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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60)화 (160/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60화

“아니, 아니, 아니! 온아야! 잠시!”

련은 다급하게 황규온의 말을 막았다.

“이 산채가 엄청나게 근사하긴 하지만 나는 괜찮아. 나도 장원이 있거든, 항주에! 그러니까 진짜 괜찮아. 보은은…… 온아가 건강해져서, 무공도 익히고 쑥쑥 자라 이 산채의 채주가 되면 그게 보은이야!”

“…….”

황규온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어린애를 어르고 달래는 입에 발린 말을 황규온만큼 많이 들어 본 사람도 없을 것이었다.

옆에서 잠자코 있던 단목성이 불쑥 말했다.

“련아와 우리는 할 일이 많으니까 네가 채주가 되어서 힘을 보태 주면 되겠네.”

“할 일?”

우리가 그런 게 있었어? 련도 놀라서 단목성을 돌아보았다. 단목성이 턱을 세우고 말했다.

“그래, 무림맹을 완전히 규합해서 혈라곡을 멸절시키는 게 우리 목표잖아.”

련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게 자신의 목표이기는 했다. 단목성이 그걸 알 줄도, ‘우리의 목표’라고 얘기할 줄도 몰랐지만.

황규온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거의 황홀해하는 표정으로 단목련과 단목성을 바라보다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인지 알았사옵니다.”

“아, 알았어?”

“네. ■■하고 ■■한 ■■들 다 조져 버리게 준비하자는 거죠?”

“어?”

련이 눈을 크게 떴다.

중간쯤부터 단목성이 황급히 련의 귀를 막아 주려고 했지만 그런다고 들리지 않을 턱이 없었다.

“어? 아니옵니까?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그렇게 말하는 걸 들었는데…….”

“아니, 맞아, 맞는데…… 맞지. 어, 그거야. 그래서 네가 건강해져서 무공도 배우고 채주가 되면…… 좋지. 정말 좋겠네.”

단목성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대업을 이루는 거야.”

련이 빛보다 빠르게 고개를 홱 돌려 단목성을 쳐다보았다. 단목성이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표정이었다.

“대업 얘기는 누구한테 들었어?”

“비아가 그랬잖아.”

“아니…… 아…….”

련은 창피해하는 것이었는데 황규온은 그걸 그들만의 비밀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눈에서 광채가 쏟아졌다.

련은 이제 그냥 더는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 * *

비가 그치고 짐 챙기는 걸 마무리 짓는 사이, 련은 그 ‘귀신 사당’ 앞에 서 있었다.

평소에는 한낮에도 으슥하여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던 곳인데 지금은 초여름 비를 맞고 반짝반짝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가능하다면 사당을 잘 관리해 달라고 규온에게 부탁해 두었다.

아버지와 애틋한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곳이 아버지가 죽은 자리도 아닌데,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일을 곱씹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일렁거렸다.

그래야만 했었느냐고 묻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혼자서 모든 걸 다 태워서 뭐가 남았냐고. 그의 부상에 가슴아파하는 가족, 결국 지키지 못한 보물, 그 이후로도 그를 괴롭혔을 상처까지.

백도맹 소속이라곤 해도 도를 추구하고 중생을 구제할 문파인 것도 아니요 개인과 세가의 영달을 추구해야 할 사람이, 항주 사람들만 지키고 선 것도 아니고 이 먼 북쪽 무령산까지 와서…….

“……아버진 문파 같은 곳에 들어갈 수 있었다면 차라리 더 행복했을까요?”

이름 높은 세가의 직계 장남이 타 문파에 들어간다니, 농담으로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단목현성도 그런 건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련의 중얼거림을, 어느샌가 련의 곁으로 다가온 묵직한 목소리가 받았다. 세가 장손으로서 할 만한 얘기가 아닌 것을 질책하는 말은 아니었다.

“네 아비는 욕심이 많은 놈이었느니라. 문파에 들어간들 무슨 수로 속세의 욕심을 저버리고 득도하겠느냐?”

“그랬어요?”

“그래. 세가도 제 것, 미래의 천하제일인도 제 것, 부귀영화는 당연한 것…… 그리 여기는 녀석이었느니라.”

“그런데 왜.”

련이 약간의 억울함을 담아 옆을 돌아보았다. 홀로 선 단목천기가 눈을 내리감으며 말했다.

“자긴 세상천지에 널려 있는 세가의 가주가 아니라 이 무림의 천하제일인이 될 테고 천하제일인이라면 응당…….”

“응당?”

“약자를 지키고, 악을 멸하고, 정의와 협을 추종해야 한다고.”

그렇게, 단목천기가 가르쳤었다.

단목천기는 잠시간 회한에 휩싸여, 오랫동안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던 첫째 아들의 자신만만하던 표정을 되새겼다.

─ 아버지가 말씀하셨잖습니까! 설마 지금 천하제일인께서 했던 말을 번복하시는 건 아니죠?

“평생을 제멋대로 굴었으면서 그 말만은 어찌나 잘 들었는지.”

단목천기는 옆에 선 작은 손녀를 내려다보았다.

“여기서 네 아비가 싸웠음을 알았더냐?”

“……네.”

“어찌 알았느냐?”

련은 자신의 추론을 들려주었다. 단목천기는 처음엔 놀란 듯했다가 이윽고 조용히 수긍했다.

“어젯밤에 예까지 와 보니 어떻더냐?”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모르는 게 있겠느냐?”

단목천기는 그렇게 말하곤 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련은 낡은 사당을 가만히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의 모습을 본 것 같아요.”

사실은 정말 봤지만 그렇게 얘기하지는 않으면서. 어머니나 할아버지가 보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얘기도 하지 않고서.

“아버지가 지켰던 자리라고 생각하니까 무섭지 않았어요. 처음엔 무서웠거든요.”

련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가슴팍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태극패의 조각을 되찾은 덕분인지 규온까지 치유할 수 있었다.

그 태극패는 그때 부친에게로 들어가서 자신에게까지 온 것일까? 련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대답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문득 자신을 돌아보던 환영 속 단목현성의 눈빛이 떠올랐다.

단목현성은 련의 생전에 제대로 마주한 적이 없었다. 그때는 단목현성의 몸 상태도 성치 않아 괜히 아이에게 더 악영향만 끼칠까 두려워했다고 했다.

그 환영은 자신이 보고 싶은 걸 보여 주었던 것일까? 그게 아니면…….

“만약 아버지가…… 저를 봤다면, 절 알아보셨을까요?”

제가 아버지의 딸인 줄 알았을까요?

“어찌 모르랴?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너를 업고 여기에서 항주까지 한달음에 달려가 서호를 둘러싼 전각 꼭대기까지 올라가서는 그 항주가 다 네 것이라고 외치고 다닐 텐데.”

자신의 아이라 해도 자란 모습을 처음 보고서 바로 알아볼 수 있을 턱이 없겠지만, 련은 단목천기의 말을 믿기로 했다.

그 짧은 순간이나마 단목현성이 자신을 보았다고, 알아보았다고.

단목천기가 손녀딸의 어깨를 가만히 내려다보곤 고개를 돌려 사당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비가 올 적에는 여기가 그리도 어두워 보이기만 하더니, 날이 밝으니 그도 그렇지가 않구나.”

단목천기의 눈이 깊어졌다.

오지 않으려고 했던 곳이었다. 와서 뭘 한단 말인가, 아들이 쓰러진 흔적을 훑어보기라도 하려고?

그러나 아들이 지키려고 했던 것을,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을 이렇게 눈으로 보게 되자 어딘가 마음이 후련해지는 것만 같았다.

막연히 모르는 척하고 덮어 놓으려 했던 것, 오래되어 무엇이 든 것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두려워하던 함을 열어 본 것처럼.

그 안에 든 건 낡고 바스러져 남들이 보기엔 보잘것없다 하겠으나 그에게는 소중한 것이다.

열지 않았으면 몰랐으리라.

여기까지 오지 않았다면 열 수 없었으리라.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단목천기는 손녀딸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손에 쥐어 보지도 못한 채 잃은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손녀의 눈빛에서 끝을 알 수 없는 깊이가 느껴졌다.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이만 내려가자꾸나. 갈 길이 머니.”

“네, 할아버지.”

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단목세가 사람들이 떠나는 날, 황추혼은 산 아래 길까지 동행해 그들을 배웅하고 왔다.

황규온이 함께 오겠다고 난리법석을 폈으나 련이 말린 덕분에 겨우 산채에 남겨 놓고 다녀올 수 있었다.

“딸애가 저렇게…… 누굴 따르는 건 또 처음 보는군.”

황추혼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부채주 마화창은 그런 황추혼의 놀람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단목세가에서 선물로 남기고 간 백약청 단지만 세고 있었다.

“채주께서 그 아가씨 얘기를 마르고 닳도록 하셨으니 아무래도 친근하게 느꼈던 거겠죠.”

“그런가…….”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렇게 규온이 녀석 상태가 괜찮은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마화창의 열띤 목소리에 비해 황추혼의 목소리는 꽉 억누른 것처럼 침착했다.

아이의 상태에 일희일비한 지도 몇 년이나 되었다. 큰 기대와 기쁨이 더 큰 좌절과 절망으로 돌아오는 경험은 이미 충분했다.

“……그 약이 그리 효험이 좋은가?”

“솔직히 작은 영단을 갈아 만든 약 같습니다. 이게 그냥 도라지청이라니 믿기 어려울 정도로요. 도라지가 아니라 천년삼 같은 느낌인데…….”

마화창이 약단지에서 도라지청을 한 숟갈 떠올려 뜨거운 물에 타며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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