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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62)화 (162/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62화

‘정말 신기하네…….’

련은 수정으로 만들어 창을 장식한 발을 손끝으로 건드리며 생각했다.

무령산에서 부친의 환상을 본 이후로는 불안한 두근거림이 확 잦아들면서 영기의 흐름이 부드러워졌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 이상의 효용은 잘 느끼지 못했는데, 오히려 북해에 들어서 놀랄 만큼 안정되었다.

그전에는 이렇게 온 사방이 자연경관으로 가득한 곳에 들어서면, 물에 빠졌을 때 천지의 모든 곳에서 자신에게로 물이 몰려드는 것처럼 영기가 밀려들곤 했었다. 무령산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북해에서는 자신의 영기도 평온한 수준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딱 60. 많지도 적지도 않다. 다른 장신구에 밀어 넣으면 밀어 넣는 만큼 더 찼지만, 넣지 않으면 넘치지도 않았다.

련은 자신의 조모 빙설언이 북해빙궁 출신인 것에 의미가 있지 않을까 추측했다.

할머니, 련이 나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어떻게든 영단을 보내오신 분.

아버지를 구하러 가는 길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먼저 구하길 주저하지 않으신 분…….

“할머니를 빨리 뵈었으면 좋겠는데.”

먼 타지에서 여기까지 무슨 병을 달고 왔을지 모르니 잠시간 격리해 살피는 것이 당연한 절차겠으나 마음이 초조한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아마 할아버진 더하시겠지.’

그 초조한 마음 이를 데가 있을까.

“누이는…… 북해 공기가 잘 맞나 봐요.”

그때 화륜이 뜬금없이 말했다. 방에 장식된 구슬들을 매만지다가, 격리된 요 며칠 새 단목성에게 배우던 북해의 언어를 복습하려고 책을 펼치던 련이 고개를 들었다.

바로 옆에 앉은 화륜이 턱을 괴고서 련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그래 보여?”

“네, 북해까지 와서는 엄청 추워서 고생하겠네 싶었는데 오히려 혈색도 더 좋아진 것 같고.”

련은 자신의 뺨을 매만져 보았다. 영기가 안정된 것이 안색으로 나타나나 싶었다.

“할머니가 빙궁 사람이니까 나도 빙궁 피가…… 약간은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 빙궁은 공기도 좋고.”

“빙궁 공기가 좋으면 여기서 계속 살 거예요?”

화륜의 질문에 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윽고 웃었다.

“우리 륜아는 빙궁이 별로 안 좋아? 너무 춥나?”

련은 그렇게 말하곤 서랍장에서 말기름으로 만든 보습제를 꺼내다 륜의 얼굴에 문질러 주었다.

륜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지만, 결국 턱이 잡혀서 얌전히 얼굴을 내주었다.

“공기가 아무리 좋아도 나는 항주로 돌아가야지.”

련이 화륜의 뺨에 치덕치덕 보습제를 발라 주며 대답했다. 화륜이 샐쭉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왜요?”

“왜? 여기서 살까?”

련이 그렇게 말하며 짓궂게 웃었다.

화륜이 다시 질색하면 웃어 줄 준비까지 마친 차였다. 그런데 화륜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 아닌가.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어어? 진짜? 왜? 넌 춥다며.”

“누이는 여기가 별로 안 춥다면서요. 공기도 좋고, 누이 얼굴도 좋고, 멀기도 하고.”

“멀어? 뭐가 멀어?”

“중원에서 북해가 멀리 떨어져 있잖아요. 누이도 그냥 여기 있으면…….”

화륜은 말을 잇다가 멈추었다.

련이 그다음 말을 재촉하기도 전에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흠흠.’ 하는 소리였다.

곧 문이 열리더니 열서너 살로 보이는 시동이 세숫대야를 들고 들어와서 내려놓았다.

“더 필요하신 것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낯선 억양이었으나 뚜렷한 이쪽 언어에 또랑또랑한 목소리였다.

련은 물까지 꽁꽁 얼어붙어 하얗게 성에가 낀 세숫대야와 너무 찬 걸 쥐고 있어서 손이 빨개진 시동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화륜을 붙잡아 말리곤 시동을 내보냈다. 시동이 애써 괜찮은 척하며 후다닥 방을 빠져나갔다.

“음. 엄청나게 미움받는 것 같은데.”

그들은 당장 조모 빙설언과 만나고 싶다고 했지만, 먼저 숙소부터 주어졌다. 투명한 수정으로 한껏 꾸며 놓은 화려한 방이긴 했지만 그렇게 격리된 것도 며칠이나 지났다.

말만 격리였지 그들에게 배정된 곳이 워낙 큰 궁이었던지라 여기저기 돌아다닐 곳은 충분했는데, 어딜 가도 반쯤 적의 어린 시선을 받곤 했다.

련이나 단목성이 잘 눈에 띄지 않는 장애물에 걸려 넘어질 뻔했던 것만 해도 몇 번이나 됐다. 빙궁의 어린 하인들 짓이었다. 화륜이 아니었다면 련도 한 번은 넘어졌을지도 몰랐다.

련이 얼어붙은 세숫대야를 난로 위에 올리는 걸 도와주면서 화륜이 말했다.

“사정 들어 보니까 그럴 만도 한데요?”

“넌 내 편이야, 빙궁 편이야?”

“당연히 누이 편이죠. 그런데 누이가 말렸잖아요. 방금 그놈 다시 잡아 올까요?”

련은 괜히 화륜을 한번 흘겨보았다.

빙궁의 일꾼들이 단목세가 사람들을 푸대접하려고 용을 쓰는 건 단목세가 사람들이 그들의 철담빙혼 빙설언을 데려갔다가, 상처만 준 채 돌려보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화륜의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들의 생각도 아주 틀린 건 아닌 것처럼.

결국 빙궁 사람들이 빙설언을 아끼고 사랑하기에 그들을 미워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런 사소한 괴롭힘이 그렇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때 다시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단목현요와 단목현우가 들이닥쳤다.

“어휴, 련아야! 이놈들, 애들한테까지 이럴 줄이야! 혹시나 했는데.”

단목현요는 꽝꽝 얼어붙은 세숫대야를 보며 한참 화를 냈다.

련은 놀라서 눈만 깜빡거리다가 방긋 웃었다.

‘그래도 애는 애가 괴롭히나 봐.’

그사이에 단목현우가 난로에 가져온 숯을 집어넣어 화력을 키우며 투덜거렸다.

“내 방에는 젖은 숯을 가져다줬어요.”

“내가 처음 왔을 땐 더했다. 빙궁 사람이라면 이 정도 날씨는 덥다고 한다면서 난로도 안 주는 거 아니겠니.”

“어떻게 하셨어요?”

“너희도 난로 안 쓰는지 보자고 했지.”

“그러니까 뭐래요?”

“거기서 ‘사실 저희가 난로를 씁니다.’ 이러겠니? 다 같이 덜덜 떨었지. 호호호!”

단목현우가 다소 기죽은 표정으로 누이를 쳐다보았다.

“그 ‘다 같이’에는 누구누구가 들어가는데요?”

“여기 경비대, 궁주 친인척들, 하인들 전부. 매일 찾아가서 인사드렸거든.”

단목현요가 인사드리겠다고 찾아와서 ‘이 정도 날씨엔 덥다고 다들 난로도 안 쓴다지 않으셨나요? 어휴, 더워라.’라면서 새파란 입술을 연지로 감추고 부채질하면서 하는 말에 다들 입술을 꽉 깨물고 난로를 빼야만 했다.

누가 먼저 얼어 죽는지 한 번 두고 보자고 이를 갈았는데, 빙궁주가 직접 나서는 걸로 무마되었다.

단목현요는 처음부터 구석구석 살펴봤던 련의 방을 다시 한번 돌아보곤 창문에 구멍이 뚫린 곳은 없는지, 침구 사이에 따가운 쐐기풀 같은 게 들어가 있지는 않은지, 침상 아래에 얼음이 놓여 있진 않은지를 살펴보고는 허리를 폈다.

북해빙궁의 궁주가 얼굴을 보자는 말을 전하며 아이들이 입을 옷가지를 보내온 것도 바로 그때였다.

단목현요가 그 옷을 펼쳐 보곤 잠깐 말이 없다가, 두 배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녹인 세숫물로 련의 얼굴을 닦아 주고 북해빙궁에서 지어 주었다는 푸른색 옷을 단목성과 함께 나란히 입혔다.

단목현요가 매듭을 여며 주고는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너와 성아가 이렇게 있는 걸 보면 어머니께서 얼마나 좋아하실지…….”

“어머니, 련아 머리도 새로 묶어 주시면 안 돼요?”

“아무렴 해야지, 해야지.”

단목현요는 그렇게 말하고는 련의 머리도 새로이 곱게 양 갈래로 땋아서 말아 주었다.

“련아 너도 돌아가거든 옷가지나 머리를 정리해 줄 하녀를 구해야겠다.”

“네?”

련은 흠칫 화륜 쪽을 흘낏 쳐다보았다. 당연히 아무나 들이지 말라고 눈을 치뜰 것 같았는데 화륜이 슬그머니 련의 눈을 피했다.

‘뭐지?’

“무릇 세가의 자손이라면 의복을 단정케 할 사람이 한둘은 있어야지.”

단목현요는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하나로 높이 올려 묶은 단목성과 한 쌍이 되도록 맞춘 수정 장식을 꽂아 주었다.

단목성과 련, 단목현요가 단장을 마치자 단목현우가 그들을 보곤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조끼만 걸치게요? 춥지 않겠습니까, 누이? 누이도요…… 안 추워요?”

“너는 이 초여름 빙궁이 춥긴 뭐가 춥니? 한겨울도 아닌데.”

단목현우는 변론을 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누이의 한심한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포기했다.

“진짜 안 춥니, 얘들아?”

“네.”

“정말 괜찮아요.”

단목성과 련이 차례로 대답했다. 단목현우는 괜히 자신의 두꺼운 외투만 내려다보고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빙궁의 궁주를 만나기 위해 이동했다.

* * *

북해빙궁의 궁주 빙설한은 여러모로 인상적인 인물이었다. 빙설언의 사촌으로 새하얀 백발을 여러 갈래로 땋아서 정돈한 그는 짙은 쌍꺼풀을 가진 눈으로 환히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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