조가 될까 걱정한 탓이었다.

련은 자신의 뺨을 매만졌다.

어젠 좀 기절할 것처럼 잠들긴 했지만 그건 밤 산책에 피로했기 때문이고, 가끔 영기가 급하게 차오르면 위태로울 때가 있긴 하지만 그것도 어찌저찌 쓰면 되고, 그 외에는 완전히 건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가족들 눈엔 아직 아닌 모양이었다.

그때 황규온이 눈을 떴다.

“……어……?”

“앗! 온아 일어났네. 몸이 좋아졌는지 보러 왔어.”

“왔…… 오셨사옵니까? 어, 그런데 이분은…….”

황규온이 단목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단목성의 눈썹이 단숨에 하늘 끝까지 올라갔다.

“난 련아 사촌, 단목성.”

황규온은 약간 당황하고, 조금 억울한 눈빛으로 련을 쳐다보았다.

당장 경어를 써야 할 사람이 하나 더 늘 줄이야!

“안녕하시옵니까…….”

“응, 그래그래. 성아야, 이 앤 규온. 황규온.”

“들었어.”

“어, 그래…… 그래서, 음. 온아야, 우리가 오늘 가야 해서 가기 전에 인사하려고.”

“네?”

이불 속에서 미적거리고 있던 황규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믿기 싫다는 표정이었다.

“왜요? 왜 가요? 어디 가시옵니까? 여기 있으면 안 돼요? 언니, 여기서 살면 안 아니 되어요?”

그 열렬한 반응에는 단목성도 련도 나란히 놀라서 눈만 휘둥그레 떴으나 황규온은 숫제 울음을 터뜨릴 지경이었다.

“저 안 아프고 푹 잔 거 처음이옵니다. 그런데 언니 가면 또 아플 텐데, 아프면…… 내가 아프면.”

거기서 황규온은 목에 가시라도 걸린 것처럼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련은 규온이 할 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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