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63화
“오랜만에 뵙소, 무영검.”
“그간 무탈하시었소.”
단목천기가 조금 잠긴 목소리로 인사했다. 빙설한은 손을 회회 내저었다. 그리고 잠깐 침묵이 흘렀다가, 그들의 표정을 둘러본 빙설한이 어깨에서 힘을 조금 뺐다.
“빨리 설언을 보여 주었으면 하는 걸 아오. 그러기 전에는 어떤 인사도 무용하겠지. 가지요.”
빙설한은 손수 앞장서며 말을 이었다.
“며칠이나 기다리게 한 이유에 대해서도 양해해 주시길 바라오. 근래에 설언이 상태가 좋지 않았다오. 하여 내가 직접 붙어 있어야만 했던지라 맞이하러 갈 수도 없었고 설언을 보여 줄 수도 없었지……. 그래서 도위를 대신 보냈는데 그 아이가 큰 실수는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군.”
빙설언의 상태가 나빴다는 말에 단목천기의 안색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갔다. 단목현요와 단목현우도 딱딱하게 굳었다.
빙설한은 그들을 곁눈질하곤 말을 이었다.
“다행히 설언도 지금은 많이 호전되었소. 무영검께서 오셨다는 얘기는 아직 하지 않았으니 보면 많이 기뻐할 것 같군.”
“그러기를…… 소망하오.”
단목천기가 뇌까리듯 중얼거렸다. 련은 조부의 간절한 목소리가 가슴속에 깊이 박히는 것을 느끼며, 자신을 붙잡아 주는 단목성의 손을 꽉 잡았다.
“사실 다신…… 만나지 못할 줄 알았는데.”
빙설한이 조용히 말했다. 단목천기의 눈빛이 조금 흐려졌다.
“……나 역시 그러리라 생각했소.”
남들을 지키느라 가족을 잃고 평생을 바친 무공이 천천히 무너져 내리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 세가가 허물어져 가는 걸 지켜보기만 하면서 남은 생을 보내리라고 여겼다.
한때 천하제일인이었으나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이제 남은 것은 무엇 하나 손에 쥐지 못한 패배자일 뿐인데.
이런 자신에게 휘말려 가질 수 있었던 것들을 잃고 다시 북해로 돌아가야만 했던 빙설언을 대체 무슨 낯으로 볼 수 있단 말인가.
삶에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기 마련이라지만 자신의 것은 절벽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뛰어내린 절벽. 끝을 모르는 깊이도 자신이 높이 올라간 탓이요, 떨어져 짓이겨진 몸도 자신이 뛰어내린 탓이라 원망할 곳도 자신뿐인.
그러나 한순간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손녀가 깨어나면서부터였다.
문 앞을 지키고 선 사람들이 궁주를 알아보곤 몸을 굽혀 절하곤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그들뿐만 아니라 지키고 선 무사도 둘이 더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겹겹의 투명한 천이 부드럽게 너울졌다. 새하얗고 너른 실내 곳곳에 난로가 보이는데도 안은 밖보다 훨씬 더 싸늘했다. 마치 커다란 얼음으로 둘러싸인 공간인 것처럼.
몇 겹의 천을 지나자 커다란 침상이 눈에 들어왔다. 침대에는 한 노부인이 조용히 누워 있었다.
얼굴의 윤곽이 그대로 보일 정도로 마른 얼굴, 색깔이라고는 없는 입술. 주위의 공기가 그대로 멈춘 것만 같았다. 아무도 소리 내지 않았다.
그때 그 노부인, 빙설언이 입술 끝을 우물거렸다.
“으음…… 뭐 이리 많이들 왔느냐?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라고…….”
빙설언이 잠긴 목소리로 말하다가 천천히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단목현요가 외쳤다.
“어머니, 어머니!”
“……요아? 요아 아니냐?”
와락 안길 것처럼 달려왔던 단목현요였으나 나뭇가지처럼 마른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는 그저 눈물만 펑펑 쏟았다. 그녀의 뺨이 순식간에 젖어 들어갔다.
몸을 일으킨 빙설언은 처음엔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우는 딸의 얼굴을 여기서 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것처럼.
그리고 그런 단목현요 뒤에 망부석처럼 서 있는 이들을 보고서는 눈을 크게 떴다.
“…….”
“…….”
격정적인 침묵이 지나갔다. 그리고 빙설언이 중얼거렸다.
“이게 뭔…….”
“서, 설언! 네가 깨어났다고 해서 네 낭군과 아이들과 손녀! 손녀들까지 왔다.”
“궁주 짓이오?”
“내가 무슨 수로?”
“하면 어찌.”
빙설언이 뭔가 역정이라도 내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가 금방 고개를 돌리고 잔기침했다.
“설언!”
그걸 보고 빙설한과 단목천기가 동시에 달려왔다. 설언이 밭은기침을 하다가 손을 들어 두 사람을 밀어냈다. 둘은 깃털처럼 미는 대로 밀려났다.
그러고는 조금 더 기침을 하다가 고개를 들고 좌중을 훑어보고는 계속 울고 있는 딸을 향해 떨리는 손을 뻗었다.
“……현요, 이리 온.”
갓 눈을 떴을 때는 무심결에 어렸을 때 부르듯 ‘요아야’라고 불렀다지만 이렇게 다 자란 아이를 또 그리 부를 수야 없었다.
“어찌 이리 눈물이 많을까.”
“하지만 어머니가!”
“이렇게 봤으면 뚝 그쳐야지.”
그 말에도 단목현요는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빙설언이 껄껄 웃으며 그런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결혼을 해서 아이까지 있으면서 어찌 이리 눈물이 많은지.”
“어머니 때문이잖아요!”
빙설언이 현요의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고는 또 웃었다.
그러곤 눈이 빨개진 채 어색하게 서 있기만 하는 단목현우를 돌아보았다.
“현우, 이리 오너라.”
“어, 어머니.”
“우리 아들이 다 컸구나…….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는 조그만 아기였는데.”
“어머니, 마지막으로 봤을 때도 현우 녀석은 키가 이미 저만 했어요.”
“누이!”
눈물을 닦아 낸 현요가 톡 쏘듯 하는 말에 빙설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형제자매끼리 싸우지 말라고 그렇게 말을 해도.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여전한 게야!”
“싸우진 않았어요. 현우가 말썽을 피우기만 했죠.”
“또 무슨 말썽을 피웠기에 그래?”
현요는 차마 ‘저 녀석이 보양하겠다고 조카가 아끼던 잉어까지 잡아먹었어요!’라고는 말하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그사이에 빙설언이 팔을 뻗어 단목현우의 뺨을 훑었다. 마지막으로 만졌을 때는 아직 젖살이 남아 있어 무르고 부드럽기만 했는데, 지금은 북해의 찬바람을 맞아 약간 거칠어진 뺨과 단단한 골격이 느껴졌다.
“흐엉, 어머니…….”
그리고 오래지 않아 단목현우 역시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빙설한이 그 모습을 보고 가슴 아픈 듯 마음이 따스해지는 듯 묘한 미소를 지었다.
“훌쩍, 어머니, 성아랑 련아예요. 얘들아, 이리 와서 인사드려야지.”
“할머님을 뵙습니다. 단목성이라고 합니다.”
단목성은 의젓한 자세로 빙설언에게 꾸벅 인사했다. 단목현요가 눈물을 겨우 닦아 내고는 련도 끌고 왔다.
“련아는 오라버니 딸이에요. 오라버니는…….”
거기까지 말하던 단목현요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괜한 말을 꺼냈다는 후회가 역력한 딸의 얼굴을 보며 빙설언이 고개를 저었다.
“그 얘기는 지금 할 필요 없다. ……이리 할미 가까이 와 보거라.”
빙설언의 말에 단목성이 련의 손을 잡아채 꼭 쥐고는 빙설언에게 다가갔다.
빙설언은 먼저 단목성의 머리를 삭삭 쓰다듬었다.
“보통 첫째는 아비를 닮는다던데, 성아도 련아도 제 어머니를 쏙 닮았구나.”
“그래서 싫으세요?”
“성아는 네 얼굴만 닮고 성격은 아비를 닮은 듯해 다행 같기도 하고.”
“어머니!”
“네가 데려온 사람이 참 침착해서 내 마음에도 들었지.”
단목성은 어른들의 대화 속에서 의젓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처음으로 대화를 나누어 본 조모가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 듯해 마음을 놓은 기색이었다.
“련아는…… 오래 아팠으면서 예까지 어찌 왔느냐.”
“……할머니 은혜 덕분에 이제 건강해졌는걸요.”
련이 목멘 소리로 우물거리자 빙설언이 빙긋 웃었다.
“내가 뭘 했다고. 이 먼 곳에서 제대로 지켜보지도 못했는데…….”
그렇게 말한 빙설언은 회한이 엉겨 붙은 눈으로 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다 나은 게야?”
“네! 그래서 무공도 열심히 배우고 있어요. 세가에는 방계 아이들도 다시 들어왔고, 앞으로는…….”
세가의 상황을 알려 주려고 했던 련이었지만 이윽고 입을 다물었다.
빙설한이 곁에 있어서 세가의 상황을 미주알고주알 말해도 되는지 저어된 것이 첫 번째고, 빙설언이 조용히 웃고 있는 표정이 묘한 게 두 번째였다.
“이 할미는 세가의 일이 아니라 네 일이 궁금한 것이다. 너희가 다 건강하면 세가야 어련히 잘될까.”
“아…… 네.”
련은 괜히 말문이 막혀서 말끝만 우물거렸다.
“네가 건강해졌다니 나도 한시름을 놓았다.”
그렇게 말하는 빙설언은 정말 여한이 없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면서 설언은 련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자신의 것과 똑 닮은 그 눈을. 그러곤 쓰게 중얼거렸다.
“얼마나 고생이 많았던 건지…….”
련은 알아차렸다. 아마도 빙설언은 련의 눈동자에 켜켜이 쌓인, 아이답지 않은 빛을 알아본 듯했다.
“아니에요, 할머니. 저 힘든 적도 없었고, 일어나서는 매일 재미있기만 했어요.”
두고 온 어두운 과거는 현재의 빛을 받고 재가 되어 스러져 가고 있었다. 고통도 아득했던 과거의 일이 되었다.
아팠던 사람, 아픈 사람을 보면 덮치듯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긴 했지만 과거의 일이란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숙부는 빙당호로 사 주시고, 고모는 항상 예쁜 옷 지어 주셨거든요. 어머니는 항상 곁에 함께해 주셨고 할아버지는…….”
련은 이번에도 말끝을 흐렸다.
빙설언의 표정을 보고 나서야 뒤늦은 깨달음이 몰려왔다. 어린아이가 저 안 아팠다는 얘기를 한들 듣는 사람 마음만 저미게 한다는 것을.